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鶴山의 넋두리

지나온 아름다운 청춘을 회상해 보며

鶴山 徐 仁 2011. 5. 30. 13:26


흔히 사람들은 인생의 청춘은 세월따라 흘러갔다 하는 가 하면,

어떤이는 세월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 머물고 있지만

저마다 사람들이 지나쳐 간다고도 한다.

 

어쨌든 삶의 운이 좋은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매 한 가지로 

 태어나게 되면 영유아를 거쳐, 청춘을 맞이 하는 것이죠.

 

하지만, 짧은 인생이라고들 하나 조금 긴 세월을 살아오다 보니

인생여정은 청춘 시기나 중장년이나 시기마다 나름대로

그때마다 주어지는 삶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청춘시절에도 참 열심히 일도 많이 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없이 앞만 달리는 가운데

그때 나름의 즐거운 일들이 많았고,

아름다운 역사가 회상됩니다.

 

요즘 사회와는 거리감이 조금 먼 사회속에서 청춘을 지나쳤지만

현대의 젊은이들처럼 부모님의 조력은 거의 받지 못했어도

세상사 대개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이것이 강화제가 된 것도 같다.

 

어릴 때부터 어른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이게 하고, 은연 중에 작용한 것이

오늘까지의 자신을 만들어 온 것이라 여겨

전화위복의 삶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이미 20대 중반에 당시에는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게 어려웠던 시기에

군사유학이기는 했지만 조종사교육훈련 차 도미하게 되었고

활기찬 청춘시절을 미국에서 보낼 수 있었던게

자신의 삶에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선택하여, 군의 간부가 되었고, 또 원하든 조종간을 잡게 되고,

경비행기 조종사를 거쳐, 당시로는 우리나라에서는 초창기로

헬리콥터 조종사교육훈련 차 도미하게 되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도 모든 게 감사 할 뿐이다.

 

처음 미국 땅을 밟은 때가 미국에서 2차대전의 영웅으로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장례기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비록, 1 년 간이라는 여유롭지 않은 첫 번째 미국 나들이 기간이였지만

젊은 총각시절이였기에 세상사 제대로 모른 채 패기는 충천하였다.

 

그나마 처음 도미 할 때는 현재와 같이 우리나라 국적기도 아닌 항공기,

미군 전세기 노스웨스트 항공기에 미군들과 동승을 하였고,

미국 서부 해안 워싱톤주의 시텍국제공항 근교의

미공군기지에 도착하여 근 일주간을 보낸 후

민간공항인 시텍국제공항을 출발하여

텍사스 달라스공항을 경유하여,

샌안토니오공항으로 갔다.

 

미국 국방성 언어학교 3곳 가운데 하나인 래크랜드 공군기지의 영어학교에

처음으로 미국 유학생활의 여장을 풀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곳에서 조종훈련에 관련하여 어학교육을 이수한 후에 알라바마에 위치한

미육군항공학교로의 이동은 다섯 사람이 한 팀이 되어 구매한 밴으로

육로로 텍사스에서 루지애나와 미시시피를 경유하여 앨라바마로

2박 3일 간의 긴 여정을 이동하면서 나름대로 여행을 하였다.

 

1960년대 말이었기에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고, 특히 미국 남부지방은 

우리나라 사람은 고사하고, 동양인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었다.

 

더구나 미국의 군사원조국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절이었기에

당시만 해도, 자국의 돈으로 유학을 온 다른 나라 장교들을 만나면

부러움과 함께 때로는 약간 주눅이 들었던 기억도 남아있다.

 

소위 386세대라고 일컫는 이들은 과거없는 현실을 보고 있런지는 모르지만

급진적으로 발전한 오늘 날 조국의 상황을 어떻게 제대로 이해를 할까!

 

미국에서 돌아온 후 1년 여만에 헬리콥터 조종사로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어

당시 나트랑에 주둔하고 있던 십자성부대 예하 11항공중대 소속으로 

UH-1을 조종하면서, 부기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백마부대에서

연대장과 정보주임으로 근무 중이었던, 전두환대령과

장세동소령이 동승하여 탑승했던 기억이 난다.

 

시대가 바뀌고 보니, 일부에서는 우리 군이 월남전에 참전했던 역사를 두고,

이런저런 토를 달고, 때로는 분노를 자아낼 만큼 폄하 하기도 하며,

소위 진보라는 가면 아래 활동하는 좌향성향의 무리들 중에는

입만 살아서 자신들이 마치 가장 이 나라의 민주투사인양

미사여구와 감언이설로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지만

저들이 오늘 날 이 만큼 살게 된 밑거름이 된

지난 역사를 곡해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지금도 자신이 지나온 개인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후회스런 마음을 가지지 않으며, 다시 그 같은 상황이 부여되어도

나라의 부름이나 명령에는 기꺼이 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과 싸우면서, 다사다난하게 지나온 한 세월의 소용돌이였다 하지만

자신의 청춘시절도 나름대로 보람과 의미있는 세월이었다 생각한다.

 

따라서, 열악한 환경조건이 언제나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자신의 삶을 통해서 확신하면서, 오히려 그것이 약이 될 수 있으며,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옛날 우리 조상님들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으로 실감하였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살기좋은 현대사회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보다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부모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왕자나 공주처럼

따뜻한 배려와 보살핌으로 인해 자생력이 너무나 약한 가운데

비교되고, 경쟁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성장해 왔기에

과거에 비해 살림살이 형편은 훨씬 풍요롭다고 하지만

인심세태는 더 흉흉해지고 각박해져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전반적인 나라살림이 가난한데다 이혼부모 가정에서 자랐기에

그것이 자신을 더욱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고

꿈과 도전, 그리고 성취라는 굳건한 믿음을 스스로 신뢰하면서

10대 초반부터 자립정신으로 살 수 있게 한 것에 감사한다.

 

중학교 이후부터 고학으로 꾸준히 계속된 학구열은 박사로 마무리 되고,

군에서는 항공장교로서, 조종사생활을 대과없이 수행토록 했으며,

대학에서는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열정을 쏟아부었고,

이제부터는 국선도 지도자로서 사회에 봉사하고 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