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김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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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의 숲은 싱그러움으로 넘실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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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김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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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들면 초록은 이제 절정이다. 가지마다 돋은 무성한 나뭇잎으로 나무는 스스로 살아있는 존재임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봄이 꽃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나무의 계절이다. 물론 여름에도 꽃은 핀다. 다만 맹렬히 세를 불리듯 초록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나무들 속에 묻혀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 나무들 틈새에서 여름꽃들이 하얗게 피어난다. 더러 보라색이며 노란 꽃들도 보이지만 초여름 숲에서 보는 꽃들은 대부분 하얀색이 주종을 이룬다.
경기도 가평의
유명산을 향하면서 가장 먼저 만난 여름꽃은 찔레꽃이었다. 찔레꽃은 숲 속보다는 사람 사는 마을 주변에서 피어난다. 논두렁이나 야산자락, 아파트 담벼락에도 넝쿨장미와 나란히 찔레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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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산 계곡은 설악의 천불동계곡에 비견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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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김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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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산(863m)은 가을억새로 유명세를 탄 덕분에 가을이면 등산객들로 몸살을 앓지만 상대적으로 여름은 여유로운 산행이 가능하다. 가을 유명산의 볼거리가 억새라면 여름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계곡이다. 혹자는 유명산의 계곡미를
설악산천불동계곡에 견주기도 했다. 그에 비견될 정도로 유명산 계곡이 아름답다는 뜻이리라.
능선길은 대체로 오르막이다. 더운 날씨는 여름 산행의 최대의 적이다. 그래서 땀을 내며 산을 오를 때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는 무성한 나뭇잎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간단치 않은 오르막을 묵묵히 땅만 보고 걷다 숲 길을 환하게 밝혀주듯 피어난
쪽동백나무를 만났다. 바닥에 흰 꽃이 떨어져 있어 고개를 들어보니 쪽동백나무다. 이미 꽃은 지고 있었다. 타래를 이루듯 작고 앙증맞은 흰 꽃들이 나뭇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을 때의 쪽동백나무는 얼마나 아름답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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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시둥글레가 하얗게 피어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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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김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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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발 아래서 각시둥글레를 만났다. 길섶 여기저기서 둥글레가 지천이다. 수줍은 듯 잎새 속에 피어난 둥글레꽃은 가늘고 긴 가지에 여러 개의 꽃이 오종종 매달리듯 피었다. 종 모양의 흰색 꽃은 끝에 초록색 테두리까지 둘렀다. 마치 정교하게 다듬듯 만들어진 이 꽃은 악기를 연상시킨다. 플루트나 관악기를 최초로 만든 이는 아마도 둥글레꽃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새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미세한 파장이 음악이 되어 꽃들의 개화를 돕는 것일 것이다. 유명산 정상을 넘어 소구니산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만난
은방울꽃 군락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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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방울꽃도 수줍게 피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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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김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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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구니산(800m)은 유명산과 연결된 오른쪽 산자락에 솟은 봉우리다. 유명산과의 거리가 가까워 유명산과 연계해서 종주산행을 감행했는데 그곳에서 뜻밖의 은방울꽃 군락을 만난 것이다.
고맙고도 신기하게도 유명산 정상을 내려서는 곳에서부터 소구니산 정상까지 은방울꽃의 행렬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꽃이 한창이었다. 은방울꽃의 개화 시기를 맞춰 산행을 하면서도 정작 이 꽃이 활짝 피어난 때를 제대로 맞춘 적이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든 느낌이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염원했던 꼭 갖고 싶었던 선물 말이다. 보고 또 보았다. 확실한 인식을 위해 카메라 셔터를 몇 번을 눌렀던가. 집에 돌아와 사진을 확인해 보니 내 실력의 모자람이 한이 될 정도로 그 느낌이 아니었다. 산길에 쭈그리고 앉아 혹은 엎드려 눈맞추며 들여다보면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던 그 꽃의 신비함까지 결코 기계가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좋은 선물은 '마음의 선물'이듯, 가장 좋은 느낌은 마음으로 간직하는 모양이다. 유명산에서 소구니산까지 1.5km여의 구간은 은방울꽃을 비롯한 둥글레와 갖가지 초여름을 장식하는 꽃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움푹 들어간 지형이 꽃들이 피어나기 좋은 조건을 갖춘 모양이다. 녹음이 무성한 숲에서도 그 위세에 눌리는 기색도 없이 온 산을 뒤덮을 듯 피어난 은방울꽃의 행렬을 따라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소구니산 봉우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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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산 계곡에서 쉽게 만날수 있는 박쥐소의 그림같은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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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김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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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등산만을 위해 그 길을 걷는다면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산길이었건만 은방울꽃이 무리지어 피었으니 내게 있어 이 길은 지상 최고의 산길이 되어 주었다. 동심의 회복이라고 해도 좋았을 것이고 저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잠시 느껴보았다고 해도 좋았을 것이다. "이 길 참 좋다"를 반복하며 산길을 걸었다.
소구니산 정상에 서니 유명산 정상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그리고 때마침 패러글라이더가 힘차게 도약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명산 정상은 넓고 판판하여 패러글라이딩 장소로 각광을 받는다. 걸어간 길을 되짚어 소구니산에서 유명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다시 한번 은방울꽃과 나란히 걷는 길이다. 오면서 놓친 구간도 새롭게 눈에 들어오고 몇 번을 다시 본들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앙증맞은 꽃들은 자꾸 걸음을 지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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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계곡길, 그러나 조심조심 내려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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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김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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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 역시 꽤 가파른 비탈길이다. 미끄럼타듯 산길을 미끄러져 내려간다. 산 중턱을 넘어서니 계곡물 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머지않아 푸른 물줄기를 하얗게 쏟아내며 흐르는 유명산 계곡이 보인다. 땀에 흥건히 젖을 정도의 더위가 벌써 기승이지만 계곡물에 뛰어들기엔 아직 이르다.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물속에 담갔던 손을 얼른 거둔다.
유명산 계곡의 별미는 한줄기로 흐르던 계곡이 어비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과 합수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계곡은 크고 넓은데 아늑한 맛이 있어 사람들의 접근을 저어하지 않고 흐른다. 바위틈을 부서지며 내리는 폭포수는 그림 같고 그 아래 이룬 소는 푸른 용을 품듯 파랗게 여울져 흐른다.
그 그림 같은 계곡을 배경으로 또 한가지 산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꽃이 피었으니 산목련, 즉 함박꽃이었다. 철계단을 돌아 계곡 사이로 다리가 걸려 있어 아이들을 거기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는데 바로 앞에서 하얀 꽃잎이 아롱댄다. 아련한 향기를 풍기는 나무는 우람한 둥치와 나뭇잎이 풍성한 오래된
함박꽃나무다. 그리고 한 그루가 아니다. 마주하듯 계곡 건너편에도 비슷한 크기의 함박꽃나무가 함박웃음 같은 흰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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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그리고 함박꽃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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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김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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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말고도 계곡가엔 여러 그루의 함박꽃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계곡에 발을 드리우고 가지를 물가 쪽으로 뻗으며 싱싱하게 자라 초여름의 한때를 하얀 꽃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그 길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함박꽃 같은 웃음이라도 전해주고 싶었을까. 초록 숲에서 만나는 순백의 하얀 꽃송이가 마치 숲에 꽃등을 켜는 느낌이었다.
여름으로 가는 숲, 무성한 초록빛 공간에 꽃등을 밝히듯 하얀 꽃들이 하나 둘 피었다. 쪽동백이 피고 둥글레와 은방울꽃이 피고, 함박꽃나무가 하얗게 피어난 숲이 더 없이 싱그러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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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ㅡ 함박웃음 같은 함박꽃나무도 하얗게 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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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김선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