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중심부에서 전철로 1시간10분정도 걸리는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마(高麗-고구려의 일본식 표기)산 자락에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봉직하는 고마신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신사는 근래 들어서는 '출세신사'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고마신사는 한국인에게 높은 관심을 갖게 합니다. JR의 전철노선 안내판에는 한자로 '고려천(일본명 고마가와)'이라고 쓰인 낯익은 역이름이 보입니다. 세이부이케부쿠로선에는 '고려'역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1300년 가까이 고구려의 흔적이 일본 한복판에 남아있다는 게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고마가와역에서 걸어서 20분, 고마역에서 45분정도 걸려 고마신사로 가는 길은 '시골길'로 불립니다. 풍경은 한국의 어느 시골마을에 와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길가에 감, 유자, 고구마 등을 100엔 정도에 파는 무인판매대가 많은 것도 이채롭습니다. 가을엔 코스모스, 겨울엔 무나 배추, 토란밭이 정겹습니다. 고구려식 흙담벽집도 눈에 띕니다. 고마역에는 장승이, 고마가와역에는 장승모형 철구조물이 시선을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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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광이 고구려에서 수호불로 가져온 성천존이 모셔져 있어서 절 이름이 성천원(쇼텐인)으로 불리는 성천원 입구의 약광의 묘. |
안내간판은 온통 고구려 천지입니다. 高麗村(고마무라), 高麗本鄕(고마혼고), 高麗川(고마가와), 高麗峙(고려고개라는 뜻), 고마소학교, 고려교 등은 물론 '고마 혹은 고라이'라는 가게 이름이 곳곳에 눈에 뜨입니다. 너무도 맑은 물이 흐르는 고마가와는 낚시, 소풍장소로 유명합니다.
이 지역의 역사는 고구려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패한 직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나라시대인 716년 고구려의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고구려인(왕족이나 승려 중심)들 중 스루가(시즈오카), 가이(야마나시), 사가미(가나가와), 가즈사(지바), 시모후사(이바라키), 히다치(이바라키), 시모쓰케(도치키) 등의 7개 지방에 살던 1799명을 무사시지방으로 이주시켜 고마군을 설치했습니다. 일종의 코리아타운이지요. 이곳에서 주로 농업기술을 전수합니다. 비슷한 시기 옆 지역에 신라군도 설치했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흔적이 거의 없습니다.
고구려 나당연합군에 패한 직후 형성
당시 고마군의 지도자(고구려 최후의 왕자였다는 설이 유력)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이, 고마신사의 제신으로서 고구려에 온 고마왕 약광(若光 일본식 잣코)이었습니다. 후손들이 대대로 고마신사의 대표인 궁사로 봉직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오래된 고마씨 족보에 의하면 "약광이 죽자 군민들은 그의 위덕을 기리기 위해 어전의 뒷산에 사당을 세우고 신령을 제사지내면서 고마명신 이라고 칭하였다." 라고 전합니다.
이들 고구려 후예들은 26대까지는 고구려 사람끼리만 혼인, 혈통을 보존했지만 이후 일본인과의 통혼으로 사실상 현재는 일본인화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인의 후손이란 점을 강조하는 약광의 59대손 고마 시즈오씨(77)가 신사의 대표 궁사(宮司)를 맡고 있으며, 아들 후미야스씨가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마 가문은 14세기 무로마치 막부 때 중대 위기를 맞습니다. 정권과 반대편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멸문의 화를 당할 뻔했지요. 종가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분가해 고마이, 아라이, 나카야마, 아베, 가토 등 다른 고구려계 성씨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고마씨 직계 혈통이 지금은 50여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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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일제 초기 친일파의 거두였던 조중응이 쓴 고마신사의 현판. 고마신사라고 쓰지 않고 고구려의 '구'자를 작게 써 고구려신사라고 썼다. |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 국수주의적 풍조가 강화되면서 고마씨 일족과 신사는 제2의 위기를 맞습니다. 1896년 일제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을 없애버리기로 합니다. 고려군은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시켜, 히다카마치로 부릅니다. 약광에 대한 제사도 금지시키고, '천황'신을 제사지내게 했습니다. 1991년 사이타마현 히다카시가 돼 오늘에 이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일본인들 사이에 "고마신사에 다녀오면 출세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고마신사와 고마씨 일족은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연간 40만 명 정도가 다녀갑니다. 신년 등 특별한 날이면 기모노를 차려입은 어린이들이 부모들의 손을 잡고 참배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모셔진 신이 누구인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출세신사'라는 단어는 깊이 음미해봐야 할 듯합니다. 신사 입구 안내판에는 출세신사로 알려진 것에 대해 정계, 관계, 재계 인사들이 참배한 뒤 다수가 출세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출세신사로 불린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리도 다수 나왔고, 최고재판소장, 검찰총장 등이 나왔으며 관리나 대학교수, 작가들도 참배했다는 것입니다.
"각계 인사 고마신사 참배한 뒤 출세"
와카스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사이토 마고토, 하토야마 이치로씨 등이 이 곳 신사를 참배한 뒤 총리가 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밖에도 고이소 구니아키나 시데하라 기주로씨도 이 곳을 참배한 뒤 총리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고이즈미 총리의 할아버지 고이즈미 마타지로씨도 체신장관 시절 참배하고, 기념식수한 것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특히, 이 신사가 내선일체 사상을 주입하는 상징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면 묘한 기분이 됩니다. 총독 등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이 내선일체를 주입시키기 위해 참배하고 부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명록엔 사이토 마고토, 고이소 구니아키 등 전 조선총독의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이후 유명세를 탄 것이지요.
다만 사이토 마고토는 조선 총독 이후 총리로 출세했다고 하지만 일본이 정치적 격변을 겪던 1936년 암살되었고, 해방직전 총리가 됐던 고이소 구니아키는 전범으로 1948년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은 뒤 1950년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병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출세부분에 가려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방문도 이어졌습니다. 신사입구에는 한일 양국사이에서 기구한 운명을 살다간 이방자 여사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부부가 기념식수한 나무들이 불행한 개인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현재의 나종일 대사를 비롯, 1965년 국교정상화 뒤의 역대 주일대사들이 고마신사를 찾은 기록도 있습니다. 나 대사의 경우는 선친 나용균 전 국회부의장도 국회의원 자격으로 찾았다는 방명록이 있고 윤치영, 이후락씨 등 역대 정계 실력자들이 이 곳을 찾았다는 방명록이 있습니다.
눈에 확 띄는 인물은 구한말 친일파의 거두 조중응(趙重應)입니다. '조선인 정3품 조중응'이라는 이름으로 남긴 '고구려신사'라는 현판이 지금도 고마신사 입구에 걸려있고, 또 조중응이 '한국원외무참의 조중응'이라는 이름으로 참배자 중 명사들 이름 맨 앞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는 국회민족정기모임이 지목한 친일파 중 핵심인물로 구한말, 일제시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친일행위를 한 인물입니다. 일제로부터 자작 칭호를 받았고, 농상공부대신까지 역임했지요. 이 신사를 찾은 첫 한국인 유명인사라서 현판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고마신사와 고마무라(고구려촌) 지역은 일본에 있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친근감을 주면서도 민족사의 아련한 고통이 배어나옵니다. 특히 조선총독을 역임한 인물 등이 출세가도를 달렸다며 출세신사로 이름나면서 수많은 일본인 참배객이 줄을 잇는 현실은 고마신사를 더욱 복잡한 의미를 갖는 장소로 만듭니다. 고마신사는 '출세신사'라는 말 속의 아픈 의미를 생각하며 찾아가야 할 듯 합니다.
taein@seoul.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