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촌 대한민국'
혼자 무엇에 빠져 일가견을 이루었다면서 자극적이고 과장된 주장을 펴는 사람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나 있다. 미국에도 인터넷에 단정적인 예언, 그럴듯한 음모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그런 예언이나 음모론이 적중해서 화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해도 어느 날의 재미있는 얘기, 반짝 화제로 지나간다.
한 사람의 예언이나 음모론이 주가와 환율까지 움직인 나라는 아마도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인구와 경제 규모가 우리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나라들에도 없는 현상이다.
앞일을 예상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작년 초에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는 미국 주가가 15000을 넘을 것이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오바마가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초반 탈락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틀린 예상들을 모아서 발표한 세계적 경제 전문지(誌)
자신도 작년 유가를 배럴당 200달러로 예상했었다. 2008년 말 유가는 40달러 근처였다.
그래도 예측이 필요한 것은 그 근거가 풍부하고 합리적이면 판단에 참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근거가 없거나 비약과 과장이 심하면 예측이 아니라 예언이다.
예언을 하는 사람은 전문가라고 하지 않고 도사(道士)라고 부른다.
'미네르바'라는 사람이 4년제 대학을 안 나왔고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경제를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가 쓴 글은 예측이 아니라 예언에 가까웠다.
그 예언이 몇 개 맞았다고 그를 '도사'로 떠받드는 사회 현상과,
그 도사의 한마디에 사람들이 주식을 팔고 달러를 사러 우르르 몰려다니는
이상(異常) 집단 심리가 진짜 문제다.
세상이 어지러운데 정부가 신뢰를 주지 못한 탓이 제일 크다.
지역과 이념으로 갈라져서 무조건 반대하거나 열광하는 패거리 심리가 횡행하는 것도
이런 현상의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너무나 가볍고 깊이가 없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한국이 헤비급은 못 돼도 미들급 정도는 됐다고 생각해왔다.
엊그제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가 미·일·유럽 차들의 독무대이던 북미 '올해의 차'에 뽑힌 것이나,
LG화학이 GM의 전기자동차에 탑재될 배터리 공급자로
단독 선정된 것은 이제 우리 체급이 미들급은 됐다는 또 한 장의 증명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렇게 기계, 전자, 화학 공업에서 정상 근처에까지 오른 나라에서
'경제 족집게 도사'가 출현해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 추종자 무리엔 한 TV 방송과 전직 청와대 경제수석까지 끼어 있었다.
미들급 아니라 플라이급 나라에서도 없는 일이다.
미네르바 소동은 광우병 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다. 미국에 온 이후
미국 사람들도 광우병 걱정을 조금이라도 하는지 그 흔적을 찾아보려 애를 써보았다.
매년 700만 마리가 넘는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먹는 미국 사회에선
'광우병' 걱정은커녕 '광우병'이란 이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캐나다에선 작년에 광우병 걸린 소가 발견됐는데도 광우병 소동 비슷한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 사회에서도 비합리적인 일은 일어나지만 그것이 결코 사회의 주도적 흐름은 되지 못한다.
한국에서만 중학생들이 광우병 걸려 죽게 됐다며 울고불고 국민의 3분의 2가 광우병 걱정을 했다.
아무리 TV가 거짓 선동을 했다고 해도 세계 최고의 자동차와 배터리를 만드는 나라에서
어떻게 미신이 과학을 이기고, 도사가 군중을 몰고 다니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또 몇 달도 안 돼 미국 쇠고기의 시장 점유율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난민촌'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쓴 책을 보았다. 난민촌은 뿌리 없이 흔들리는 사회다.
이리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는 쏠림 현상, 확 달아올랐다가 금방 잊어버리는 냄비 현상,
지역과 같은 원시적인 기준으로 편을 갈라 싸우는 패거리 현상도 난민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난민촌에선 괴질(怪疾)에 대한 자극적 소문이 비정상적으로 증폭되거나 누구를 도사로 떠받드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난민촌에서 중요한 것은
내일은 또 어디서 무슨 바람이 불어와 바람개비를 돌릴 것이냐이다.
그 통에 제네시스와 같은 불씨가 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