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4일 평양 대동강 철교는 폭격을 맞아 휘어지고 부러진 채 뼈대만 앙상했다. 피란민들은 목숨을 걸고 곡예사처럼 철교 뼈대 위를 걸어 자유를 찾아가려고 했다. AP통신의 사진기자 데스퍼는 피란 행렬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며 셔터를 눌렀다. 가슴 저미는 아픔을 담아 셔터를 눌렀기에 지금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1854년 크림전쟁을 취재한 영국 런던타임스의 러셀을 첫 종군기자라고 한다. 그 후 수많은 종군기자가 나왔지만 사진기자 카파가 전설처럼 꼽힌다. 스페인 내전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병사를 찍은 카파는 1954년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아 숨졌다. 목숨을 걸고 취재하는 정신을 '카파리즘'이라고 한다.
▶종군기자는 남자만 하란 법이 없다. 6·25 때 미국 여기자 히긴스는 "한국 해병대는 귀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고 써서 '귀신 잡는 해병'이란 말을 낳았다. 히긴스는 '이브닝드레스보다 군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란 소릴 들으며 전쟁터를 누볐다. 2003년 이라크전 땐 강인선 조선일보 기자가 미군 5군단과 함께 움직이면서 전쟁터의 일상을 섬세한 감성으로 담은 기사로 새로운 전쟁 르포를 보여줬다.
▶북한이 포탄을 퍼부은 연평도에서 150여 명의 국내외 기자들이 종군기자처럼 취재 경쟁을 벌였다. 12년 동안 전쟁터만 쫓아다녀 '전쟁을 몰고 다니는 기자'로 불리는 미국 NBC 방송의 엥겔도 연평도에 왔다. 한 스페인 기자는 "북한은 예측할 수 없는 나라다. 만약 포탄이 학교에 떨어졌으면 어찌할 뻔했나"며 혀를 찼다. 무선인터넷을 쓸 수 없는 외신기자들은 초등학교 컴퓨터를 이용해 기사를 보냈다. 민박집 주인과 함께 김장을 담근 일본 기자도 있다.
▶기자들은 처음엔 빈집에서 컵라면과 군용식량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뒤늦게 인천으로 대피하는 주민을 만나 "나중에 계산하자"며 그 집에서 민박하기도 했다. 한·미 연합훈련이 끝난 뒤에도 50여 명의 기자가 현지에 남아 있다. 지금도 긴장감이 팽팽한데 한 방송사 취재진이 최근 해병대 충민회관에서 밤늦게 술판을 벌여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인터넷에선 "해병과 시민이 숨진 현장에서 술 한잔이 가당키나 한가"라며 계속 꾸짖는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현장을 지키고 있는 대다수 '연평도 종군기자'들로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맞은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