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외국과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신식군대인 별기군은 영국과 독일 등에서 수입한 소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1890년에는 6.5㎜ 촌전총(村田銃) 2만정을 일본에 주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촌전총은 1905년 일본에서 ‘38식’ 소총으로, 1936년에는 ‘99식’ 소총으로 개량됐다.
99식 소총은 38식 소총의 구경을 6.5㎜에서 7.7㎜로 늘린 것이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99식 소총을 사용했다. 이후 1947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처음 M1 소총이 지급된 뒤 이듬해 4월부터 일선부대로 전파됐다. 49년 7월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M1 소총은 4만2636정이었고 탄환은 190만발이었다.
M1 소총은 미국에서 개발됐다. 19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민간 기술자로 근무하던 존 켄티우스 개런드는 구경 7㎜의 가스작동식 반자동 소총을 개발했다. 하지만 이 신형 소총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반대로 제식 소총으로 정식 채택되지 못했다. 맥아더 장군이 7.62㎜ 구경의 소총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개런드는 결국 1938년 자신의 소총을 7.62㎜로 개조한 뒤에야 미국 육군으로부터 사용인가를 받았다.
초기에 생산된 M1 소총은 탄 걸림 현상이 심해 미 의회에 뇌물을 주고 군용총기로 채택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후 거의 모든 M1 소총이 새로운 가스배출 작동방식을 사용하도록 개조됐고 본격 생산은 1940년부터 이뤄졌다.
M1 소총의 가장 큰 특징은 군에서 대량 사용된 제식 소총 중 최초의 반자동 소총이라는 점이다. 2차대전 당시 영국의 ‘리 엔필드’, 독일의 ‘Kar98k’, 소련의 ‘모신 나간트’, 일본의 ‘99식’ 소총 등은 모두 ‘볼트 액션’식 소총이다. 1발을 발사한 후 노리쇠를 수동으로 후퇴시켜 탄피를 제거해야만 다음 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M1 소총은 사격 후 자동으로 탄피가 배출돼 방아쇠만 당기면 후속 탄 사격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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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발이 장전되는 M1 소총의 ‘ㄷ자형 클립’. | 자연 사격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M1 소총의 사격속도는 볼트 액션식 소총의 2.4배에 달했다. 99식 소총으로 10발을 사격할 때 M1 소총은 24발의 사격이 가능했다. 작동방식의 차이가 발사 속도에만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볼트 액션식 소총은 1발을 발사한 다음 손으로 노리쇠를 후퇴·전진시키다 보니 총이 흔들려 연속 조준이 불가능했다. 반면 M1은 설령 초탄이 빗나갔을 때라도 계속 조준을 유지하고 사격할 수 있기 때문에 명중률이 높았다. 특히 8발이 장전되는 ㄷ자형 클립은 마지막 탄환 사격과 함께 자동으로 배출되고, 여기에 새 클립을 장전하고 노리쇠를 전진시키면 바로 발사할 수 있는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모두 약 530만정의 M1 소총을 생산했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M1 소총 생산은 종료됐지만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생산에 나서 1956년까지 약 70만정의 소총을 만들어냈다.
무게가 4.3㎏이어서 작은 체구의 한국군에게는 다소 무거운 것이 흠이었지만, 6·25전쟁에서부터 M16 소총이 보급되는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군 병사들과 애환을 함께한 소총이었다.
지금도 일부 예비군 부대에서는 상당량의 M1 소총을 전시물자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출처 : 세계일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