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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연평도 종군기자

鶴山 徐 仁 2010. 12. 3. 15:34
사설·칼럼
만물상

[만물상] 연평도 종군기자

 

1950년 12월 4일 평양 대동강 철교는 폭격을 맞아 휘어지고 부러진 채 뼈대만 앙상했다. 피란민들은 목숨을 걸고 곡예사처럼 철교 뼈대 위를 걸어 자유를 찾아가려고 했다. AP통신의 사진기자 데스퍼는 피란 행렬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며 셔터를 눌렀다. 가슴 저미는 아픔을 담아 셔터를 눌렀기에 지금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1854년 크림전쟁을 취재한 영국 런던타임스의 러셀을 첫 종군기자라고 한다. 그 후 수많은 종군기자가 나왔지만 사진기자 카파가 전설처럼 꼽힌다. 스페인 내전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병사를 찍은 카파는 1954년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아 숨졌다. 목숨을 걸고 취재하는 정신을 '카파리즘'이라고 한다.

▶종군기자는 남자만 하란 법이 없다. 6·25 때 미국 여기자 히긴스는 "한국 해병대는 귀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고 써서 '귀신 잡는 해병'이란 말을 낳았다. 히긴스는 '이브닝드레스보다 군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란 소릴 들으며 전쟁터를 누볐다. 2003년 이라크전 땐 강인선 조선일보 기자가 미군 5군단과 함께 움직이면서 전쟁터의 일상을 섬세한 감성으로 담은 기사로 새로운 전쟁 르포를 보여줬다.

북한이 포탄을 퍼부은 연평도에서 150여 명의 국내외 기자들이 종군기자처럼 취재 경쟁을 벌였다. 12년 동안 전쟁터만 쫓아다녀 '전쟁을 몰고 다니는 기자'로 불리는 미국 NBC 방송의 엥겔도 연평도에 왔다. 한 스페인 기자는 "북한은 예측할 수 없는 나라다. 만약 포탄이 학교에 떨어졌으면 어찌할 뻔했나"며 혀를 찼다. 무선인터넷을 쓸 수 없는 외신기자들은 초등학교 컴퓨터를 이용해 기사를 보냈다. 민박집 주인과 함께 김장을 담근 일본 기자도 있다.

▶기자들은 처음엔 빈집에서 컵라면과 군용식량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뒤늦게 인천으로 대피하는 주민을 만나 "나중에 계산하자"며 그 집에서 민박하기도 했다. 한·미 연합훈련이 끝난 뒤에도 50여 명의 기자가 현지에 남아 있다. 지금도 긴장감이 팽팽한데 한 방송사 취재진이 최근 해병대 충민회관에서 밤늦게 술판을 벌여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인터넷에선 "해병과 시민이 숨진 현장에서 술 한잔이 가당키나 한가"라며 계속 꾸짖는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현장을 지키고 있는 대다수 '연평도 종군기자'들로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맞은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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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山 ;

그들에게는 종군기자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정말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현장 취재를 하고 있는 다른 많은 기자분들을 모욕하는 것처럼 들리니까요! 아마 그들은 소풍놀이에 참여한 것으로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