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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한강철교는 알고 있다 [ 6 ]

鶴山 徐 仁 2008. 10. 24. 08:21

august 의 軍史世界

 

한강철교는 알고 있다  [ 6 ]

 

 

 

희생만 야기한 작전

 

후퇴하는 부대가 적의 진격을 막거나 늦추기 위해 교량이나 주요 교통 시설물을 자의로 파괴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시도된 전술입니다.  한국전쟁 초기 한강교량은 한강의 남북을 유일하게 연결하는 전략시설물이었으므로 국군이 이를 파괴한 것은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강교량 폭파의 방법효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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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된 한강인도교와 철교의 모습 ]

 

왜냐하면 앞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가를 앞서서 보위할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제일먼저 다리를 이용하여 한강을 도강하여 줄행랑 쳤습니다.  이른바 끝 발 순으로 서울을 빠져 나왔는데 더구나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당연히 서울에 남겨질 국민들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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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을 사지에 남겨놓고 위정자들은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

 

오히려 국군이 선전하여 38선 너머로 공산군을 격퇴시키고 있다는 거짓방송을 계속 틀어 놓음으로써 서울 시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도 있을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시켰던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다리를 폭파 시킬 당시에도 시민들의 통행을 제한하지 않고 기습적으로 폭파시켜 다리위에 있던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생목숨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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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 촬영된 폭파 직후의 한강 철교의 모습 ( C교만 파괴 되었습니다 ) ]


이 사건은 한강이북에 남겨진 많은 시민들과 미아리고개에서 최후의 방어를 펼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국군을 순식간 공황에 빠뜨렸습니다.  더구나 전황을 오판하여 공산군이 서울시 외곽에 나타났을 무렵 서둘러 폭파를 하는 바람에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강북에 있던 많은 국군병력과 전투물자들이 유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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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교량의 파괴로 아군 주력과 장비의 퇴로가 막혔습니다 ]

 

북괴군이 서울 점령 후 대책 없이 허물어져 가던 국군에 대한 추격을 멈추고 도심에서 3일간 지체하였던 미스터리 같은 이유를 이전에는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시도한 한강다리폭파를 이유로 들었지만 현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북괴군이 서울 점령 후 진격을 멈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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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괴군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 하였습니다 ]

 

동부전선의 청성부대오뚜기부대의 분전으로 전선이 단절되어 이를  메우기 위해 기다리게 되었다는 의견 ( 관련글 참조 ), 그 동안 남한에 내재하고 있던 남로당 계열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의견, 북괴군의 역량 문제로 부대 재편과 보급을 하기 위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로 하였다는 의견,  남한 정부의 투항을 유도하기위해 시간을 주었다는 의견 등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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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교량 파괴를 북괴군 지체의 이유로 들기도 하였습니다 ]

 

한강다리폭파가 이러한 이유에 더 이상 거명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비록 빈약하지만 북괴군이 나름대로 도강장비가 있어 한강을 건너는데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이었고 이런 예는 김포반도로 한강을 넘어와 영등포, 시흥방면으로 진격한 북괴군 제6사단의 예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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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되지 않은 A 철교로 도강하는 북괴군 기갑부대 ( 上 )
1950년 6월 30일 미 파괴 교량을 폭격하는 미군의 작전모습 ]

 

그 보다 확실한 증거는 한강철교-인도교 폭파작전 당시 한강 철교 C교와 인도교 폭파는 성공하였지만 철교 A교와 B교는 폭파에 실패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북괴군이 탱크를 몰고 한강을 도하할 통로를 국군은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들 A, B교가 파괴된 것은 이후 UN 군의 공습에 의해서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