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최상의 타이밍 기다려라
당신이 꿈을 포기했다고 해서 하나님도 당신을 포기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두신 꿈이 실패와 거부의 흙더미에 묻혔어도 그 씨앗은 아직 살아 있다. 꿈의 불씨를 되살리라. 열정을 되살리라. 당신의 꿈이 죽은 것처럼 보여도 그 꿈은 묻히지 않았다. 심겨져 있을 뿐이다. 때가 되면 다시 살아난다. -조엘 오스틴의 [최고의 삶] 중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내 시간표대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는 꿈 때문에 좌절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타이밍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어야 내 눈앞에 꿈이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최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타이밍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
|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
| | | | | |
|
| |
|
|
|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인도해주세요. |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만져 주세요. 하나님! 맑게 갠 날씨처럼 우리 마음이 긍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찰 수 있게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인도해주세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임이요." (마태복음 5: 9)
| | |
|
글쓴이 : 풍금 찬양.간증 어와나감독 필리핀선교 인토콥 |
|
| | | | | |
|
| |
|
|
죽고 싶은 마음뿐 - 욥 3:1~11 |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3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5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6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7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찌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
|
사람은 누구나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라도 낙심할 수 있고, 또 심한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절망감은 때로 우리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도 합니다. 욥도 계속되는 고통에 지쳐 결국은 그런 심정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죽음으로써 그 고통에서 놓여나기를 소망했는데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기보다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욕구를 상실한 것입니다. 극심한 우울증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1절).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3절). 욥이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슬픔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대신 자신의 출생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낙심이란 아무리 강한 사람, 아무리 경건한 신자라 해도 누구든 경험할 수 있는 현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낙심한 자의 최악의 고뇌를 다 보여주었습니다. 우울, 분노, 근심, 원한, 혼란, 냉소, 두려움, 무기력, 불면증, 슬픔 등. 바울도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후 1:8-9)는 고백까지 했고, 마르틴 루터도 깊은 우울증에 빠져 <나는 일주일 이상 죽음과 지옥의 문턱 가까이 가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절망적인 심정과 하나님에 대한 불경스러운 마음에 휘말렸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깊은 절망의 나락과 심연의 골짜기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악어를 저주하듯 내 태어난 날을 저주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8절). 욥은 네 가지의 고통을 한꺼번에 겪어야 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너무 심해 먹고 마실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이성적인 고난이 극심해 아무리 마음속으로 묻고 답을 구해도 혼란스럽기만 하고 황망할 뿐이었습니다. 정서적인 고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잠시도 그 마음이 쉴 수 없없고 영적인 고통 또한 최악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신화적인 바다 괴물 리워야단(식인 악어)을 저주하듯 사람들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해 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했겠습니까? 낙심과 우울증은 이토록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가야할 마땅한 길을 잃어버리게도 하고 또 건전한 판단력을 상실한 채 잘못된 결론에 성급하게 도달하게도 합니다.
사산아로 태어났더라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11절). 욥은 자기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다 여기서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차라리 죽어서 나왔더라면 이보다는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배은망덕하고 외람되게도 욥은 지금 자신의 생명을 증오하고 자기를 사산아로 태어나게 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차라리 태에서 죽어 이 세상의 고통과 험한 꼴을 겪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치명적인 모독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부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욥은 지금 삶이 자신에게는 최악의 저주고, 무덤이 가장 부러운 축복이라며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욥에게 심정적인 무한 연민을 느끼면서도 가장 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
|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