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 전 1963년 12월은 우리나라의 첫 인력수출로 2만5천명의 젊은이들이 서독에 광부로 간호사로 갔던 달이다. 그 시절 인구 2천4백만에 실업자는 250만이 넘던 때다. 그때 국민소득이 고작 80, 90불에 북한은 200불이 넘던 때다. 수출할 수 있는 것이 인력뿐이어서 남자는 광부로, 여자는 간호사로 인력수출 되었다. 독일로 간 남자들은 지하 800m의 막장에서 목숨 걸고 일하고, 여자들은 죽은 독일인의 시체를 닦는 일을 하며 외화를 벌었다. 그렇게 벌어 보낸 송금이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나 되었다.
지하갱도 막장에서의 일이 얼마나 고되고 위험하였으면 내려갈 때마다 인사말이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라"는 뜻의 "Gluck auf"이었을까. 그들이 독일에 간지 일 년 되던 64년 12월에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독일을 방문하여 탄광 막장에서 일하는 그들을 찾아왔다. 대통령 환영식에서 식순에 따라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가 울려 퍼지자, 광부와 간호사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곧 이어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대통령 역시 울며 입을 열어 연설을 시작하였다. 손수건으로 연방 눈물을 훔치며 연설하였다. 글자 그대로 눈물어린 연설이었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 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에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목을 놓아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한 사람한 사람을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렇게 흘린 형님들과 누님들의 눈물과 땀이 오늘의 한국을 일구어내는 기초가 되고 있다. 우리들 후배들은 선배들의 그런 눈물과 땀과 희생과 헌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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