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한양답사? 조선왕조 5백년 도읍지 한양을 걷는다는 제목으로 1편 혜화동 골목이야기를 올리고 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제목이 마음에 든다. 세상에 걸어서 수도 서울 한양을 답사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5백 년 도읍지 한양의 구석구석에 지난 6백 년 동안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독자들 앞에 펼쳐낼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앞선다. 자칫 용두사미가 되지는 않을는지? 그렇고 그런 시시한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는지?
그러나 우리의 문화유산이란 것이 어차피 우리들 삶의 과거 이야기이다. 우리 선조들이 살며 사랑하며 이루어낸 생활의 조각들이자 추억들이다. 무어 그리 대단하고 엄청날 것이며 으리으리할 것인가? 때로는 왕실이야기가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을 테지만 그 대부분은 지극히 서민적이고 생활적이며 일상적이고 단순 무미건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만 귀를 기울이면 내가 만난 문화재나 옛것들은 많은 이야기를 해줄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아 섭섭했던 감정이나 세간에 잘못 알려져 억울한 이야기, 얼키고 설킨 사건들을 수근거리는 저잣거리의 뒷 담화 쑥덕공론까지도 전해줄 것이다.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주대하면 차가운 돌멩이에서도 따뜻한 체온이 살아날 것이다.
한양의 답사꾼을 자처하며 카메라 하나 둘러 메고 나선 평범한 나에게 뜻밖에도 여러 가지 할일을 맡겨 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실망하지 않고 아직 한낮은 덥고 갈증과 허기가 솟아나지만 걷고 또 걸어가는 한양답사, 그 두 번 째 순서는 성북동 골목길이다.
성북동 골목
혜화로타리에서 시작한 혜화동 골목길 답사는 송강 정철의 집터와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찾아 서울 과학고에서 마쳤다. 서울과학고 뒷 편, 생뚱맞게 몇몇 돈가스 맛집(?)들이 들어선 언덕 길을 넘어서면 성북동 길이다. 혜화동이 종로구라면 성북동 길은 성북구로 옛 삼선교, 지금 한성대입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 성북동 산동네를 오르는 비탈진 골목길을 올라가야한다.
심우장(尋牛莊)은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온 것으로 전체 규모는 5칸에 불과한 작은 집이지만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여 조선총독부 건물이 꼴보기 싫다고 건물을 북향으로 앉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대찬 곳이기도 하다.
- 심우장 현판이 걸려있는 철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한옥건물까지 마당을 가로질러 돌을 깔아 놓았다.
철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왼쪽에 북향으로 일자형 한옥이 있고 맨 왼쪽 끝 방이 만해의 서재 심우장이며 맞은편 양옥은 관리동이다.
- 건물의 앞모습과 뒷모습. 5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 일자형 건물의 왼쪽 끝 방이 만해의 서재 '심우장'이다. 내부 모습.
만해의 심우장을 둘러보고 내려와 다시 삼선교 쪽으로 걷는다. 건너편에 제법 예쁘게 지은 성북구립 미술관이 보인다. 구립(區立)미술관이다. 어느새 우리도 지자체별 작은 미술관들이 번듯하니 뿌듯하다.
- 성북 구립 미술관. 외부 디자인도 세련되어 보인다.
오른편 길로 계속 내려오다 보니 '덕수교회'가 보인다. 매우 크다. 그 안에 이종석 별장이 있어 잠시 올라가 보았다. 1900년대에 지어져 서울시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이 집은 일제 강점기에 부자로 알려진 이종석이 성북동 산자락에 지은 별장 건물이다.
대문이 굳게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일각대문 양 옆으로는 절집 주련처럼 '덕수교회 영성 수련원' 이라고 씌어 있었으며 담너머로 넘겨다 본 건물은 일관정(一觀亭) 현판이 걸린 누마루가 눈에 띄는 구조였다. 대문 앞 공간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다.
- 깊숙이 숨겨진 이종석 별장. 굳게 잠긴 대문. 교회 측에서 개방했으면 좋겠다.
- 대문 앞 공터에 놓인 우물, 지붕까지 갖춘 모습이다. 울 너머로 훔쳐 본 안채 건물.
안을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큰길로 내려오니 맞은편에는 천주교 관련 건물인 듯 한복차림의 성인(聖人) 모습의 부조가 눈에 띈다. 그 왼편 아래로는 성북동 비둘기를 그린 작고 낮은 집이 보인다. 성북동다운 풍경이다.
이쯤 내려오면 먼저 혜화동에서 넘어온 고갯길인데 다시 왼편으로 길을 건넌다. 그 안쪽으로 성북초등학교가 있고 바로 옆이 그 유명한 간송미술관이다.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에 각 보름정도 무료 전시회를 열뿐인데 장안에 화제가 된지 오래인지라 매번 2시간 넘게 줄을 서야한다. 현재는 10. 13일부터 15일간, 즉 10. 27일까지 가을 전시 중으로 ‘진경시대 화원전(眞景時代 畵員展)'으로 명명하여 김홍도, 김득신, 이인문, 신윤복 등 쟁쟁한 화가들 그림 84점을 전시하고 있다.
- (위쪽 사진부터)최소 2시간이상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다. 길게 늘어선 줄. 1, 2층 전시장 실내에서는 촬영금지이지만 양해를 얻어 관람하는 모습을 찍었다. 2층 전시장.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 선생에 대하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이곳에 소개를 생략한다. 이처럼 소중한 우리 겨레의 슬기로운 보배 문화재를 널리 모으신 덕에 한국민족미술에 대한 인식이 오늘처럼 널리 발전되고 사람들 마음에 깊이 새겨지지 않았나 하는 마음으로 감사드린다.
그러나 2층 건물의 미술관 전시환경은 참으로 열악하기 그지없으니 일제 시대 쯤 지어진 학교건물 소강당 수준의 전시실은 미술품 전시에 필수적인 냉,난방과 공조시스템, 첨단 경보장치 등은 찾아 볼 수 없었으며, 그저 철제 창문틀에 끼워진 간유리 창문을 막는 채광커튼과 라지에타만이 유일한 시설로 보였다.
또한 세련되고 숙련된 안내직원도 볼 수 없었으며, 전시작품들에 비하여 이처럼 열악한 현실들이 믿어지지 않아서 나름 보탬이 될까 해서 판매중인 도록을 들쳐보지도 않은 채 한권 구입해주었다.
간송미술관을 나와 얼마 걷지 않으면 선잠단지가 있다. 선잠단지는 '선잠단이 있던 터' 라는 뜻인데 선잠단(先蠶壇)은 누에를 처음 치기 시작했다는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지내며 누에농사의 풍년을 빌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은 농사짓는 시범 친경(親耕)을 보이고, 왕비는 누에치는 모습의 친잠(親蠶)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의식(衣食)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단은 1473년(성종4)에 마련하여 매년 음력 3월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으나 1908년(융희2) 국가제사 제도를 개정할 때에 사직단에서 함께 배향하는 것으로 하였고 그 터는 국가소유로 하였다.
- 홍살문이 세워진 선잠단 터 입구. 관리인에게 연락하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 안으로 들어서자 뽕나무가 제법 많이 심어져 있고, 보도를 따라 뒤쪽에 단(壇)이 보인다.
- 단 위에는 이곳이 선잠단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석 하나를 세웠다. 선잠단지(先蠶壇址).
선잠단지에서 조금 더 내려와 다시 오른편으로 길을 건너면 최순우 옛집이 나온다. 혜곡 최순우가 1976년부터 1984년 작고할 때까지 살던 1930년대에 지어진 집으로 등록문화재 제268호로 등재되었으며 지역 재개발로 허물어질 위기에서 시민성금 등으로 구입, 관리하고 있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그는 우현 고유섭 선생을 만난 계기로 개성부립박물관에 입사하였고 이후 1974년부터 1984년까지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박물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12월까지 내부수리 공사 중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 최순우 옛집.
지난번 혜화동 이야기부터 이번 성북동 이야기까지 한 번에 이어서 답사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간송 미술관을 꼼꼼히 둘러본다던지, 최순우 옛 집등을 살펴볼 요량이면 무리하지 않고 이틀에 나누어 천천히 살펴보기를 권한다. 다만 간송미술관은 5월과 10월에만 전시회를 개최하며, 최순우 옛집은 12월 공사 완료 후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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