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택입니다.
흔히 우리가 추상미술이라는 말을 합니다.
추상미술이라는 것은 일단 주어진 화면에서 외부세계를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없는 그림 그것을 추상미술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피카소 그림은 추상일까요? 아닙니다.
피카소는 여전히 형태가 있지요.
왜곡되고 굴절되고 찢겨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그것이 우는 여자 같고 소 같고 또 어떤 특정한 대상을 따온 것이죠.
예를 들어 칸디시크나 몬드리안 그림 기억나시죠?
순수하게 사각형과 색 면과 직선들이 있는 그림들은 추상미술이라고 말하겠죠.
쉽게 말해서 서양의 현대미술은 그 이전에 아주아주 오랫동안 미술이 외부세계를 장악하고 사실적으로 지향해왔던
전통에 대항해서 재현적인 표현을 의도적으로 피해 나갑니다.
미술이 왜 꼭 주어져 있는 세계에 저당 잡혀야 될까?
그것을 꼭 똑같이 그리는 것만이 미술일까?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미술이 무엇이다'라는 지시적인 언어적인 그러한 그림을 벗어나서 미술은 순수히 시각적인 것 그어떤 것을 강렬히 열망합니다. 몬드리안 그림 보시면 알겠지만 주어진 화면에 수평과 수직선만을 보여주죠? 그리고 안에 결국은 사각형들이 남겨져 있겠죠. 그 사각형을 노란색으로 빨간색으로 파란색으로 칠하고 있는 걸 보실 겁니다.
여러분 그건 그림이 외부세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주어져 있는 사각형 틀 안에서 그림을 만들어 가고 있는 걸 알 수 있겠죠.
무슨 얘기일까요? 주어진 사각형 안에 사각형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그림 속의 사각형은 결국 그림의 틀이 규정지어지고 있는 내용이라고 말해볼 수 있겠죠.
몬드리안이 그리는 수직과 수평은 캔버스 밑변과 윗변을 그대로 따오면서 그것 안에서 계속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외부세계를 참고하지 않고 그림 스스로 자족적인 어떤 시각적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것
이것은 흔히 추상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점차 대상은 사라져버리고 어떤 색깔과 붓질과 사각형만 덩그러니 남는 것이겠죠.
따라서 여러분이 추상미술을 보실 때 '이것이 뭘 그린 거야?', '어떤 걸 그린 거야?' 라고 질문하시기보다는
이 작가가 외부세계를 연상하지 않고 주어진 화면에서 납작하고 밋밋한 캔버스 평면에 물감과 붓질을 가지고 자기만의 어떤 흔적을 남겨서 우리한테 시각적인 임펙트를 주는가? 그것을 보시는 겁니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이미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림은 굉장히 난해하고 까다롭고 어려워지죠.
또 하나는 물감과 붓질이라고 하는 것만 죽죽 바르고 이렇게 칠하고 저렇게 칠하면 결국에는 물질의 흔적만 보여주기 때문에 그림이 차가운 물질로만 귀결되는 아쉬움을 갖겠죠.
그래서 추상미술은 사실은 거의 끝납니다.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사물로 오브제로 나가기도 하고 사회출로 나가기도 하고
또는 포스토모던이지만 다시 다시 이미지가 들어오면서 추상미술은 사실은 지금 우리 화단에서 거의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문범 이라는 작가는 현대미술이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그 역사적 전통 속에서 여전히 회화가 무엇일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굉장히 중요한 작가로 생각됩니다.
이 그림은 넓고 커다란 캔버스에 보이 스틱 즉, 유아물감을 여러분 크레파스처럼 크레용처럼 굳힌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기름에 녹여서 그으면 파스텔처럼 문질러지거든요. 손가락으로 이렇게 칠하고 저렇게 칠하고 비벼나간 겁니다.
주어진 납작한 화면에 외부세계를 지향하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 물질해가지고 이렇게 비비고 저렇게 비비고 자신의 신체가 화면에 덮어나가려는 것이겠죠.
알다시피 오늘날 미술은 현대미술을 한다면 이미지가 다시 들어가선 안 됩니다.
왜 그건 과거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렇겠죠.
그렇다고 그냥 물질로만 규배되버리는것도 안 되겠죠. 이미 다 했었으니까.
이게 굉장히 딜레마가 생기는 겁니다.
오늘 현대회화는 과거의 이미지로 돌아갈수두 없고 그렇다고 차가운 물질로만 규배되지 않는 어떤 지점을 향해서 미술이 무엇이고 회화가 어떤것인가를 모색해야되겠지요.
보십시오. 이그림은 그냥 밀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납작한 캔버스 표면에 보이 스틱이라는 물질성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죠? 외부세계를 연상시키지 않죠?
그런데 다 그리고 낫을때 보면 그 비어있는 틈, 여백 같은 것이 뭉실뭉실하게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마치 옛 우리의 전통 산수와 같다는 겁니다. 관념산수같죠.
깊은 산과 자연속에 안개가 몽실몽실하게 피어있는 여백은 단지 빈화면이 아니라 자연계에 떠돌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힘들과 함께 어떤 에너지를 보여주기 위한 겁니다.
또는 자연에 다 담아낼수 없으니까 비어있는 여백을 통해서 무안한 자연을 연상하라는 겁니다.
이작가의 작품 제목이 뭔냐하면 여러분 슬로우,세임입니다.
즉 천천히 쉼표하고 같이입니다. 무슨소리일까요?
천천히 천천히 물질을 붙이고 다녔더니 비비고 다녔더니 뭐 같드라 이겁니다. 산수와 같드라 이겁니다.
이런것이 오늘날 한국의 현대작가들이 작업 굉장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산수를 그대로 촬영하거나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 서양현대미술의 논리를 끌어 안으면서 그것을 우리나름의 정당성있는 어떤것으로 만드는 새로운 추상이라는 얘기겠죠.
천천히 천천히 스틱을 비비고 다녔더니 산소와 같더라 이겁니다.
물질로도 아니고 이미지로도 아니고 그 두지점 어디를 향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Slow, Same이란 얘기입니다.
아주 중요한 오늘날 현대미술의 한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