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에서 우리나라가 공산주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글자 그대로 천우신조(天祐神助),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는 전쟁이 일어 난지 불과 3일만에 서울을 점령케 되었던 인민군이 계속 남진(南進)하여 부산까지 내려가지를 않고 3일간 서울에 머물렀던 일이다. 그때 서울에서 3일을 허비하지를 않고 계속 남진하였더라면 전세를 만회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한다. 우리에게는 천금(千金) 같은 3일이었다. 그 3일간의 여유를 때문에 UN이 참전하는 결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고 최후방어선인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인민군이 서울에서 왜 3일을 허비하였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둘째는 UN참전(參戰)을 결의하던 때의 사정이다. 유엔에는 다섯 나라 대표들로 구성되는 안전보장이사회가 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이들 다섯 나라 대표들의 완전합의가 되어야 한다. 한 나라 대표라도 반대하면 결정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 한국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키로 결정을 내린 회의에서 왠일인지 소련대표가 불참하였다. 역시 지금까지도 그 회의에 소련대표 말리끄가 왜 불참하였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셋째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麗順反亂事件)이 미친 결과이다.
여순반란사건은 6.25가 일어나기 2년전인 1948년 여수와 순천으로 근거지로 삼아 일어난 국군의 반란사건이다. 그 해 4월에 4.3사건으로 알려진 민란이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여수에 주둔 중인 국군 부대가 출동케 되었다. 그런데 이 출동에 불만을 품은 부대 내의 좌익분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6.25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이 사건을 기하여 군부 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을 가려내어 숙군(肅軍)할 수 있었다. 만일 그때 숙군과정이 없이 6.25전쟁을 맞게 되었더라면 공산화를 막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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