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지음(知音)·지기(知己)
매년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오면 ‘망년회’다, ‘송년회’다 하며 갖은 이름의 수없이 많은 모임이 있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고 반가운 모임이 동창들의 모임이 아닌가 싶다. 필자도 역시 지난주 15일 양재동 외교센터 12층 포에버리더스에서 부부동반 서울 고교 동기 송년회가 있어서 몇 년 만에 참석하게 되었다. 따져 보니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나고부터 반세기가 넘게 사귀어 온 친구들이었다.
1960년 당시에는 특차 모집으로 대구의 수재들이 입학했던 경대사대부고 출신들인지라 필자를 제외하고는 친구들 대부분이 박사·교수·의사·CEO·장군 등등을 지낸 성공한 친구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공선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나이가 된 사람을 일컫는 조어)가 되어 고희(古稀)를 바라보면서도 살아온 삶의 이력대로 그 모습들이 나름의 여유와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도 그동안 어떤 지위에서 어떻게 살아왔던 서로 거리감 없이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으니, 나이 들수록 역시 친구 좋다는 말은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자가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서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訪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라고 한 이때의 벗은 분명 그냥 친구가 아니라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이르는 ‘지음(知音)’을 가리킨 것일 게다. ‘지음(知音)’이란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뜻으로, 지기지우(知己之友)의 ‘지기(知己)’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데, 이는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거문고의 달인 백아(伯牙)와 나무꾼 종자기(鐘子期)의 고사에서 유래(由來)한다.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 유백아(兪伯牙)는 스승 성연자의 가르침으로 대자연의 조화가 빚어내는 신비하고 무궁한 자연의 소리를 터득하여 금곡(琴曲)인 ‘천풍조’, ‘수선조’를 완성하여 거문고의 달인이 되었고, 입신출세의 길이 열려 진(晉)나라에 가서 대부의 봉작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경지에 이른 거문고의 음률(音律)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 고독(孤獨)한 생활을 하다가 20여 년 만에 초(楚)나라로 돌아와 스승을 찾았으나 스승 성연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백아는 자기의 음악을 이해해 줄 사람이 없게 되자 수심에 잠겨 탄식하며 거문고를 탄주(彈奏)하였고, 이때 자신의 음악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평생 땔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 팔며 사는 가난한 나무꾼 종자기였다.
백아가 거문고의 줄을 가다듬어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을 현으로 타면, 종자기는 “참으로 좋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 있구나.”라고 했고, 또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기가 막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구나!” 하며 감탄했다.
백아와 종자기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이 서로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오직 한 사람인 종자기가 없는 세상에서 거문고는 뜯어 무엇 하느냐며 거문고의 줄을 끊어 버렸다고 한다. 이 고사가 ‘백아절현(伯牙絶絃)’이며, 여기에서 나온 말이 ‘지음(知音)’이다.
이밖에도 친구 사이의 사귐을 나타내는 고사성어(故事成語)로는 ‘죽마고우(竹馬故友)’, ‘수어지교(水漁之交)’, ‘금석지교(金石之交)’, ‘막역지교(莫逆之交)’, ‘문경지우(刎頸之友)’ 등등 수없이 많으나, 그 중에서도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나오는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사귐이란 뜻의,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우리에게 가장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중국 제(齊)나라 때,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맡아 동업을 하였는데 이익금은 관중이 혼자서 독차지하였다. 그런데도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하였다. 또 전쟁에 나가서는 관중이 세 번이나 도망을 갔는데도 포숙은 그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 때문이라고 그를 변명하였다. 이처럼 포숙은 관중을 끝까지 믿으며 밀어 주었는데, 관중도 일찍이 이런 포숙을 가리켜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오직 포숙뿐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생아자부모 지아자포자야)]라고 했다는 데서 나온 고사 성어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있기는 하지만, 형제간에도 법정까지 가며 재산 다툼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서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백아(伯牙)와 종자기(鐘子期)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사귐 같은 지음(知音)·지기(知己)를 논한다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요즘 같은 세상이기에 더욱 지음(知音)·지기(知己)가 절실하게 생각나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가 많다는 것은 친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고 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친구’나 ‘벗’은 ‘(학교나 사회에서 비슷한 나이로 만나) 서로 사귀며 아끼어 정이 두터워진 사람’을 뜻한다 하겠으며, 따라서 이는 분명 ‘지음(知音)’이나‘지기(知己)’와는 다르다 하겠다.
진정한 친구 한두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에게는 과연 그 많은 친구들 중에 ‘지음(知音)’·‘지기(知己)’가 몇이나 있을까 돌아보게 된다. 더하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학봉집(鶴峯集)」‘언행록(言行錄)’에 나오는 ‘나의 잘못을 말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고 나의 장점을 말하는 자는 나의 적이다.’[道吾過者是吾師, 談吾美者是吾賊(도오과자시오사, 담오미자시오적)]란 말의 뜻을 가슴에 새겨본다.
(시인, 예술촌 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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