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공주에 내려왔다.
아침에 간간이 빗줄기가 뿌려지는 금강변을 걸었다.
금강 줄기가 부여의 부소산성 앞을 지나가는 부분을 흔히들 사람들은 백강, 혹은 백마강이라고들 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름만 다를 뿐 금강과 백마강은 같은 하나의 강이다.
금강에 아니 백마강에 물이 불어 강변을 산책하는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토박이 촌로들을 만나보면,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는 여기 공주까지 서해바다의 작은 선박들이 올라왔다고들 한다.
하기야 양자강에서는 그 넓은 중국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우한(武漢)까지 지금도 선박이 올라온다고들 하지 않나.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에 쫓겨 하북위레성(현 서울 지역...남한산성 설))에서 하남위례성(현 광주)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끝내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개로왕이 전사했다.
그래서 문주왕 때 여기 공주(웅진)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웅진에서 백제는 다섯 왕 63년의 역사를 엮었다.
궁궐 터가 저기 공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지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무슨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추정될 뿐이다. 우물터가 발견되었다거나, 궁전의 기둥 을 박은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시실만으로 궁궐 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산성 말고는 어디 한 군데라도 궁궐이 들어설만한 곳은 없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수십년 전에 무령왕의 능이 공산성과 그리 멀지 않는 지점에서 발견되어 공산성 궁궐설을 뒷받침했다.
비록 63년간이라 하지만 한 왕국의 수도였었던 도시 치고는 너무나 유지가 없다.
그러나 부여에는 분명한 백제 수도로서의 유적이 남아 있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과 사택지적비가 그것이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고증되었고, 사택지적비는 의자왕 시절에 좌평 벼슬을 한 권력자인 그가 왕의 눈밖에 난 탓으로 벼슬을 잃고 자신의 주락과 먹어가는 나이를 슬퍼하는 한시로서 1 미터 정도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지금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최근에는 익산 미륵사의 창건자인 백제 무왕의 왕비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지적의 딸이라는 명문이 미륵사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부여에는 분명한 궁궐 터라고 할 수 있는 월성 성터가 존재하고 있다. 경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공주에는 그런 유적이 전혀 없다. 고려 500년 조선 500년 도합 천년 세월 속에서 완전 유실되어 버린 것이리라.
궁궐터는 없다고 하더라도 부여 융의 웅진도독부의 터라도 그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겠다.
부여융은 의자왕의 장남으로 세자였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무너지고 난 후 아버지 의자왕과 만이천명의 백제 백성과 함께 당에 잡혀갔다.
그후 부여풍이 일본에서 종척 복신과 중 도침의 옹립을 받아 부여에서 백제부흥의 반기를 들자, 당의 고종은 푸여 융에게 유인괘등 장수를 딸려보내 이들을 격파하라고 명했다.
부여융은 동생 부여풍의 군대를 깨고,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부여융과 부여풍의 대결은 슬픈 역사이다.
다시금 웅진(공주)은 백제 재건의 토대가 된 것이다. 신라문무왕과도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앞세워 깊은 유대를 강조하였고, 결국 당나라 군을 깨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부여융은 신라의 반도 통일정책에 밀려 다시금 웅진을 잃고 당으로 도망쳤다.
백제 왕국의 수도로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공주, 무령왕릉의 존재가 그리도 귀할 수가 없다.
공주에 집사람의 직장을 따라와 산지가 거의 25년은 되는 것 같다.
나는 공주를 배경으로 해서 장편 소설 <여자의 성>을 썼고, 몇몇 중, 단편을 발표한 기억이 있다.
작가가 어디에 살았느냐는 그가 무슨 작품을 썼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적과 흑>을 쓴 스탕달은, 자기가 태어나서 산 프랑스의 동남부 알프스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많이 썼다.
프랑스의 최고 고전 소설로 꼽히는 <보바리 부인>을 쓴 구스타브 플러벨은 자신이 태어나서 산 센느강 하류지방을 역시 소설의 무대로 하고 있다.
연애소설이 아닌 소설은 생명이 짧다.
인간의 살아 생전의 이성관계는 결국 인간의 생명현상으로, 개인과 인간 전체 존재의 진정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공산성을 품고 있는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공주에서 25년이나 산 사람으로서 <여자의 성> 이외에는 별다른 소설을 탄생시키지 못한 나는 그야말로 진정한 상상력의 결핍을 자인하는 작가가 아닐까.
한 십년 전쯤에 개설된 공주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그리고는 공산성 맞은 편에서 산을 바라보면서 강변을 걸었다. 산은 뿌려지는 빗줄기 탓으로 윤곽이 흐렸다. 그리고는 강의 남쪽에 있는 금강대교를 다시 건너 구공주 즉 내가 살고 있는 남공주의 내 집으로 돌아왔다.
금강 대교는 일제시대에 건설되었고, 6.25 때 반파되었으나 1950년 대에 재건되었다.
강변에서 공산성의 공북루가 마주보였다. 금강대교를 지나니 공산성의 정문이라 할 수 잇는 서문 즉 금서루가 시야를 막았다. 맞은편에 무령왕릉으로 가는 길의 입구가 있다. 조선 중기 공주가 충청도 감영이 있던 읍이라 감사, 판사, 중군들의 치적비가 모아져 산성 입구에 도열하고 있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 비를 흠뻑 맞았다.
세월은 자꾸만 흐르는데, 상상력이 몸을 따라 노쇠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누군가를 연모하고 정열을 불태우지 않으면 작가 시인의 창작혼은 사그러드는 것이 아닐까. 웬지 겁이 난다. 그러나 어쩌랴,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어쩌겠는가.
이미 절반이 흘러버린 2009년을 되돌아보면 중편 한편과 단편 한편을 어렵게 탈고하였다. 그것도 문예지의 청탁이 있어서 간신히 집필하였다.
장미비 속에 그 윤곽조차 흐물거리는 공산성을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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