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로스쿨은 ‘여인천하’
우리는 흔히 격려보다는 비판에 익숙하다. 사회 전체 분위기가 그렇다. 누가 뭘 잘했는지 보기보다는 뭐가 부족한지, 뭘 잘못한 게 없는지부터 살펴본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일하는 여성은 항상 죄의식 같은 것을 안고 산다. 일터에서는 ‘일만 하는’ 남자들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숨죽이고 살고, 집에서는 아이 못 키우고 집안일에 소홀하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기가 죽는다.
그런 와중에 언론에서는 ‘여성의 시대’가 온다고, 아니 이미 왔다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댄다. 막상 여자들에게 정말 여성의 시대가 왔냐고 묻는다면 누가 그렇다고 답할까. 게다가 왠지 그 뉘앙스는 그래서 좋다기보다는 그래서 ‘좀 걱정된다’는 소리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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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 지난 10월 12일 하버드대학 드루 파우스트 총장 취임식. (photo 정교화) / <우> 하버드 로스쿨 도서관
그렇게 남성 위주의 사회에 젖어서 ‘여성의 시대’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다가 하버드대학에 와보니 왠지 여성들이 제 몫을 할 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면서 희망이 보인다. 여성의 구체적 비율, 숫자를 제쳐놓고라도 우선 여자가 많이 보인다. 교수도 그렇고, 학생도 그렇고, 교직원도 그렇다.
새로 선출된 하버드대학 총장도 여자고, 교수 및 학생들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로스쿨 학장도 여자다. 이번 학기 수강한 네 과목 중 두 과목 담당 교수가 여자다. 학생들은 여자가 더 많은지 남자가 더 많은지 가늠할 수가 없고 이제 아무도 성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 만큼 여자, 남자 구분이 없다.
여학생 중에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로스쿨에 진학한 젊고 총명한 학생부터 멀리 중학생 자녀를 떼어놓고 와서 공부하는 엄마까지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대학생·중학생 아들 둘을 둔 친구는 연방검사를 하다가 학계로 진출하고 싶어서 중학생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다시 공부하려고 돌아왔다면서 자기의 주요 일과 중 하나가 밤마다 아이랑 장거리 통화로 숙제를 지도하는 것이란다. 그 방은 아이들 사진으로 거의 도배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아이까지 떼어 놓고 왔기 때문에 더 열심히, 더 절실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같은 여자이지만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격려를 받는다.
뉴욕 유수의 로펌에서 하버드 로스쿨 여학생을 리크루트하기 위해 여자 파트너 5명이 와서 홍보를 하는 자리가 있어 재미삼아 가봤다. 파트너들은 경력이 25년 이상 되는 사람부터 10년 남짓 되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여성으로서 겪었던 편견, 어려움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했지만 여성의 장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제는 여자 변호사들이 출산을 한 뒤 한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게 일상화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다시 풀타임으로 전환해야 파트너가 될 수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는 계속 파트타임으로 일해도 파트너가 되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문인 줄 알면서도 “왜 로펌에서 여성이라고 그렇게 배려해주는지”를 물어봤다. 그랬더니 아주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야 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죠.” 한마디로 일도 잘하고, 클라이언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충성심이 더 강한 여성 변호사들을 잘 데리고 있어야 사무실에도 좋다는 얘기다.
법조계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여성 고객이 늘고 있다는 사실도 여성 변호사에게 플러스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남자 변호사는 여자 고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사람이 많은데 여자 변호사는 전반적으로 남자, 여자를 불문하고 고객 관계가 매끄럽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 한 번 격려를 받는다.
9월 학기 시작할 무렵 로스쿨 학장의 신입생 환영 리셉션이 있었다. 커다란 홀에 먼저 앉아서 환영사를 듣고 리셉션 자리로 옮기도록 되어 있었는데 학생들이 대충 자리에 앉으니까 학장이 홀연히 나타나서 단상에 오르더니 그대로 환영사를 시작했다. 학장을 소개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학장 혼자 연설 원고랑 생수 한 병 들고 단상에 올라와서 “Welcome, welcome to Harvard Law School(하버드 로스쿨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이라며 40분간 연설, 아니 학생들을 격려하는 것이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너희들은 최고야. 내가 좋은 소식 하나 알려 줄까?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됨으로써 너희는 이미 경쟁에서 이겼어. 이제 경쟁의식에서 벗어나 네 자신을 키우는 데 집중하렴. 너희는 잘할 수 있고 세계 최고의 리더가 될 거야. 그건 내가 보장한단다. 하지만 내가 보장 못하는 건 너희가 리더로서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을지 여부야. 그러니까 너희가 앞으로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도록 여기서의 시간과 자원을 십분 활용하길 바란다. 훌륭한 교수들로부터, 같이 들어온 대단한 친구들로부터 서로 배우고, 자신을 재발견하고, 성장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부드럽지만 카리스마 넘치고 진심 어린 그 연설은 내가 이곳에서 잘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던 많은 학생에게 큰 격려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기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그것 참 좋은 질문이군요(That is a great question)”이다. 여기는 학생들이 질문을 참 많이 한다.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수업 끝나고도 교수한테 질문을 하러 나가는 학생들이 줄을 선다. 교수들도 대부분 진지한 얼굴로 질문에 대해 일일이 상세한 답변을 해준다. 훌륭한 질문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좋은 질문이라는 말처럼 학생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생각을 전달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여기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5살 난 딸아이에게 무얼 물어봤더니 대뜸 하는 말이 “That is a good question”이었다. 로스쿨 학생뿐만 아니라 유치원생도 그런 ‘격려’를 받는 것이다.
기말시험 기간에는 도서관을 24시간 개방하고 24시간 동안 무료로 커피를 제공한다. 시험 중간에 아프거나 불상사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시험 시작 전부터 몇 차례씩 이메일로 안내한다. 시험 시작 첫 날에는 밤 새는 사람들 힘내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취지로 밤 11시에 도서관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한다. 학생이라면 의무적으로 치르는 통상적인 기말시험인데도 나는 마치 내가 엄청나게 중요한 시험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는 하버드대학의 총장도 여자, 하버드 로스쿨 학장도 여자, 그밖에도 아이와 가정과 일을 병행하는 교수, 판사, 변호사, 검사, 학생들이 주변에 수두룩하다. TV에서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가 화면을 누비는 와중에, 우리는 눈 때문에 아이 학교에서 데리고 오는데 힘들지 않았냐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존재로부터 격려를 받는다.
드루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은 어머니로부터 “얘야, 세상은 남자 세상이야, 네가 그걸 빨리 깨달을수록 네게 더좋단다”라는 말을 듣고도 하버드대학의 총장이 됐으니, “얘야, 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단다. 네 꿈을 자유롭게 펴렴”이라는 격려를 받고 큰 여성들은 얼마나 더 크게, 자유롭게 성장할까.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여성의 시대’가 정말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다. 그게 바로 내가 하버드에서 받은 격려다.
정교화 변호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