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큐티] 성령님의 도구로 쓰임 받도록 (도서/사진/말씀)

鶴山 徐 仁 2013. 6. 5. 11:06


성령님의 도구로 쓰임 받도록



요즈음 교계에서 성령 받았다
무슨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같은 말들은 자기를 주격으로 세우고
성령은 자기의 소유격으로 만든 것 같은 어감이 있습니다.
성령께 사로잡혀 이끌리며 쓰임 받는다고 해야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지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에도 순종할 수 있을 것인데,
자기를 주격으로 의식하다 보니
사언행(思言行)을 자기 의지적 주장대로 자행하다가
신앙과 사명을 그르치는 일들이 많이 있음을 봅니다.
-장재효목사의 ‘성령께 사로 잡혀 쓰임받자’에서-

성령님은 내 뜻대로 일하시는 도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나’라는 자기 존재부터
아들의 피 값으로 구속하신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성령님의 도구로 더욱 요긴하고
힘 있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성령께 온전히 사로잡히고 점령당해야 할 것입니다.



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주님 뜻대로
예전에 농활에 갔을 때 였어요.
저는 온갖 사회적인 일들에 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도저히 스케줄이 안 되서 못 갈 거 같다고, 그냥 중보기도로 참여하겠다고 농활팀에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잘 풀리던 일은 갑자기 중단되었고, 더 이상 핑계가 없었던 저는 농활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요나처럼 투덜거리면서요.
하지만 그곳에서 깨닫게 되었어요. 그곳으로 부르신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는 걸.
제가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해도, 주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주님께서 날 위해 준비해 주신 그 길이 제게 최선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 이후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게 최선을 주시는 주님,
제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살게 하여주세요.
글쓴이 : 김나현
영화연출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 창세기 26장 17~25절
17.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3.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묵상글]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삭이 블레셋 지역이었던 그랄 골짜기에 머물렀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삭이 그곳에 거주할 때 우물을 팠습니다. 그 우물은 샘의 근원이어서 물이 풍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랄 지역의 사람들이 그 우물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면서 이삭의 사람들과 다투기 시작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팠던 그 우물을 메워두고 사용하지 않다가 이삭이 그 우물을 다시 파서 물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이삭의 입장에서 보면, 괘씸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 곧 ‘다툼’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합니까? 그 우물을 그랄 지역의 목자들에게 주고 물러납니다. 그리고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서도 물이 터졌습니다. 그랄 목자들은 또 그곳까지 찾아 와서우물을 두고 다투기 시작합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 곧 ‘대적’이라는 붙이고, 다투지 않고 또 물러납니다. 그리고 나서 또 우물을 팠습니다. 그 이름을 ‘르호봇’ 곧 ‘넓다, 확장되다’라고 붙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랄지역의 목자들이 왜 싸움을 시작합니까? 이삭이 판 우물에서 물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에게 왜 다툼이 시작됩니까? 소유가 많아지고 나눌 것이 많아졌을 때, 우리의 삶에도 다툼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진 것이 많아지기 시작할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할 때가 아니라, 풍요로울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이삭은 다툼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에섹’ ‘싯나’를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서 ‘르호봇’에 머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삭이 뒤로 후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이삭은 지경을 넓히게 된 겁니다. 우리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느냐가 내 삶이 행복한가 아닌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양보하는 것은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넓어지는 길입니다. 우리의 안목이 이삭과 같이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행복의 기준을 세상에서 더 많이 갖고 누리는 것에 둔다면,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행복의 기준, 삶의 가치관, 인생의 목적이 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을 향해서 뛰어가야만 합니다. 이삭이 그랄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물러설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게 바라볼지라도 우리는 다툼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물러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이삭과 같이 뒤로 물러나서 더 넓은 땅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글쓴이 : 전기철 서울신학대학,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보스톤 조직신학 석사(S.T.M)/연세대학교 박사학위(Ph.D)
강남새사람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