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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공로는 잊어버려라
인간은 집착하기를 좋아한다. 공부를 한 사람은 공부에, 돈을 번 사람들은 돈에, 선을 베푼 사람은 베푼 선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거기에 집착하며 은연중에 그것을 자랑하고 내세운다. 자식을 공들여 키우면 자식에게 집착한다. 내가 너를 이렇게 키웠는데 감사하지 않느냐 한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왜 이런 시련과 재앙을 주시는 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봉사를 많이 했는데 이만큼 바쳤는데 하는 공로의식으로 하나님이 댓가를 주지 않는다며 시험에 들기도 한다 -김명수 목사의 ‘달려가는 삶’에서-
인간의 행위 중 아름다운 것은 자리에 머물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루어놓은 것에 대해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했을 때, 선한 일한 것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베푼 사람은 그것을 잊어버려야 진정한 베품이 됩니다. 좋은 일을 한뒤 자랑하고 생색내면 그것을 다 까먹게 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보화를 하늘나라에 쌓고 집착하지 않을 때 내가 쌓은 공로는 온전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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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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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담기 |
탁 트인 하늘 아래 등불처럼 빛나보자. 어두운 곳, 상처난 곳, 아픈 곳, 힘든 곳. 빛으로 비추자. 복음으로 섬기자. 사랑으로 섬기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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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상동 우물네트워크 대표 기독이미지사이트 피콕 picok.co.kr 운영 기독묵상사이트 씨노트 cnote.kr 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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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 말 1:2-3 |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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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계속된 책망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다 백성들은 자신의 문제점을 제대로 안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가 내 아름을 멸시하였다>고 지적하시는데도 그들은 여전히<우리가 어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느냐?>(6절)고 반문하고, 하나님이 <너희가 드리는 제물이 더럽다>고 하시는데도 <우리가 어찌 주를 더럽게 하겠느냐?>(7절)며 눈을 치켜떴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아예 모르거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면 회개를 할 수도 그걸 고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다만 문제를 깨닫거나 혹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제발 하나님이 문제를 지적하실 때 이를 부정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시인하여 주님이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시길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2절). 이것은 당시 그들이 깊은 영적 침체와 맹목에 빠져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하시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아니, 주께서 우리를 언제 어떻게 사랑하셨다는 겁니까?>하며 당돌하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어떻게?>라며 따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바벨론에서의 70년간의 포로생활도, 또 바사왕 고레스를 통한 귀환도 다 사랑의 징계요 은혜며, 귀국 후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수축한 노역도 다 그들을 사랑하사 베푸신 축복임에도 정작 유다 백성들은 그 점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원망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신앙이 무너졌을 때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 입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대신 원망과 불평과 하나님을 탓하는 망언들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시대 유다 백성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3절). <너를 사랑하였노라> 하시는데도 <어떻게 사랑하셨느냐>며 도발하는 유다에 대해 서운함을 억누르시며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변증하신 대목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형제지간임에도 하나님은 동생 야곱을 사랑하시고 형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야곱의 생애를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미워하신 에서가 아비 집에서 평안히 살 때 야곱은 도망자가 되어 20년간이나 객지생활을 하며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올 때도 에서는 수백의 사병을 이끌고 그를 향해 개선장군처럼 달려왔지만 야곱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허벅지 뼈가 상하도록 하나님과 씨름하다 절룩거리며 형을 만납니다. 도대체 누가 복되고 누가 버림받은 사람인지가 헛갈릴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축복은 그런 것입니다. 결코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가차없이 벌하시고 무섭도록 책망하시며 징계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지 요즘 엄마들처럼 무엇을 하든 그냥 내버려두는 무책임한 사랑이 아닙니다. 에서를 보십시오. 그는 버림받은 인생입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간섭하고 잘못을 책망하고 벌할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산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 눈에는 그가 도리어 축복 속에서 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아무리 악하게 굴고 부정하게 살아도 아무런 징계도 간섭도 없고 그저 모든 게 형통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게 바로 무서운 저주입니다. 가장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은 그냥 <내버려두심>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바로 이 <버려두심>(롬 1:28)의 저주 속에서 삽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그걸 부러워합니다. 나는 바르게 살려고 애씀에도 되는 일이 없고, 세상 사람들은 남을 등치며 악하게 사는데도 모든 게 다 잘 풀린다는 겁니다. 거기서 우리는 흔히 좌절하고 회의에 빠집니다. 당시 유다의 불만과 불평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 12:6)고 했습니다. 혹 아직도 징계 중에 계십니까? 지난 해 당하신 뼈아픈 시련으로 아직 그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셨습니까? 감사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임을 뜻하는 가장 확실한 물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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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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