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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퇴계(退溪) 이황(李滉)

鶴山 徐 仁 2008. 7. 6. 20:24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황은 사림이 훈구의 공신 세력으로부터 심한 수난을 겪었던 조선중기인 연산군 7(1501)년 12월 25일 안동 도산 온계동에서 태어났다. 공의 휘는 황(滉)이며 자는 경호(景浩)이다. 아호는 향리의 시내 이름을 따서 퇴계(退溪)라 하였으나 이외에도 도옹(陶翁), 계옹(溪翁) 등 여러 가지로 불리었다.



이황의 본관은 진보(眞寶) 곧 진성(眞城)이다. 이 진보 이씨는 고려말에 입문한 씨족이다. 진보 이씨의 시조는 석(碩)으로 밀직부사를 지냈으며 2세 자수(子脩)는 홍건적 토벌로 공을 세워 송안군으로 봉작을 받으신 분이다. 3세 현후(玄候)는 군기시부정을 지냈고, 뒤에 증 통훈대부 사복시정이 되었다. 증조 정(禎)은 선산도호부사로 또한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으로 추증을 받았다. 조 계양(繼陽)은 진사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진보 이씨가 안동으로 이주한 것은 송안군 자수로부터이다. 그 뒤 이황이 태어난 도산의 온계리에 터전을 잡은 것은 조부 계양으로부터이며 부 식(埴)를 거쳐서 황에 이르렀다. 곧 이황은 도산십이경(陶山十二景)으로 이름난 안동의 도산 온계리에서 아버지 식과 춘천 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영남학파의 사종이 되었다. 아버지 식은 소과인 사마시에 합격한 정도의 글 읽는 집안이기는 하였으나 한미한 편이었다.

이황의 생애는 편의상 세 단계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 1 기, 수학기 (1 - 33)
제 2 기, 출사기 (34 - 49)
제 3 기, 치사 강학기 (50 - 70)

수학기는 무려 33년간이다. 그러나 33년 동안 스승을 모시고 글을 배우고 익혔던 기간이라기보다 출사를 위한 준비 기간이다. 곧 3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기 이전으로 학문을 닦고 수기(修己)하던 시절을 말한다. 이황은 이 시절에 비록 부친은 없었으나 어머니의 엄하고도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도산의 자연 속에서 영특한 자질을 길렀다.

이황은 생후 일곱달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 슬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만고풍상을 다 겪었다. 퇴계의 어머니는 8남매의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찍이 미망인이 되고서는 집안을 잘 유지하고, 아이들을 전부 결혼시킬 수 있을지의 여부를 깊이 걱정하고 더욱 더 농업과 양잠의 일에 힘썻다.

아이들이 성장하자 가난 속에서도 학자금을 변출하여 아이들을 취학시켰다. 그리고 항상 학문에 힘쓸 뿐만 아니라 자제심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훈계하였다. 구체적인 사물을 가지고 친절하게 가르치며 타이르는 것을 잊지 않고 언제나 엄하게 경고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과부의 자식은 배운 것이 없다고 조소하니, 너희들은 남보다 백 배 더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조소를 면할 수 있겠는가.”라는 식으로 매우 엄하게 교육했다. 그래서 퇴계 선생은 검소함을 중히 여기고, 또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를 어릴 적부터 몸에 익힌 것이다.

고관대작은 내 하고자 하는 일 아니니        高蹈非吾事
흔들리지 말고 항리에만 있고 싶어            居然在鄕里
바라노니 착한 사람 많이 만드는 것           所願善人多
이게 천지의 덕 갚는 도리 아닌가              是乃天地紀
                         和陶淵明飮酒二十首中其十九

위와 같이 어려서부터 겸손 미덕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위 시에서도 본 바와 같이 퇴계는 고도(高蹈)를 예사로 하지 않았다. 고도란 고거(高擧)와 같은 뜻인데 ‘속세를 탈출하여 은거하다, 또는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느 쪽이든 퇴계는 원하지 않고 있으며, 조용히 향촌에서 자기 사업을 하고자 했다. 하는 일이 없으면 바로 이것 자체가 은거라고 한다. 그러나 퇴계의 소망은 선한 사람을 많이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은 퇴계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사명감이기도 했다.

선생은 영남에게 빼어난 분이외다        夫子嶺之秀
문장은 이백과 두보와 같으시며           李杜文章
글씨는 왕희지와 조맹부를 비기리다     王趙筆

이황이 반궁(泮宮)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전송하며 지은 송별시에 있는 내용이다. 이황의 인품과 재주가 극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황은 이미 수학기에 그의 인품과 재주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의 출사기는 34세부터 시작된다. 이황은 중종 23(1528)년 진사시를 거쳐 중종 29(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며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가 호조좌랑(당 36세)으로 전임되었다. 육품관이 되어서부터 대부인을 위해 현의 수령을 얻어 봉양을 편케 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해 평생에 한이 되었다.

중종 31(1537)년에 모친상을 당했다. 홍문관수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쳐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사간원에 있을 때의 사소한 일 때문에 그의 동료들과 함께 파면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그 후 홍문관교리,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부교리, 사헌부지평, 의정부검상을 거쳐 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 또 사인에 승임되었다가 사헌부장령에 개임되었다.

 >> 혼천의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종친부전참, 장령, 성균관사예를 거쳐 시강원필선을 겸하였다가 사성에 승임되었다. 이 때의 나이는 43세였다. 예빈시부정, 홍문관교리를 거쳐 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고 사헌부장령으로 전임되었다. 또 병으로 사임했다가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고 홍문관응교로 옮겼는데, 다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 해(44세) 7월에 “갑진걸물절왜사소(甲辰乞勿絶倭使疏)” 라는 외교, 국방론의 탁월한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 상소는 왜사들이 친화을 바라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는 내용으로서, 그 길이만도 2216언(言)이나 되는 장문일 뿐만 아니라, 그 간절하고 미래를 헤아리는 혜안이 진실로 사표를 삼을 만했다. 이 소(疏)의 주장은 하나같이 멀리 백년 앞을 내다보는 높은 시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갑진년 11월에 중종 임금이 재위 39년 만에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였다. 선생이 명나라에 부고와 청시(請諡: 시호를 청하는 일) 두 표문을 만들어 보냈는데 사신이 명에 도착하자 예부상서 등의 관원들이 환복(歡服)하여 말하기를, “표문이 좋은데다가 서법 또한 묘치가 있다.”라고 하였다. 돌아와 이 사실을 임금께 고하니 선생께 말 한 필을 하사하셨다.

또 45세에 군자감검정, 홍문관응교, 전한으로 옮겨졌다가 9월에 사옹원정으로 전임되었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 해에 을사사화가 있었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니 이기(李?) 등이 나라를 맡아 정권을 멋대로 행사하여 사류를 배척 모함하던 때라, 선생 역시 관작을 삭탈 당했다. 그러나 다시 서용하기를 청하니, 그것은 이기의 조카 원록(元祿)이 평소 선생의 학생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각별히 권고한 덕분이었다. 서용되어 11월에 통훈대부가 되고 영접도감낭청에 임명되었다.

46세에 부인 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두 아들들에게 계모 권씨의 상을 친 어머니같이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 해 11월에 건지산(?芝山) 기슭 동암 곁에 양진암(養眞菴)을 지었다. 31세에 건지산에 와사(蝸舍)를 지은 지 14년 만에 조금 격식을 차린 서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토계(兎溪)라고 불리던 집 앞 시내 이름을 퇴계라고 고쳐 부르고, 가끔 이를 호로 사용하였다. ‘퇴계 선생’이라 함은 이 때부터 쓰는 것이 정당하다.

48세에 단양군수로 임명되었고, 그 해 9월 풍기 군수로 전임되었다. 49세에 비로소 서원 운동을 전개하면서 백운동서원에 사액과 서책을 하사하도록 상소하여 뜻을 이룬다. 그리고 사직을 위한 상소를 세 번 올렸으나 해답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정월에 결연히 임소를 떠나버린다. 그로 인해 고신(告身) 2 등을 삭탈 당했다.

이황의 치사(致仕) 강학기는 50세부터 시작된다. 귀향을 결단하고 홀연히 떠나 왔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초야에 묻힐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도 실직이든 산직이든 가릴 것이 없이, 끝까지 벼슬하는 몸일 수밖에 없었다.

이황은 이즈음 상계 서편에 한서암(寒栖庵)을 짓고, 당을 정습(靜習)이라 이름하고, 못을 파서 광영당(光影堂)이라 하여 5년여를 거처하다가 도산 남쪽 산수 좋고 그윽한 곳에 터를 마련하여, 정사년으로부터 신유년에 이르기까지, 5년 역사 끝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었다. 이로부터 학문을 연찬하고 후학을 기르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노경에 접어든 선생은 인생과 학문 그리고 진리에의 구도 등에서 달관의 경지를 이루었다. 65세에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拔)’을 지었으며, 이 무렵 제자들에게 계몽(啓蒙)과 심경(心經)을 강의하였다. 66세에 동지중추부사의 소명이 있었으나 사면장을 올려도 허락되지 않아 상경하다가 병으로 지체하여 왕(명종26년)이 내의(內醫)를 보내 진료케 하였으며,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하였으나 사퇴하자, 왕이 독서당 선비들에게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란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는 한편, 도산도(陶山圖)를 그리게 하고, 그 위에 선생의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방에 비치하도록 하였다.

68세에 선생은 마지막 상경을 하였다. 모든 벼슬의 명을 사퇴하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그 해 8월에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 및 차자를 올렸으니 무진육조소는 선생의 정치사상의 요약이요, 성학십도는 철학사상의 금자탑이다. 선생은 평생토록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시의에 맞는 정책들이 방해를 받았으며, 정치적 상황이 그를 정치에 무관심한 듯 보이게 했을 뿐이다.

마침내 선생이 조정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69세 기사년 3월 3일 밤에 입궐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 받게 되었다. 이승에서 마지막 해인 70세에 선생은, 도산서당과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강의하면서 마지막 정열을 바쳤다.

선생은 12월 8일 아침에 매화분에 물을 주라 하셨고, 이날 날씨는 맑았다. 유시(酉時)초에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에 모여들고 눈이 한자쯤 내렸다. 잠시 뒤에 선생은 이부자리를 정돈하라 하고 부축하여 몸을 일으키라 하여, 앉은 채로 칠순의 평생을 마치시니 구름이 흩어지고 눈이 개였다.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2008-06-04 오전 9:32:46 / 김성규객원기자
출처 : 藝術村
글쓴이 : 촌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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