“EMP탄이 전력망을 한순간에 마비시키네? 저게 정말 눈앞에서 터지면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의 대비태세는 어떨까?”
최근 종영된 한 인기 드라마에서 EMP(Electromagnetic Pulse·전자기파)탄의 위력을 봤던 기자의 지인이 이렇게 물어온 적이 있다. TV 속의 가상 현실이었지만 EMP탄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전봇대에 달려있던 수상한 전자기기가 터지면서 발생한 강력한 전자파로 인해 대규모 정전이 발생한 마을은 순식간에 암흑천지로 변했다. 가지고 있던 휴대 전화는 일찌감치 작동을 멈춰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도 없다. 달리던 자동차도 일제히 멈추고 전기와 전파를 이용하는 모든 제품은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이 작은 폭탄은 무엇이고, 이 폭탄이 터질 것에 대비해 우리나라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11일 전력업계에 따르면 EMP탄은 통상 약 10개의 원자력발전소 전력 생산량에 해당하는 100억W의 마이크로웨이브 에너지와 같은 강한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무기다. 터지는 순간의 강한 전자기파 때문에 전력망이 순식간에 무력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TV와 형광등, 자동차, 컴퓨터, 휴대전화 등 반도체로 작동하는 전자기기를 모두 망가뜨린다. 레이더나 항공기 방공시스템조차도 무력화할 수 있는 무기여서 터지는 순간, 국가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전력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 무기에서 나오는 강력한 전자기파가 안테나와 전력선을 타고 이동해 민간과 군사용을 가리지 않고 수백m 내의 전자장치를 모두 파괴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기자가 EMP탄에 대한 우리나라의 대비현황을 취재한 결과, 아직 국내에선 EMP탄이 터졌을 때에 대비한 대처 매뉴얼이 없는 상태였고 방호시스템도 개발되어 있지 않았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5월까지 방호시스템 연구·개발(R&D)을 위한 사전 실험절차가 막 진행됐을 뿐이다.
국내 전력망과 전력 R&D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EMP는 핵 폭발에 의해 발생하는 핵 EMP와 레이더와 낙뢰, 태양흑점 폭발과 같은 고출력 전자기파에 의해 발생하는 비핵 EMP로 구분된다. 산업부에선 “현재 정보통신기반보호법에 따라 주요 정보통신기반시설로 지정된 전력제어시스템은 비핵 EMP에 대한 별도의 방호설비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군사용인 핵 EMP탄으로부터 주요 정보통신기반시설의 보호기준은 관련 법령에 규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이 탄이 우리나라에 터질 경우 사실상 무방비 상태다. 이에 대해 산업부 비상안전기획관실 관계자는 “미래창조과학부, 국정원과 함께 EMP탄에 대한 방호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해 8월부터 협의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으며 관련법령 개선과 보호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수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한 R&D를 담당해야 하는 산업부 전력진흥과에 기자가 EMP탄에 대해 묻자 “그것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한심한 답변이 돌아왔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김한표 새누리당 의원실이 한국전력공사 산하 전력연구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전력계통 EMP 방호 취약성 분석 보고서’를 보면, 전력연구원도 EMP탄에 대한 대비책이 시급함을 인지하고 있다.
전력연구원은 지난해 11월부터 2월까지 발전·송배전시설의 중앙 집중 감시제어 시스템(SCADA)의 서버 3가지(후비급전시스템, 스카다주장치, 시스템관리장치)를 대상으로 EMP 피해신호를 시험(PCI)했다. 시험은 차폐실을 이용해 준비된 시료에 접지저항을 0∼10Ω(옴·1Ω은 전력이 존재하지 않는 도체의 두 점 사이에서 1V의 전위차(電位差)로 1A(암페어)의 전류가 흐를 때의 저항)으로 조정하며 전압의 변화를 250∼5000A(암페어·전류의 단위로 1초간에 1쿨롱(coulomb)의 비율로 흐르는 전류의 강도)로 높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접지저항이 10Ω일 때, 스카다주장치는 250A로 전압의 변화를 줬을 때부터 장비의 전원이 꺼졌으며, 전원버튼으로도 재기동이 되지 않았다. 시스템관리장치의 경우, 500A의 전압을 줬을 때 전원공급장치가 손상돼 회로가 열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전력연구원은 보고서에서 “현재와 같이 아무런 방비가 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EMP 공격을 받는다면 전력 시스템 전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히고 있다.
전력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보 기술(IT) 기반이 잘 되어있는 우리나라가 EMP 방호시스템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며 “해외에서도 이 기술에 대해서는 공개를 하지 않고 있어 EMP폭탄 대비 매뉴얼부터 시급히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산업부와 전력사업자인 한전, 전력관련 R&D를 담당하는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등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안남성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장은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한전에서 구축 필요성을 밝혀오지 않았지만 EMP탄은 전력망뿐만 아니라 원자력발전소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대비체계를 빨리 마련해야 할 것 같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의원은 “북한의 위협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 전력망을 한순간에 마비시킬 수 있는 EMP탄에 대한 대비가 전무한 것은 큰 문제”라며 “올해 정기국회에서 주요 정보통신 기반시설을 EMP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법령 제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노기섭 기자 mac4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