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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
교회는 두 얼굴을 가져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에서는 천국을 대표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천국에서는 세상을 대표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연종 목사의 ‘섬기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세상은 교회를 통해, 또 교회 안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통해 주를 보기를 원하며 때론 그리스도인들의 삶 자체가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 여깁니다. 동시에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대표하는 얼굴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달리 빛이 있는데도 어둠이 물러가지 않는다면 그 빛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앞에,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교회가 되도록 우리 각 사람이 정결케 되고 정직과 겸손함으로 겸비하여 주를 전하기에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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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 - 잠언 26:10-17 |
10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13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16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17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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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의 사전적 정의는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입니다. 우리가 여기 <태도>나 <버릇>에 방점을 찍는다면 게으름이란 결코 한 개인의 천성일 수만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습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게으름을 인정하지 않거나 자신이 게으른 줄 알면서도 계속 방치하여 결국은 <병적인 게으름>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게을러졌다고 느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는 것입니다.
핑계가 많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13절).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핑계 없는 게으름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천성이나 기질 같은 어쩔 수 없는 원인으로 그 이유를 돌리지만 실은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게으른 자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일>입니다. 게으른 자는 신경을 쓰며 땀 흘려 수고해야 하는 일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며 일을 피합니다. 사자는 정글이나 광야에 있고, 또 사람들이 일하는 낮에는 굴속에 있습니다. 사자는 오직 게으른 자의 공상이나 변명 속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부디 헛된 변명과 핑계로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 하지 마십시오. 게으름은 우리 삶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결코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정신적 뱃살>과도 같은 것입니다. 특히 핑계가 많은 자의 게으름은 오직 먹기만 하고 운동은 하지 않는 사람처럼 좀처럼 빠지지 않는 뱃살입니다.
침상에서 산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14절). 게으른 자는 그의 침상에서 모로 누웠다 불편하면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며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그 동작을 반복하는데 그게 마치 돌쩌귀에 고정되어 계속 여닫히는 문짝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게으른 자는 자기의 침상에 붙박혀 딩굴딩굴할 뿐 아예 털고 일어나 뭔가를 시도해 보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기회는 다 지나가고 의욕은 더욱 고갈되고 신앙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만 맴돌 뿐 발전이 없습니다. 도대체 게으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새벽기도회는 상상할 수도 없고, 오전에 하는 성경공부반이나 중보기도회 같은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없고, 주일 오전 11시 예배조차도 지각하지 않고 참석하는 법이 없습니다.
자신을 지혜롭게 여긴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16절). 놀랍게도 게으른 자는 대부분 자신의 게으름에 대해 나름의 변명과 빈틈없는 합리화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게으름을 지적하거나 비판하면 가차없이 반격하며 끝까지 자신을 옹호하고 정당성을 강변합니다. 이는 게으른 자의 심층에 교만과 자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이야 말로 이미 지혜롭기 때문에 굳이 남들처럼 수고롭게 공부할 필요가 없고, 한방이면 대박을 터드릴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고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조차도 무지하고 맹목적인 다수와는 달리 자기는 복음의 핵심을 꿰고 있다며 안심하는가 하면 오히려 남의 흠을 꼬집으며 비판하는데서 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현자는 냉정하게 말합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1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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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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