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일본 특파원 리포트 2

鶴山 徐 仁 2007. 3. 24. 17:34
한류열풍 일본열도 강타, 그리고...
200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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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韓流)열풍이 일본열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바람입니다. 지난 5월초 서울신문 지면에 특집으로 소개한 바 있지만, 이른바 한류열풍은 도무지 식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4월초 탤런트 배용준씨가 도쿄에 다녀간 뒤 태풍급 위력으로 바뀐 한류열풍은 갈수록 강해지는 양상입니다. 그러면서 드라마나 영화를 중심으로 촉발된 한류가 출판가와 음식·일상생활까지 확산되면서 '일본 사회의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성급한 진단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

일본의 한류는 생활 현장에서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신문광고나 지면·지하철 잡지 가판대에서는 한류특집 기사가 넘치고 있으며, 동네 비디오가게나 슈퍼마켓 등지에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일례로 김치나 깎두기·고추장·된장 등 한국음식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일본 슈퍼마켓 한쪽 구석에 진열됐었지만 요즘은 입구 맨 앞에 진열될 정도입니다.

한류 열풍이 일본의 출판, 광고업계도 강타하고 있다. 올 들어 일본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겨울연가(일본명 겨울소나타)의 주연 배용준씨를 커버스토리, 특집 등으로 다룬 주간잡지와 신문광고가 넘친다. NHK방송 한국어교재도 큰 인기다.

웬만한 크기의 책방에 가면 한국어 코너가 최근 새로 생겨났습니다. 한국책 전문 서점(비디오테이프 등도 판매)에는 한국을 배우려는 일본인들이 넘칩니다. 정부차원에서 한국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한국문화원의 한국어강좌, 한국인서적 열람실 등에도 일본인이 몰려듭니다.

일본 내 대학이나 사설 학원, 문화시설, 그리고 뱅쿄카이(공부모임) 등에서 '한국을 알고 싶다.'면서 한국어 배우기 바람도 더욱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한국어학과나 강좌가 개설된 대학만도 400여 개일 정도이니, 예사로운 일은 아닙니다. 단순히 '아줌마' 중심의, 일회성 바람이 아니란 얘기지요. 저한테도 한국을 알아야겠다며 개인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식사약속을 하자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 아이가 다니는 중학교 일본 학생 상당수도 한국어 미니사전을 들고 다니며 한국어 배우기에 열중하고 있답니다. 이 정도이니 당연히 제 아이는 친구들의 한국어 선생님이 되는 경우가 많고, 한류열풍이 제 아이가 일본학교(3개월 째)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될 정도입니다 .특히 한글 배우기는 70대 할아버지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음식까지 확산·한국어 배우기 열풍도

한류열풍은 무엇보다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큽니다. 지난 18일 저녁 도쿄 중심부 유라쿠초 요미우리홀에서 '한국 영화의 밤'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사회는 한류열풍의 현 주소를 압축적으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치열한 응모경쟁에서 추첨돼 입장권을 받은 일본 관객 1100여명이 홀을 가득 메웠습니다. 40~50대를 위주로 여성 관객이 대부분이었고, 시사회 1시간 전부터 몰려든 상당수 일본 열성팬들은 시사회장에 진열된 영화포스터나 장동건 등 주연배우들의 포스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어 뜨거운 형제애를 다룬 영화가 상영되면서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나올 때, 특히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부터는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였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박수소리가 뜨거웠고, 많은 여성관객들은 눈이 벌개진 상태로 상영장을 떠났습니다.

물론 최근 한류열풍의 첨병은 드라마 겨울연가입니다. 일본 제목은 '겨울소나타'지요. 겨울소나타의 열풍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5월22일 북한으로 납치됐다 돌아온 일본인피해자 자녀 5명이 일본에 도착하는 장면을 중계하느라 NHK방송이 겨울연가를 내보내지 않자 3000여명의 팬, 주로 아줌마부대가 항의전화를 할 정도였습니다. '용사마'로 불리는 배용준씨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였다지요.

이런 분위기를 감안, NHK는 오는 8월 아테네올림픽 기간 중에 금메달이 유력한 일본선수 2명의 경기상황을 실황중계하느라 밤11시10분에 겨울연가를 못 내보내게 되자,'아줌마 부대'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경기가 끝난 뒤인 새벽2시 이후 방송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참의원선거운동을 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여성유권자들에게 용사마를 빗대며 '나도 준사마라고 불러 달라.'고 할 정도이니 그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 아시겠지요. 배용준씨의 몸값이 수백억대로 치솟았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요즘 잡지들은 온통 용사마 특집입니다. 특히 2개월 여 전 가벼운 여성지를 중심으로 '용사마' 특집 증보판을 만들어 판매부수가 20~30%이상 증가하자, 유력지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아에라'라는 주간지가 7월1일자에서 '배용준 특집 ' 65쪽짜리 증보판을 낼 정도입니다. 배용준씨 인터뷰와 사진, 촬영지인 서울과 춘천을 기자가 직접 가 르포를 하고 한류의 현상과 전망을 실어 판매부수면에서 톡톡히 재미를 볼 정도랍니다. 겨울연가 비디오나 DVD의 광고는 연일 일본 주요 신문들에 나오고, 200만부를 향해 질주하는 겨울연가나 실미도 등의 소설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습니다.

최근 역풍 조짐도… 우파성향 언론 앞장

6월 들어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등 한국영화가 거의 동시에 개봉되면서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 연예시장을 온통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형제 장동건, 원빈을 비롯해 '실미도'의 설경구는 물론 이병헌, 류시원, 박용하, 전지현, 최지우 등 한국의 남녀 연예인들에 대한 특집기사가 넘칩니다. 겨울연가 촬영지 테마관광은 장기인기상품입니다.

물론 세상사가 다 그렇듯이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나봅니다. 최근 들어 한류에 대한 역풍(逆風)조짐도 보입니다. 한류가 강해질수록 한국을 고깝게 보는 사람도 늘어나는 모양입니다. 특히 극우세력들을 중심으로 반감이 일고 있습니다.

실례로 며칠 전 도쿄시내 한 전철역에서 발생한 한국인 무장소매치기단 사건이 우파들을 몹시 고소하게 하는 모양입니다. 한국인 집단무장소매치기단(경찰은 4명 정도로 추정) 사건이 일어나자 일부 우파성향 언론이 연일 특집기사를 통해 '95년 이후 한국인 무장소매치기단에 의한 주요한 사건'이란 기사와 도표까지 내보내면서 한국에 대한 경계심을 자극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또 하나 한류가 드라마나 영화·가요의 보증수표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류열풍만 믿고 서둘러 일본시장을 두드렸다가 참담한 실패를 하는 사례도 부지기수일 정도입니다. 따라서 당국자들은 이런 상황까지 감안, 한류열풍에 대한 냉철한 현상 진단과 향후 처방을 준비해야 할 듯합니다.

중학교 운동회의 강렬한 인상
200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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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햇볕이 아주 따가웠던 6월 첫째 주 토요일, 제 아이가 다니는 일본 도쿄의 한 구립중학교 체육대회에서 받은‘강렬한 인상’에 대해 전해드릴까 합니다.

한마디로 그 날 체육대회(운동회)는 제게 처음으로 일본의 문화와 정신의 원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즉 약자를 철저히 격려하고 배려하며, 뒤쳐진 학생을 내팽개치지 않고 함께 데려가기 위해 작은 힘을 모아 노력하는 일본 교육의 모습이었지요.

특히 약자를 낙오시키지 않고, 강하게 만들어 함께 가는 전형적인 일본의 집단주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의 단초를 확인한 날이기도 했습니다.‘빨간신호 때도 단체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문제가 안 된다.’는 속설도 확인할 수 있었지요. 거창하게 말하면 제가 첫 회에 말씀드린 대로‘일본 힘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도 조금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초·중·고등학생들은 평소 각종 동아리활동 등을 통해 체력단련에 열중한다. 사진은 도쿄도내 한 소학교에서 쉬는 시간 운동에 열심인 어린이들.

당초 저는 그 날 운동회를 못 볼 뻔했습니다. 지난 회에 소개해드렸듯이 전날 아침 일찍 나고야에 갔다가 도요타자동차를 취재하고, 심야열차로 도쿄로 돌아와 피곤한데다, 그 날은 휴무일이어서 편이 쉬어보려고 했었지요.

그러나 1학년인 아이가 낯설고, 물설고, 말도 잘 통하지 않은 일본에 와 학교생활을 하는데, 그것도 일년 중 가장 큰 행사인 체육대회를 처음으로 한다는데 가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학교로 갔습니다. 그것도 개회식과 15개 종목 중 한 종목이 끝난 뒤였습니다.

처음엔 잠시 얼굴만 보여주고 집으로 오려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장거리달리기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첫 인상이 너무 강렬했습니다. 1, 2, 3학년 여러 조가 개인 대항 1500m(남학생), 1000m(여학생) 달리기를 하는데 구경온 학부모와 학생들이 1등보다는 꼴찌에게 ‘간바레(힘내라)’를 연호하면서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은 그 경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1등보다는 꼴찌에게 '힘내라'

꼴찌에게 박수를 보낸 것 못지 않은 인상적인 모습은 장애학생에 대한 철저한 배려였습니다. 참고로 제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한 학년이 100명 안팎으로, 일반 학생 3학급과 장애인 학급이 1개반이 있습니다. 물론 장애인 학급은 학생수가 5명 안팎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운동회 때는 소아마비, 뇌성마비 등 장애학생도 일반 학급에 배치해 대부분 경기에 참여시켰습니다.

배치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학년 전체의 남-녀학생 이어달리기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학생이나 뇌성마비 학생, 중증의 소아마비 학생 등이 각 반에 선수로 모두 참여했고, 8명이 발을 묶어 함께 달리기 등 대부분의 종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애학생들은 혼자 달릴 때는 끝까지 이를 앙다물고 달렸고, 발묶고 달리기나 이동시에는 동료학생이 부축해 주었습니다.

체육대회에 학생 전원이 낙오되지 않고 참석할 수 있도록 종목이 짜여진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체 공집어넣기, 학년 전원 이어달리기, 줄다리기, 각 반별 대표 이어달리기, 지신밟기식 연속달리기, 단체 줄넘기, 8명이 다리묶고 함께 달리기, 전체학생 단체 무용 등 대부분의 종목들이 학생이 빠짐없이 참여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협동심을 발휘해야만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제 딸아이만 해도 개인이 하는 100m 달리기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이어달리기, 지신밟기, 8명이 다리 묶고 함께 달리기, 단체 무용 등 여러 단체 종목에 거의 쉴 새 없이 참여했습니다.

특히 30여명이 함께 하는 집단 줄넘기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집단줄넘기는 한 사람만 잘못해도 중단됩니다. 두 사람에 양쪽에서 긴 줄을 잡아 돌리고 나머지는 가운데 서서 구호에 맞추어 함께 뛰는 고도의 협동심이 요구되는 경기지요. 그 경기에서 몸이 불편한 장애학생을 일반학생 중 힘이 센 학생이 안고서 함께 줄을 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함께 한 학생들도 싫거나 귀찮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요.

'집단주의' 일본정신 확인 계기

그리고 개인-단체기록경기에서는 50년 넘게 이 학교의 기록을 보존해오면서 해 마다 신기록이 작성되면 새롭게 추가하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조그마한 학교에서 말이지요. 추락한 비행기에서 죽어가면서도 기록을 남긴다는 일본인들의 기록문화의 단면을 확인했다면 지나칠까요. 그 날도 두 개의 신기록이 나왔습니다.

선생님들의 철저한 준비도 대단했습니다. 프로정신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체육대회 날짜를 토요일로 잡아 학부모들의 참여를 높이려 노력했고, 실제로 그 날 학부모들의 참석률이 놀라울 정도로 높았습니다. 학생 수 보다 응원하는 학부모와 동네 어린이들의 수가 더 많아 보였으니까요.

체육대회 준비도 한 달 전부터 집요하도록 철저하게 했고, 하루 전에는 수업을 전폐하고 리허설을 했다고 합니다. 비가 올 경우에는 실내로 대체하거나 생략하지 않고, 예비일을 잡아놓았습니다. 장기일기예보를 참고했답니다.

이러한 선생님들의 노력과, 약자를 세심하게 돕는 학생들의 협동심, 무엇보다 충분하고 철저한 사전연습을 통해 이날 오전 8시 반에 시작된 체육대회는 예정대로 오후3시 반에 정확히 끝났고, 운동장 정리는 4시 이후에나 유월의 따가운 햇살과 자욱한 먼지 속에서 끝났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날의 체육대회를 통해 ‘집단주의’로 통칭되는 일본정신의 원류를 조금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집단주의가 시대에 맞는 것인지, 문제점은 없는 것인지 등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극우세력의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과 연결하면 더욱 그렇지요.

아울러 이날 체육대회와 우리 한국의 체육대회 혹은 운동회의 기억을 단순비교하면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이 곳 학교들은 충실한 교육예산의 지원을 받아 학교 규모가 전교생 300명 내외입니다. 이런 협동심을 발휘할 수 있는 대회 진행이 비교적 수월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선진적인 교육현장에서는 분명 취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꼴찌에게 박수를 보내고, 약자를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집단의 힘으로 함께 데려가려고 하는 모습은 한 번쯤 우리 교육 일선에 계신 분들이나 학부모, 학생들이 참고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보였습니다.

7월의 만년설, 곰 그리고 활화산
200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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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한여름의 만년설이 시원스레 남아있는 일본중부 나가노현의 해발 1500m 고원지대인 가미고치(上高地)에 다녀왔습니다. 사방이 3000m급 고봉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지요. 일본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일본 북알프스 최고봉 오쿠호다카다케(해발 3190m)와 활화산 야케다케(2455m) 등이 눈앞에 펼쳐진 고원지대였습니다.

도쿄에서는 자동차로 쉼 없이 달려도 왕복 각각 6시간정도(잠시 정체) 걸렸습니다. 전체가 특별천연기념물이고 국립공원인 이 지역의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고원에서 차로 30여분 아래 지역까지만 자가용 운행이 허용돼 버스나 지역택시로 갈아타고 가야했습니다.

녹음과 만년설이 신비감을 주기도 하는 일본 제3봉 오쿠호다카다케의 위용. 80년전 대폭발, 40여년전 중규모 폭발을 했던 일본 북알프스의 유일한 활화산 야케다케의 거친 모습.

어느 정도 외지일까요. 가미고치는 아침 5시에 문을 열고 저녁 8시에는 닫아버리는 교행식 터널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터널 문만 닫아 버리면 가미고치는 외부세계와는 단절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실제로 하산 길에 탔던 택시운전수에 따르면 3년 전 7월 어느 날(날짜와 시간도 정확히 얘기해주었지만...) 큰비가 내려 토사가 터널 한쪽 입구를 막아버리는 바람에 이 지역은 완전 고립돼 헬기로 먹을 것을 공수했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을 여행하게 된 배경에는 큰 행운이 작용했습니다. 제가 아는 일본 중견기업 한 부서의 수련회에 동행하자는 제안을 받았던 것입니다. 비용은 물론 일본식 와리깡(각자 부담)이었지요. 무엇보다 예년 같으면 장마철 한 가운데 인데도 이틀 동안 너무 날씨가 좋았습니다. 일본 친구들은 이런 저를 하레오토코(여행만 하면 날씨가 좋은 남자)라며 축하해주었습니다. 날씨가 좋다보니 가미고치 지역의 그림 같은 풍경들을 만끽할 수 있었지요.

일본인들조차 좀처럼 가보기 힘든 곳. 가미고치의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여름에도 만년설 녹지않는 빼어난 경관

첫째는 빼어난 자연경관입니다. 일본 제3봉인 오쿠호다카다케는 남쪽 사면에도 만년설이 녹지 않은 채 7월의 태양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등산객들은 새벽5시부터 몰려들어 등정을 했습니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얼마나 차던지 물속에 손을 3초 이상 넣고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도 3000m급 연봉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둘째는 잘 보존된 자연이었습니다. 제가 머문 숙소로부터 남북으로 이른바 ‘자연탐방로’가 여럿 있었는데 북쪽으로 기본이 왕복 3시간 정도, 남쪽으로 두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빽빽한 원시림과 때때로 나타나는 습지, 거기서 노니는 송어떼와 오리떼. 참으로 여유로웠습니다. 가끔 ‘곰 출몰 지역. 주의 바랍니다.’ 라는 경고장도 보였습니다.

오리가족의 한가로운 여름 나들이. 울창한 원시림 속에 잘 닦여진 가미고치 지역의 산책로.

이 지역은 곰과 멧돼지, 사슴과 야생원숭이의 낙원이랍니다. 최근 사슴과 야생원숭이가 농작물을 파헤치는 일이 잦다고도 들었습니다. 곰이 줄어들면 사슴과 원숭이가 늘어나고, 곰의 먹잇감인 사슴과 원숭이가 늘어나면 다시 곰이 늘어나는 자연의 순환법칙도 어김없이 되풀이 된답니다.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묘진이케 못은 신비감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당국의 철저한 단속과 시민들의 협조로 신비로운 야생동식물의 낙원으로 보존되고 있는 거지요.

셋째, 이 곳은 활화산으로 인한 지형변화관찰의 학습장이었습니다. 활화산 야케다케는 제가 머무는 동안에도 양이 많지는 않지만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80년 전 대폭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산 아래 강을 용암 등으로 메워 다이쇼이케라는 거대한 못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이 지역은 비가 오면 대규모로 토사가 쌓여, 수년전 세운 안내판이 1미터나 토사에 파묻힌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산은 곳곳에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이 선명했습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자연학습장이지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 주는 긴장감도 있었습니다. 이 산은 1585년, 1858년, 1907~12년, 1913~4년, 1915년, 1919년 비교적 큰 폭발이 있었고 1922~25년에는 대폭발이 있었답니다. 그 때 다이쇼이케가 생겼다는 것이지요. 이후에도 1927, 1931, 1932, 1952년 폭발이 이어졌고 가장 최근인 1962년에도 상당히 큰 규모의 폭발이 일어나 산장이 묻히면서 2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연기를 뿜어내고 있으니 언제 폭발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이런 거대한 폭발물 주변 불과 수키로미터 지역서 잠을 잘 때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면 강심장인가요.

수력발전등 일본인 기술력 가늠해볼수도

넷째, 주변은 활화산으로 지형이 불안해 수많은 온천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싼 가격의 노천온천들이 골마다, 분지마다 저마다 손님을 부르고 있었으니까요. 이 얘기는 나중에 ‘일본의 온천...’으로 소개해드릴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가미고치로 통하는 길목이나 주변 산들도 퍽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수백미터의 험준한 낭떠러지가 경쟁하듯 자리 잡은 이 지역에는 수많은 수력발전소가 있었습니다. 봉우리에서 아래까지 뻗어있는, 수직에 가까운 수백미터의 유역변경식 발전을 위한 거대한 파이프들이 대단했습니다. 해발 1790m에 위치한 나가노현과 기후현의 경계 아보고개의 자동차길은 아찔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2700m 고지의 자동차도로도 있다는데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나가노현과 기후현의 경계인 해발 1790m의 아보고개. 비만 상당히 내려도 통행이 금지된다는 걸 표시하고 있다.

화산활동을 정밀관찰 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수력발전을 최대화하며, 정교한 토목공사로 험산준령을 넘어가는 일본인들의 기술력을 가늠해볼 수도 있었습니다. 지진, 화산폭발, 태풍 등 자연의 도전에 응전하면서 과학기술을 발달시켜온 일본인들의 ‘응전정신’을 생각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쿄에서 가미고치까지 가는 교통비는 대단히 비쌌습니다. 저는 왕복 모두 승용차에 편승했는데 200Km 정도의 고속도로 통행료만 10만원 정도였습니다. (한국의 다섯배 정도) 가미고치로 가는 30여분간 버스 요금만 10,000원.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 그 곳엔 하룻밤 2식에 500,000원짜리 호텔도 있었습니다. 도쿄에서 기차로 가더라도 갈아타는 버스비용까지 편도 교통비만 10만원 가깝다나요. 철야버스가 조금 싼 편이랍니다. 그나마 국립공원 입장료가 따로 없는 게 위안이었습니다. 버스나 택시비에 포함됐겠지요?

이런 가미고치 지역은 불과 100여 년 전에는 일반인들의 접근을 불허했다고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도 험준한 2000~3000m급 산들로 둘러싸여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1880년대 후반 영국인 선교사 웨스턴씨 부부가 이 지역을 본격 등반, 책을 통해 ‘일본알프스’라고 알리기까지는 전설속의 오지로 남아있었답니다. 그 때까지는 주로 벌목꾼이나 사냥꾼 ,그리고 수도승들만이 드나들 정도였다지요.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70이 넘은 노인을 깊은 산에 지게로 지고가 버려 숨지게 하는 일본식 고려장을 그린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의 소재가 된 전설도 탄생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taein@seoul.co.kr

15만? 30만? 수수께끼 같은 일본 성(姓)씨
200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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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姓)씨의 숫자는 그야말로 수수께끼입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습니다.

과연 몇 개나 될까. 책에 따라,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숫자가 너무 다르고, 더욱이 그 의문을 명쾌하게 풀어줄 권위 있는 통계자료는 찾기 어렵습니다. 적게는 3만개에서 많게는 30만개라는 것까지 다양합니다. 너무 오차가 크지요. 15만개 안팎이란 통계가 그 중 가장 많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 관련부처 홈페이지에 들어가고 도쿄 시내 대형서점의 성씨 사전이나 언론사 자료, 혹은 인터넷 검색을 하면 사실에 근접한 결론은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지난 11일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 한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 33명의 성씨가 모두 달랐다. 일본에는 성씨가 너무 많다고 할 정도로 다양하다.

즉 현재 사용 중인 성씨는 15만개 정도, 없어지거나 쓰고 있지 않은 성씨까지 합하면 29만 1000여개. 많게는 30만개까지로 요약됩니다. 최신판 ‘일본성씨대사전’ 등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같은 성씨의 수는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2위라고 합니다. 인종 백화점이라 불리는 미국은 성씨가 100만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일본의 성씨 수가 세계 1위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성씨는 286개(2000년 인구통계)로 나와 있지만 귀화외국인들의 성씨가 새로 생겨나 300개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13억 인구의 중국에는 성씨가 3500개라는 통계가 유력하고 1만3000개라는 자료도 있습니다.

성씨의 숫자가 이러다 보니 한국의 최대 성씨인 김씨는 인구의 21.6%를 차지하고 있고, 이씨는 14%정도입니다. 한국의 4800만 인구 중 김, 이, 박, 최, 정(鄭)씨 등 5대 성씨만 해도 인구의 50%를 넘는다고 합니다. 다만 한국의 성씨 중에는 김, 이씨의 본관이 각각 100개가 넘어 전체 본관은 4179개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무슨무슨 파까지 합하면 한국의 세부적인 성씨의 종류도 만만치는 않지요.

세계 최대의 성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물론 일본, 서양에도 다양하게 살고 있는 이(李)씨가 1억여 명으로 세계1위라는 통계도 있고, 중국의 왕(王)씨가 1억 명으로 1위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한 모임 안에 같은 성씨 찾기 어려워

하지만 일본에서는 성씨의 숫자가 30만개에 가깝다보니 한국에서처럼 대성은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맞는 이의 절반이 김-이-박 중 한 사람이란 우스개 소리도 있지만 일본에서는 좀 다르다는 얘기지요.

실제로 제가 여러 모임에 갔지만 한 모임 안에 성씨가 같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11일 치러진 일본 참의원선거에서 그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한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 33명 가운데 단 1명도 성씨가 같지 않았으니 한국과는 대비가 되지요.

60명 가까운 역대 수상 가운데에서도 스즈키, 다나카, 가토 등 3개 성씨만 겨우(?) 2명씩 배출했습니다. 한국의 경우 대통령제가 도입된 지 60년도 안되었지만 9명의 대통령 가운데 김씨와 노씨가 두 명씩 대통령을 배출한 것과 대비되지요. 이렇다보니 1억2776만 명의 일본 인구(2004년 6월 현재 총무성 통계) 가운데 1위 성씨인 사토씨의 경우가 191만 명으로 1%대 입니다. 그 뒤를 스즈키, 다카하시, 다나카, 이토, 야마모토, 나카무라, 고바야시, 가토씨가 잇고 있습니다. 이 순위도 자료에 따라 조금 다릅니다. 스즈키씨가 1등인 자료도 있지요.

일본의 성씨가 이처럼 엄청난 숫자를 기록하게 된 것은 불과 130년 전의 일입니다. 일본에서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전만 해도 귀족이나 무사계급만이 성씨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확 바뀝니다.

메이지정부는 1870년 ‘평민성씨허가령’을 내려 평민이라도 성씨를 가질 수 있게 합니다. 근대국가로서 국민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나 자발적으로 성씨를 가지려는 평민들이 늘지 않았습니다. 절박성이 없었고, 계급의식을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되자 근대적 국민국가를 지향했던 메이지정부는 다급해졌습니다. 납세와 징병 등 효율적인 국민관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메이지정부는 1875년 평민들도 성씨를 의무적으로 갖도록 하는 법령을 공표합니다. 이를 어기는 사람을 처벌하겠다고 윽박질렀지요.

이렇게 되어서야 대부분의 평민들이 일제히 성을 급조하느라 법석을 떨었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성씨가 수백에서 수천으로, 수천에서 수만 개로 늘게 된 것이지요. 문자(한자)도 모른 채 갑자기 성씨를 만들어야 했던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상대적으로 학식이 깊었던 인근의 유학자나 승려들에게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소, 새, 멧돼지 이름으로 급조한 경우도

이 때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그 사람들이 살던 밭이나 산, 강, 숲, 언덕, 우물 등의 풍경을 넣은 적당한 한자로 조합해서 성씨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성씨에는 산이나 강, 숲, 우물 등이 들어간 게 유난히 많습니다. 일본의 성씨는 주로 한자로 두 글자이지만 외자 성씨도 있고 3자 성씨도 적지 않습니다.

성씨가 급조되다보니 후유증도 많았습니다. 부르기 거북한 개나 소, 새, 멧돼지 등 동물이름, 귀신 등의 명칭을 성씨에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소똥이란 뜻의 성씨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름도 비슷합니다. 따라서 정부는 호적법 50조에 ‘어린이 이름에는 평이한 상용한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규정했습니다.

상용평이한 한자는 당초 1945자였는데 지난 6월 287자를 더해 2232자가 되었습니다. 이름에는 이 한자들과 일본 문자인 히라가나 혹은 가타카나만 쓸 수 있지요, 물론 이를 안 지키고 억지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아 이번처럼 “수백 개의 출판물에서 사용될 경우” 등에 한해 쓸 수 있는 한자를 늘려주기도 합니다. 올해 추가된 한자 중에는 ‘암’ 등 병명이나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한자가 다수 포함돼 일본인 심리의 일단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성씨 제도는 철저히 남성우위입니다. 여성이 결혼을 하면 서양처럼 남성의 성씨를 따라야 합니다. 사회생활을 했던 여성이 결혼을 하면 갑자기 성이 바뀌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지요. 그래서 부부가 별개의 성을 유지하자는 움직임도 있지만 아직은 대세를 이루지 못합니다.

또 하나 일본의 특이한 제도가 양자제도입니다. 아들이 없거나, 친자들이 시원치 않으면 양자나 데릴사위를 공개적으로 들여 가문을 이어가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상이 된 인물도 있고, 대그룹 총수가 된 인물도 있습니다. 이 때 양자나 데릴사위가 되는 남자는 이전의 성을 버리고 자신을 받아들인 집안의 성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성씨 문제에 일본이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보다는 집착하지 않다는 얘기겠지요.

taein@seoul.co.kr

온천들의 비탕(秘湯)경쟁-혼탕...사해탕...
200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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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의 나라 일본. 그 일본은 말 그대로 ‘온천욕의 천국’입니다. 이런 일본이 요즘 온천 때문에 시끌시끌합니다. 비탕(秘湯:신비한 효험이 있다는 온천)경쟁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천들은 유백색탕, 혼탕, 사해탕 등을 앞세워 치열한 손님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비탕경쟁을 벌이고 있는 온천들의 ‘반칙’이 잇달아 발각됐습니다. 한 주간지의 폭로로 일본 북알프스지역 온천지인 백골온천 지역 13개 온천장 중 두 개 여관에서 온천물의 유백색을 유지하기 위해 '입욕제'를 8년간 몰래 투여해온 게 밝혀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업소 역시 지난 4월부터 입욕제를 사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이고 있기도 합니다. 이 온천들은 모두 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런 반칙을 저지른 거지요. 불법은 아니지만 ‘사기’라는 지적입니다. ‘3일 들어가면 3년은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는 신비의 온천으로 소문나 장편소설에도 등장한 온천지입니다만...

일본 중부 기후현 북알프스 지역의 활화산 인근에 위치한 한 온천지대

이번 사태를 초래한 일본 온천들의 비탕경쟁은 장기불황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즉 거품경제기에 온천개발붐이 일어 온천이 급격히 증가했고, 자연 손님유치경쟁은 뜨거워졌습니다. 온천개발을 많이 하다보니 원탕이 고갈되기도 합니다. 온천수가 고갈됐는데도 여전히 온천수가 나오는 것처럼 속이다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백골온천지역처럼 온천수는 나오지만 과다사용으로 온천수의 질이 변하자 손님 감소를 우려한 업주가 착색제로 눈을 속이기도 합니다.

격렬한 비탕경쟁의 한 수단으로 혼욕(혼탕)도 여전한 모양입니다. 최근 들어 오이타-하코네 등 온천격전장에서는 ‘사해 탕’이란 비탕도 속속 생겨나고 있답니다. 입욕시 사람이 물에 뜨는 사해바다 바닷물과 같은 해수 염도에 맞는 온천탕을 개발, 물에 뜨는 체험을 하게하고, “여성피부에 좋다.”면서 손님을 유치하는 것이지요.

마이니치신문등 일본언론에 따르면 이런 비탕경쟁을 ‘생존을 건 경쟁’으로 표현합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백골온천도 유백색의 온천물과 효험을 내걸고 연간 40만 명의 손님을 유치하는 유명 온천지대입니다.‘신비의 유백색 뜨거운 물’이라고 온천을 광고하고 있지요.

‘비탕’ 경쟁속 입욕제 투입 드러나

그런데 지난 96년 문제가 생겼습니다. 두 곳의 공공 노천목욕탕의 물이 갑자기 유백색의 흐린 물로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원천이 고갈돼 조금 떨어진 원천을 사용하기 시작했더니 유백색이 아닌 투명한 물만 나온 것입니다. 물이 유백색으로 변하는 것은 포함된 석회분이 공기에 접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유백색으로 변하지 않으니 상품성이 떨어져버렸지요.

일부 손님이 “왜 유백색이 아니냐.”고 물어오면 2개 온천 주인은 약간 투명한 물이라면서 견뎌보았지만 다른 온천여관들은 유백색의 물이 넘쳐났습니다. 당연히 손님들의 발길이 줄었지요. 결국 손님을 되찾기 위해 온천관리인은 유백색이 나게 하는 입욕제를 염가로 구입, 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입욕제투입은 은밀하게 계승됐고, 입욕제 투입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투명해지자 5년 전부터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일정양의 입욕제를 자동적으로 주입 할 수 있는 기계를 설치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최근 한 이용객의 눈에 아침 일찍 입욕제를 투여하고, 물색깔이 변하는 현장이 발각되면서 이 사실이 언론에 제보됐고, 언론의 취재로 발각됩니다. 일부 조사에서 가보고 싶은 온천 1위에 올라있는 백골온천에 이제 예약취소와 항의전화가 빗발치고 있답니다.

일본의 온천은 몇 개나 될까요. 숙박시설을 갖춘 온천장은 2002년도를 기준으로 전국에 3100여개소로 97년보다 약 500개소 증가했습니다. 원천의 총수도 2만 7000여개소에서 매년 약 200개소씩 증가하고 있답니다. 경쟁이 심화되다보니 지하 1000미터, 2000미터에서 끌어올리는 온천물도 많지요.

경제는 안 좋고 인구는 정체상태인데 온천은 늘어나니, 비탕경쟁은 필사적이라고 합니다. 특히 거품붕괴와 장기경기침체로 손님이 줄어들면서 온천장 경영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답니다. 손님을 확 끌만한 차별성이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지요. 가격은 200엔, 500엔, 1000엔 등이 일반적이고 2000엔(2만원)이상도 있습니다. 다만 가격은 문제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경쟁의 양상은 인정사정없는 모양입니다. 지난해 원천 고갈을 은폐한 한 온천장은 큰 홍역을 치른 뒤 부근에 다른 원천을 개발했지만, 경쟁업체들이 “그 집은 온천이 아니다.”라고 소문을 낼 정도로 경쟁이 격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남녀혼욕탕, 전용탕과 큰 차이 없어

1948년에 제정된 일본의 온천법은, 온천을 지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25도 이상의 온수. 그리고 나트륨 등 정해진 성분 1종류 이상을 기준치 이상 포함한 지하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수질검사를 받아 도-도-부-현으로부터 허가를 받으며, 그 후는 성분 검사의 의무는 없습니다. 원천의 성분과 이용상의 주의 사항, 입욕을 피해야 할 금기 등의 표시만 하면 됩니다.

이번 백골온천의 입욕제투입도 그 자체는 온천법위반은 아니지만, 이용자를 속인 도의적 책임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일본온천협회가 지난해 봄 ‘원천인가, 여과한 물인가, 가열된 물인가’ 등을 욕조 마다 표시하는 간판 제도를 도입했지만 실효성은 의심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입욕제 투입 사건은 일본사회에 큰 충격인 모양입니다. "백골온천만이 아니다. 유노 하나(유황 꽃: 유황이 풍부한 온천의 노천탕에 가면 기다란 밀 크기만한 흰색의 유황꽃이 보이며, 이 유황꽃의 크기와 양에 따라 손님들의 온천에 대한 신뢰가 좌우된다고 합니다. 크고 많을수록 좋답니다.)를 투입하는 온천도 10곳 이상”이란 소문도 있습니다. 일본온천 전체가 한 묶음으로 의심을 받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에서는 질 좋은 원천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온천욕에 정통했다는 70대 노인들은 “될 수 있으면 로텐부로(노천탕)를 이용하라. 노천탕도 용출수(자분천)가 좋다. 노천탕이 있는 온천도 옥내에는 파이프가 있기 때문에 파이프가 막히지 않도록 원수를 처리해 이용한다. 옥내에서는 대부분 물을 한 번 사용한 뒤 정화해서 순환식으로 한 두 차례 더 사용한다. 살균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염소가 투입된다. 특히 재작년 한 온천에서 라지오날레균에 의한 사망자가 나오면서 염소사용은 더 늘어났다. 대부분 원수가 부족하니 어쩔 수 없다. 일본 온천장의 7할 정도가 순환식이라는 통계도 있다.”라고 조언합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남녀혼욕(혼탕)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야후재팬에 혼욕관련 사이트수만도 10만개가 넘습니다. 대부분 혼욕이 가능한 온천장을 소개하거나, 혼욕의 흥미를 자극하는 내용들입니다. 낯 뜨거운 사이트도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일본 북알프스나 동북지방, 그리고 규슈 등 각지의 한적한 곳에는 혼탕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나 혼욕장은 남녀 전용탕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불필요한 호기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물 색깔이나 증기 등으로 은밀한 부분이 노출되지 않습니다. 입욕장소도 별도입니다. 각별한 예절도 요구됩니다. 그냥 색다른 노천탕을 경험한다는 정도로 보면 됩니다.

이처럼 업주들은 격렬한 비탕경쟁으로 손님을 유치하려고 하지만 온천욕을 아주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물이 좋은 곳만을 찾아간다. 현지 온천장의 지자체에서 안내를 받거나 입소문으로 확인하고 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온천경쟁의 거품도 조만간 꺼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taein@seoul.co.kr

애완견과 공존하기? 일본의 고민
200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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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에는 애완견이 급증하면서 관련산업도 번창일로지만, 이웃간 충돌 등 문제도 적지 않은가 봅니다. 애견문화가 전환점에 서있는 것이지요.

일본에 왜 애완견이 늘고 있을까요. 핵가족화가 급물살을 타면서 아이들은 줄고, 혼자 사는 독신이 늘고, 인간사이의 경쟁은 격심해지는 것이 근본 이유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개로부터 인간에게는 느끼지 못하는 따뜻함을 느끼고, 인간과는 경쟁관계 등으로 가까이 하기 어렵지만 개와는 경쟁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애완견이 놀라운 속도로 늘고 있다고 사회학자들은 분석합니다.

도쿄시내 한 공원에서 해질녘을 이용, 애완견을 운동 시키는 시민들.

실제로 일본에서는 5가구에 1가구는 개를 기르고 있다고 합니다. 애완동물사료공업회에 따르면 2003년 가정에서 기르는 개는 작년에 1113만 마리로 10년간 1.5배 늘었다고 합니다. 정부통계로는 2002년 말 기준으로 등록된 개만 630만 마리라고 합니다. 애완동물 2위인 고양이도 600~700만 마리 정도 된답니다.

이렇게 애완견이 많다 보니 화제도 만발하고 있습니다. 우선 관련산업은 번창일로라고 합니다. 휴가철인 요즘은 시내는 물론 공항에도 애완견 호텔업이 성업중입니다. 개팔자 상팔자란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지요.

야간용 발광개목걸이나 아파트에서 개가 짖지 못하도록 하는 특수진동장치, 장신구, 심지어 애완견 화장업 등 다양한 산업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9만엔(약 90만원)가까운 루이비통 개목걸이도 있고, 애완견용 유기농 건강식품도 인기랍니다. 물침대와 건강용 러닝머신, 애완견클리닉도 있고, 진흙마사지도 있습니다. 코스요리를 하는 고급 애완견 레스토랑도 있다고 합니다.

개 시체 처리업도 중요한 산업입니다. 지난해 8월 도쿄 마치다시에는 애견이나 고양이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는 주인을 위한 묘지도 등장, 인기를 끌고 있답니다. 가격도 대단합니다. 고작 3분의1평(1.2제곱미터) 정도에 100만엔에서 130만엔 정도라나요. 애견과 함께 천국에서 잠들고 싶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첨단생명공학(클론기술)을 이용, 죽은 애완견을 다시 볼 수 없느냐는 문의까지 있을 정도이지요. 개 전용 온천도 등장했습니다.

애완견 관련산업 번창...10조원 시장

한달에 한 번 정도 개를 목욕시키고 귀를 청소하는 등의 미장원도 성업 중입니다. 보통 회원제로 운영중이며 1회에 3000엔(약 3만원)~8000엔 정도 한답니다. 애완견 구입비용도 만만치 않아 일반적으로 한 마리에 30만엔 안팎이라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애완견 시장은 10조원 규모로 팽창했습니다. 식품부문 4조원, 용품부문 2조원, 거래시장 4조원 등입니다. 20조원 규모로 확대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본이지만 애완견이 급격히 늘다보니 마찰음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키우는 사람은 즐겁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광견병 문제가 부각됐습니다. 일본에서는 1957년에 광견병이 근절됐지만, 애완동물 붐으로 개의 수입이 급증하면서 광견병이 따라서 들어올 위험도 증가하고 있는 것이지요.

광견병에 의한 사망자가 전세계에서 매년 3만5천~5만명이고, 그 중 아시아가 3만3천명선이라고 하니 일본 정부도 무척 신경이 쓰이는 모양입니다. 일본의 공식적인 애완견 광견병 백신접종률은 77%(630만마리 기준)라고 합니다. 그러나 미등록을 포함하면 1천만마리 이상의 개가 있다고 하니 접종률은 5할 이하일 수 있지요. 접종률이 80%는 돼야 광견병 위험이 없다는데 말이지요.

섬나라에는 광견병이 적다고 하지만 애완견 수입이 많다보니 해외로부터 광견병 바이러스가 침입할 위험은 상존합니다. 일본의 개 수입은 증가일로여서, 작년에만 약 1만7000마리를 기록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광견병 바이러스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최근 미국이나 중국 등 광견병 발생우려가 있는 나라로부터 생후 10~11개월 미만의 강아지를 수입하지 못하게 하는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개가 많아지면서 개로 인한 갈등도 점차 심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공원으로 개를 데려오는 시민과 일반시민 사이에 충돌이 자주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공원에 개의 출입을 금지시키거나 공원에 개전용 운동장이 생겨날 정도지요. 개주인은 어떻게든 운동을 시켜야하는데, 방뇨나 방분, 혹은 혐오감 등으로 인한 갈등이 생기는 것이지요. 실제 일본 도쿄엔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짙은 검정색의 커다란 애완견들이 많습니다. 송아지만한 개들도 무척 많습니다. 오싹해질 정도로 큽니다.

갈등이 계속되자 사람과 개를 공원에서 분리하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사람과 개의 공생이, 특히 도시지역에서는 공생이 어려워지는 모양입니다. 공동주택에서는 애완견 사육을 둘러싼 다툼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성대제거수술을 받은 불쌍한 개들도 많지요. 공동주택 계약을 할 때는 애완동물 유무여부를 확인하고, 약속을 어길 땐 쫓겨나기도 합니다.

시민끼리 마찰...전용공원 설치 확산

도쿄도내 대부분의 공원에는 개의 방목을 금지하는 푯말이 곳곳에 세워져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육자들은 이를 위반하고 있습니다. 스기나미구의 도립 젠푸쿠지천 녹지의 어린이용 축구장은 해질녘이면 애견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개를 풀어놓기 시작합니다. 개에게 운동을 시켜야 이른바 비만이나 혈관계통 병이 생기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축구를 하며 놀던 어린이들은 송아지만한 개가 무서워 달아나버립니다.

어린이들의 부모는 반발하겠지요? 이렇다 보니 애완견의 방목과 무단 방뇨-방분 등 공원지역에서 발생하는 주민의 민원 수의 절반이 개와 관련된 갈등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도쿄도는 작년 11월 도립 공원 2개소에 끈 없이 개를 놀게 할 수 있는 개 전용공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애견가와 개에 약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분리시키는 것이지요. 자연 100마리 이상 개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공원도 생겼습니다. 개 주인들은 저녁이나 아침 일찍 몰래 방사하는 괴로움 없이 떳떳하게 개를 운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도쿄도는 새롭게 도립 공원 6개소에 개전용 공원 설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코하마시 홋가이도현 등도 개 전용공원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아예 개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공원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24 헥타르의 가나가와 현립 사가미하라공원은 작년 가을에 아동공원, 올봄부터는 잔디밭 광장의 반을 개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위생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지요. 실제로 어린이놀이터에 방치된 개의 똥을 초콜릿으로 알고 어린이가 집어먹는 경우도 있답니다. 기생충 감염 우려가 크다는 것이지요.

도쿄 구(區)지역에서 고급단독주택이 많고, 개를 기르는 세대의 비율이 높은 스기나미구는 상당수 구립공원을 한 때 개 금지구역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애견가들의 반발로 인해 다시 개 출입을 인정하는 공원을 늘렸습니다. 다만 개 출입 공원도 ‘반드시 끈으로 묶은 채’로 라고 계도하고 있지만 이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애완견은 급증하고 있지만 애견문화는 제자리걸음인 것이지요. 그래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갈등해소를 위해 자주 개입하고 있습니다. 좀 더 좋은, 슬기로운 해결책은 없을까요.

'야스쿠니 참배' 일본인들의 시각
200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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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야스쿠니신사’는 왜, 자꾸 한-중-일 3국간 분란의 씨앗이 될까요.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의 수도 도쿄 시내 한복판인 지요다구 언덕길에 세워져 있습니다. 주변에는 일왕(천황)의 궁궐과 국회, 그리고 정부 각 부처의 청사, 각 정당의 당사들이 위치한 그야말로 핵심요지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중요시설이란 얘기지요.

야스쿠니에는 메이지유신에서 태평양전쟁 때까지 일본식으로 하면 ‘일본국을 위해 전사한 전몰자’246만6,495명(야스쿠니 홈페이지 2003년10월17일 기준)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안치될 수 있는 자격은 일왕의 명령을 받들었는지가 조건입니다. 침략전쟁을 일으켜 300만 명 이상을 희생시킨 전쟁의 직접 책임자인 A급 전범 판결을 받은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14명이 합사될 수 있었던 근거지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일본인들

안치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메이지유신 과정 희생자 7,751명. 이들을 위해 1869년 메이지일왕의 지시에 의해 도쿄초혼사를 건립했고, 10년 후에 야스쿠니신사로 개칭했습니다. 그밖에도 메이지 시절 세이난전쟁 희생자 6,971명, 청일전쟁 13,619명, 대만침략 1,130명, 북청사변 1,256명, 러일전쟁 88,429명, 제1차세계대전 4,850명, 제남사변 185명, 만주사변 17,176명, 중일전쟁 191,243명, 태평양전쟁 2,133,885명 등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태평양전쟁에 동원됐다가 숨진 것으로 돼있는 2만1,000명의 한국인 명부도 이 곳에 보관, 일왕을 위해 순국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로서는 빨리 해결해야 할 숙제입니다.

야스쿠니신사는 처음부터 신성시됐습니다. 1867년 집권한 메이지정부는 일왕의 군대를 조직해야 했던 상황에서 전몰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고, 이의 일환으로 전사자 3,588명을 위한 합동초혼제를 초혼사에서 거행했습니다. 이후 야스쿠니신사로 변경됐고 전몰자들은 이 곳에 모두‘신’으로 모셔졌습니다.

메이지헌법에서 일왕은 신(神)으로 받들어지는 정교일치였습니다. 침략전쟁 추진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것이지요. 당연히 다른 신사와는 지위가 달랐습니다. 전쟁 중 일반 신사는 내무성 소관이었으나 야스쿠니만큼은 육해군성 소관의 특별한 종교 시설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 후 야스쿠니의 헌법적 지위는 바뀝니다. 1946년에 공포된 평화헌법에서는 영구평화와 신앙의 자유, 정교 분리의 원칙과 더불어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의 보호를 벗어나 하나의 종교법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민당을 비롯, 우익 정치가들은 특별한 지위의 야스쿠니 수호와 공식참배를 외쳤습니다.

경제력 커지면서 총리· 각료 참배 단행

그러던 중 1978면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2차대전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면서 총리나 각료의 참배여부가 관심사로 부각되었지요. 그런데 일본이 경제력이 커지면서 총리나 각료의 참배는 단행됩니다. 1985년 8월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공식 참배, 한국과 중국이 거세게 항의한 뒤로 한동안 잠잠하다가 96년 7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2001년 8월13일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했으며, 고이즈미 총리는 이후 매년 참배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험한 주변 국가들은 ‘총리가 전범의 위패 앞에 고개를 숙여 참배하는 것은 일본의 전쟁책임을 부인하는 것이며, 분쟁이 생기면 전쟁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고 시위하는 것’이라면서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복 59주년인 올해 8월15일 야스쿠니신사는 이런 흐름을 잘 반영했습니다. 전몰자 단체나 참전인사들, 우익인사들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국회의원 58명이 한꺼번에 참배하고, 각료 4명이 참배했으며,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는 참배한 뒤 내년 8월15일엔 일왕도 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1월1일 참배했기 때문인지 야스쿠니 바로 아래 전몰자 묘역에 꽃다발을 바쳤습니다.

이처럼 유권자들의 표를 먹고사는 다수의 정치인들이 주변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는 것은 유권자들이 이를 용인 혹은 지지하기 때문인 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일본의 현재 분위기지요. 예를 들면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는 한국이나 중국을 무시하는 극우적 발언을 서슴지 않지만 도쿄도민들은 두 번씩이나 그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오전에 제법 많은 비가 내린 올해 8.15에는 일본인 6만여명이 야스쿠니를 찾았답니다. 지난해 보다 1만명 정도 늘어난 수치라고 합니다. 공식 참배가 개시된 오전6시부터 오후7시까지 개인과 단체 참배 행렬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은 무슨 생각으로 야스쿠니를 찾을까요. 물론 구경하는 내-외국인, 취재진 등도 많이 있었지만 참배한 대다수 일본인은 야스쿠니를 국립묘지 정도로 생각하는 듯, 경건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성묘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이웃나라에서도 잘 이해해주어야지.”라고 말합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됐는데 A,B,C급 전범이나 무명용사는 차이가 없다는 얘기지요.

일본사회 우경화 바람타고 더욱 늘어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 한국이나 중국, 타이완 등이 일본 총리나 각료, 국회의원들의 야스쿠니 공식 참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자세입니다. 최근의 일본사회 우경화 물결을 타고 이런 사람의 비율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종교색을 뺀 별도의 추도시설을 건립해 (전범 참배라는)말썽의 소지를 없애야 한다는 소리도 일본에는 분명 있습니다. 일본 정부도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한국과 중국정부가 강력히 반발하고, 특히 중국이 이를 빌미로 중일정상회담도 거부하자 2002년 12월 별도의 추도시설을 만들겠다고 하더니 한숨을 돌렸는지 지금은 감감 무소식입니다. 야당과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요구해도 여론을 살피고 있다는 입장을 되풀이합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8월15일 야스쿠니에서는 ‘야스쿠니를 지키는 모임’ 소속 회원들이 천막을 친 채 참배객들을 상대로 ‘전몰자가 전범이라니. 중공(중국공산당의 줄임말)의 압력에 굴하면 안 된다.’라는 취지의 서명활동을 했습니다. 옛 일본군복을 입은 노인 등이 나팔을 불며 행진하는 등 기세를 올렸습니다. 야스쿠니 참배 비판론자들은 끼어들 틈이 없었지요.

그러나 주변국들은 올해도 일본정치인들의 집단참배를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야스쿠니 홈페이지는 중국 네티즌의 집중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있은 뒤 ‘국외로부터 이상한 억세스가 집중돼 열람에 지장을 받는다’며 양해를 구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과연 언제까지 '평화로운 나라, 편안한 나라'라는 뜻의 야스쿠니(靖國)를 둘러싼 일본과 주변국의 불편한 관계는 지속되어야 할까요. 가해자인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진정으로 사과하고 정리한 뒤 미래를 향해 동아시아 국가들이 함께 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일본에 이런 걸 기대하는 게 무리일까요. 일본인들은 억울하다고도 합니다만...

1945년 8월15일 당시 히로히토 일왕이 종전(패전)조서에서 ‘미국과 영국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고 말한, 반성은 전혀 없던 그 분위기가 지금도 일본에서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taein@seoul.co.kr

일본의 상징, 후지산에 오르다
200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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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꿈속에서 세 가지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 첫 번째가 후지산, 두 번째는 독수리, 세 번째는 가지(야채류)입니다. 특히 연초에 꿈속에서 후지산을 보면 그 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좀처럼 후지산이 꿈에 나타나는 일이 없다고 하는군요. 평소에 꿈에서나, 주변을 지나다 운 좋게 보게 되는 경우 복권을 사는 사람이 많답니다.

그래서인지 후지산 프리미엄이 있습니다. 이른바 ‘후지미’ 프리미엄인데 집이나 호텔방, 온천 등지에서 맑은 날 후지산이 보이면 그만큼 가격이 비싸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후지산에 직접 오르는 일본인은 생각보다는 적은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에게 후지산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산이랍니다. 신성한 산에 올라, 짓밟는 것이 꺼림칙한 측면도 있다나요? 실제 제가 만나본 일본인중 직접 올라가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후지산에 오르면 외국인들은 정말 많습니다. 대부분 단체로 오릅니다.

후지산 정상의 분화구

많은 일본인들은 후지산을 가장 아름다운 일본의 산이라고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일본에 도착하기 전 비행기 안에서 도쿄 부근의 후지산 위를 지날 때 승무원이 “지금 눈 아래 아름다운 후지산, 만년설에 덮인(여름에는 일부 응달진 골짜기에만 보임) 후지산이 보입니다. 한 번 구경해 보세요.”라고 해 친숙해지는 산이기도 하지요.

이 산은 해발 3776m로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일본의 상징이지요. 우리의 지리산(1915m), 한라산(1950m), 백두산(2744m 혹은 2749m) 보다는 한참이나 높은 산이기도 합니다. 1부능선이라 할 수 있는 1합목이 해발 1405m, 2합목이 1596m, 3합목이 2020m이 듯, 해발 1400여m의 거대한 분지 위에 우뚝 솟아있습니다. 2500~2700m이상에서는 풀 한포기 없이 검붉은 화산재만 보이는 황량한 산이기도 합니다.

일본 열도의 거의 가운데에 자리했지요. 간토, 간사이의 경계이기도 합니다. 주변에 다른 산이 없이 혼자 우뚝 솟아있기 때문에 자동차로 두 시간 걸리는 도쿄에서 날씨가 좋을 때는 보일정도입니다.

후지산은 휴화산이지만 몇 차례에 걸쳐 분화를 반복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산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9월 후지산 1500m 동북사면 함몰지점에서 수증기가 솟아나 대분화의 전조가 아니냐며 일본인들을 긴장시킨 적도 있지만, 폭발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해발 3776m...도쿄서 차로 두시간 거리

1707년에는 후지산 중턱에서 대분화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도쿄에까지 화산재가 날아왔답니다. 북쪽에는 다섯 개의 큰 호수가 있습니다. 후지산의 어원에 관해서는 분화를 뜻하는 아이누어(홋카이도의 원주민)의 후찌나 푸슈라고 하는 설 등이 있지만 정설은 없습니다. 1860년대부터는 서양인을 중심으로 ‘후지야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은 후지산을 종교적으로 숭배, 각 지방의 산과 마을 이름은 물론 각종 회사나 상점이름도 후지라고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등산객들이 오르는 쪽의 정상에는 신사도 있습니다.

그럼 후지산에는 어떻게 오를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후지산에 오르는 관광상품이 있습니다. 높고 험한 산이다 보니 대부분 단체로 오르게 됩니다. 일본 내에서는 언론사나 여행사들이 후지산 등산이 허용되는 7월1일부터 8월말까지 1박2일짜리 후지등산 상품을 운영합니다. 이 경우 편안하게 후지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1박2일 정도면 무리하지 않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야간 개인 산행입니다. 보통 무박2일의 강행군입니다. 강한 체력을 요구하며, 후지산 등산에 대해 사전에 공부하고, 가능하면 아는 사람과 함께 올라가야 합니다. 그도 안 되면 등산이 시작되는 5합목에서 사람을 사귀어 함께 오르는 것이 상책입니다. 저의 경우는 7월16~17일 무박2일 등산 때 독일인 40대 친구와 어울려 정상에 오를 때부터 하산, 도쿄로 돌아올 때까지 서로 의지했습니다.

후지산을 오르는 사람들

후지산 등산은 크게 3가지 코스가 있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해발 2305m인 5부능선(일본어 고고메)에서부터 오릅니다. 우선 도쿄에서는 신주쿠에 가면 중앙고속버스 고고메 행이 7~8월에는 하루 6차례 운영됩니다. 봄-가을에는 주말과 휴일에만 두 차례 운행됩니다. 두 시간 25분정도 걸리며, 요금은 편도 약2만6천원입니다.

오를때 방한장비·산소·지팡이등 필수

후지산에 오르기 전에는 여름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반드시 방한장비를 준비해야합니다. 두꺼운 옷과 장갑. 고산병에 대비한 산소를 준비해야지요. 등산로의 산장에서도 팔지만 비쌉니다. 지팡이도 필요하지만, 현장에서 나무지팡이를 팝니다. 낙인을 찍어오는 재미가 있지요.

등산은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산보다는 힘이 듭니다. 특히 야간산행은 위험합니다. 깜깜한 밤에 간간이 보이는 것은 산장의 불빛과 어마아마하게 많은 별들. 멀리 후지 5호 호수 주변의 도시 불빛들. 길은 잘 찾아가야합니다. 자칫 길을 잘 못 들 수도 있습니다. 고성능 전등을 가져가는 것이 필수지요.

정말 산소가 필요할까요. 제 경우 밤새 걸어 6시간만에 정상에 올라갔지만 중간에 산소를 흡입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8부능선 이상에서는 바람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합니다. 겨울철 지리산 천왕봉부근에서 경험했던 바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정상의 일출은 대략 새벽4시30분께부터 시작됩니다. 체력이 허용되는 한 일출을 후지산의 진짜 정상인 검봉(3776m)에서 맞이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대중적인 등산로에서 올라가는 곳은 최정상은 아니고, 분화구 반대편으로 걸어서 40분정도 걸리는 곳이 최고봉입니다. 특히 정상의 분화구 주변은 돌아보는데 1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깊이 240m, 직경 772m의 거대한 분화구는 위압적이기도 합니다. 70여개의 기생화산을 끼고 있습니다.

만년설도 보이지요. 무엇보다 가끔씩 분화구 주위 능선에서 맞는 강력한 바람은 거구의 남자들도 다리에 바짝 힘을 주지 않으면 밀려갈 정도로 위험천만입니다. 그래서인지 분화구 주위를 한바퀴 직접 돌아보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습니다. 시도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산 정상에서 일본사람들이 ‘야호’ ‘야~~~호’하는 소리가 한민족과 똑같습니다. 두 민족이 똑같은 소리를 내는 데는 분명 연유가 있어 보입니다.

내려올 때도 시간은 많이 걸립니다. 4시간 정도. 급경사이기 때문에 무릎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팡이가 필요하지요. 강력한 직사광선도 따갑습니다. 화산먼지바람도 대단합니다. 모래방지용 안경이 있으면 유용합니다. 썬크림도 요긴합니다.

일년에 두 달 가까이만 정상등반이 자유롭지만 그래도 후지산은 사람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분화구 주변에 사람과 단체 이름을 거대한 돌로 새겨놓기도 하고. 곳곳에는 중장비가 보수공사를 하고. 쓰레기나 인분 등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 상처는 도처에 흔합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 해도, 쓰레기-환경문제가 걸림돌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무박2일의 산행은 상당한 무리가 따릅니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됩니다. 어르신들이나 아이들까지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후지산에 오르고 싶으시면 준비 철저히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taein@seoul.co.kr

경이적 시청률, 후유 소나타(겨울연가)
200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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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류열풍의 선봉, ‘후유 소나타’(겨울연가)가 2004년 초~중반 일본열도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뒤 지난 8월21일 종영됐습니다. 심야 장기프로그램으로서는 경이적인 20%대 시청률 기록을 남기고 일본에서만 두 번째 방송이 끝난 것입니다.

지난해 NHK위성1에서 방영된 뒤 일본 시청자들의 요청이 빗발쳐 올 4월 주연 ‘욘사마’ 배용준씨의 일본방문에 맞추어 NHK종합방송(지상파)이 재방송을 시작, 20회분을 마친 것입니다. 연말에는 위성2에서 무삭제본(지상파에서는 5~10분정도 줄여 일본어 더빙으로 방송됨) 방송이 기정사실로 된 상태입니다.

겨울연가는 일반적 한류와는 뭔가 다른 ‘겨울연가’만의 고유한 위상을 확보한 것 같습니다.지난주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임원과 인터뷰를 할 때 그는 “내 아내도 후유소나타에 완전히 몰입해 있습니다. 한국서 배용준씨의 인기가 어떤 정도인지도 압니다. 일본에서는 주로 아줌마 부대들에게 인기죠.”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도쿄 신주쿠 한국인 상점 밀집 지역에 있는 한국서적 전문 서점 '코리아프라자'에서 배용준 관련 잡지들을 보는데 여념이 없는 일본 여성들.

도쿄 도심 신주쿠의 한국서적 전문 서점인 코리아프라자에는 겨울연가 DVD가 고가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겨울연가나 ‘욘사마’ 특집 DVD를 시청하는 일본인들이 넘칩니다. 배용준씨 사진집 등은 최고인기지요. 겨울연가가 끝났지만 주변 한국 가게들은 손님들에게 배용준 관련 상품을 선물하거나 판매에 열을 올립니다. 서점 근처 한 가게 주인은 “전국에서 일본 여성들이 서점으로 몰려듭니다. 혹시나 해서 배용준씨 관련 열쇠고리나 손수건 등을 팔아 보았는데 너무 잘 팔립니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방송은 끝났지만 이처럼 겨울연가 열풍은 당분간 이어질 것 같습니다. 방영이 끝난 뒤 28일 저녁 도쿄 시부야 NHK홀에서 열린 ‘후유소나타 그랜드 휘날레’ 공개녹화방송에는 3000명의 겨울연가 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무려 10만 명의 응모자 가운데 참석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지요. 이날은 명장면과 각본자, 감독 등의 겨울연가 탄생비화가 소개되고, 드라마와 관련된 퀴즈도 진행됐습니다.

NHK는 이 공개녹화를 “겨울연가에 감동한 시청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했다고 합니다. 방송은 9월 11일이지요.

3000여명의 ‘아줌마부대’ NHK에 항의도

이런 겨울연가의 인기는 시청률 조사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지난 8월21일 방영된 마지막회 시청률은 20.6%(간토지방 비디오리서치 조사)를 기록했습니다. 밤11시10분에 방송됐는데도 시청률이 이 정도이니 경이적이라고 평가됐습니다. 대개 심야프로는 두자리수만 기록해도 대단하다고 평가되고, 15%를 넘어서면 파격적이라고 합니다.

당일 순간최고시청률은 무려 23.2%였다고 합니다. 오사카 등 간사이 지방은 도쿄 등 간토지방보다 후유소나타의 평소 시청률이 2~3%정도씩 높았다니 당일 종합 시청률은 짐작이 갑니다. 20회 평균시청률도 14.4%였습니다.

NHK조차 ‘경이적이다.’라고 평가할 정도입니다. 지상파로서는 첫 방송이라고 하지만, 이미 위성1에서 지난해 4월부터 12월까지 한 차례 방영했기 때문에 사실상 재방송이지요. 위성방송과 지상파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오히려 시청률이 높아진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합니다.

시청률은 줄곧 상승추세였습니다. 4월3일 첫회가 9.2%였고 10일 10.9%, 17일 11.4%, 24일 12.3%였으나 5월1일은 9.2%로 주춤했습니다. 이어 8일 13.6%, 15일 12.6%였습니다. 22일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2차 북-일정상회담 후속일정 때문에 방영을 안 하자 새벽까지 3000여명의 아줌마부대가 NHK에 항의했을 정도입니다.

항의 내용이 언론에 전해지면서 시청률은 더욱 올라갔습니다. 5월29일에는 처음으로 15.0%에 달했고 6월5일 14.8%, 12일 15.7%, 19일 17.6%, 26일 17.1%였고 한여름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휴가철인 7월 들어서는 16% 전후였습니다. 8월들어서도 7일엔 16.5%, 14일엔 10.0%였습니다. 14일은 올림픽 중계 영향으로 다음날 새벽2시에 방송한 점을 들면 대단한 시청률인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이런 놀라운 시청률 때문에 이달 16~22일 일본내 TV주간시청률에서도 겨울연가는 21일 방송분이 전체에서 7위를 기록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NHK의 유도결승 남자 100키로그램급 등이 31.0%로 1위였고, NHK 저녁이나 아침뉴스 등 나머지 6위까지가 25~21%였으니 겨울연가 시청률이 어느 정도 높았던 것인지 짐작이 갑니다. 같은 시기 일본의 최고 인기 프로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시청률이 4.2%인 적도 있었습니다.

양국관계 파급효과 ·전망에는 엇갈린 분석

이처럼 후유소나타의 시청률이 높았던 것에 대해 일본언론들은 지난 4월 주연 배용준씨가 일본을 직접 방문, ‘욘사마’ 열풍을 일으킨 것이 촉매제였다고 분석합니다. 이른바 욘사마붐이 일어나면서 당초 40~60대 아줌마 부대가 주를 이루던 시청자층이 초등학생에서 90대까지 확대돼 방송사에 30000건의 전화나 이메일이 쇄도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이 왜 이렇게 겨울연가에 빠져들었을까요? 일본인 아줌마들은 “일본에서는 느끼기 힘든 인정이 느껴진다.” “내가 20~30년 전 경험했던 순수한 사랑의 감동을 전해준다.” “주인공 욘사마의 연기를 보면 너무 편하다.”고 말합니다.

제가 인터뷰했던 일본내 교수들도 큰 틀에서는 비슷한 분석을 했습니다. 다만 재일교포인 김양기 교수(도코하가쿠엔대학·철학), 일본인 오구라 기조 도카이대 조교수(한국철학)의 양국관계 파급효과와 전망에 대한 분석에서는 차이가 약간 있었습니다. 김 교수는 신중했지만 오구라 교수는 “양국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특히 오구라 교수는 겨울연가붐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한-일관계 개선의 중요한 매개체가 될 것으로 분석하면서 1998년부터 일본에서 일기 시작한 ‘한국배우기 바람’이 겨울연가 열풍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습니다.

아울러 두 교수는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나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등 양국간 과거사 문제가 앞으로 겨울연가 붐이 지속될지 여부에 중대한 고비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그 고비를 김 교수는 올 10월로, 오구라 교수는 내년으로 봤지요.

그런데 두 교수의 우려대로 일본에서는 지금 과거사 문제로 주변국과의 충돌조짐이 보이는 등 심상치가 않습니다. 자칫 겨울연가 열풍을 말하는 것이 한가롭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 도쿄도교육위원회가 며칠 전 공립 중-고일관교에 한국과 중국측의 반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극우적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를 채택했습니다.

일본정부의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패전 60주년이고 한-일 수교 40주년인 내년에는 동해 표기 문제나 독도 영유권 문제에 적극 대처하겠다고 합니다. 중국과도 대륙붕 문제를 짚고 넘어가겠다고 하고, 러시아와는 사할린 등 북방 4개섬 영유권 문제를 따져보겠다는 기류를 보이는 등 주변국 전체와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입니다. 만약 분위기 타진에 끝나지 않고, 실행에 옮겨지면 동북아 전체가 또 소용돌이에 빠져들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겨울연가 돌풍이 한-일간 과거사 문제라는 돌발변수를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taein@seoul.co.kr

신들의 나라 일본, 그들의 종교생활
200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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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신(神)들의 나라 일본. 영웅이나 동물, 심지어 식물까지 온갖 신들이 모셔진 신사(神社)와 그 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는 국민적 종교로서의 신토(神道). 다신교인 일본인들에 익숙한 신사는 일본인 생활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사는 도심에도 있고, 후지산 정상에도 있고, 바다에도 있습니다.

그런 일본이지만 속담 중에는 ‘내 집 부처는 거룩하다’ ‘절에 어울리지 않는 북’ 등 유별나게 불교와 관련된 게 많습니다. 6세기에 한반도에서 전래된 불교도 주요 종교로서 일본인들의 생활속에 그만큼 깊숙이 자리했었다는 반증이지요. 실제 도심 주택가에도 절이 많습니다. 반면 교회의 십자가나 성당건물 등은 일본에서는 찾아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도쿄시내 한 복판에 있는 '야스쿠니신사' 입구의 위압적인 모습.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도 일본이 신토와 불교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통계로도 이런 사실은 그대로 뒷받침됩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2004년 펴낸 ‘문부과학통계요람’에 따르면 각 종교별 신자수는 신토계가 1억777만8194명입니다. 그 다음으로 불교계가 9555만5343명, 기독교계가 191만7070명, 기타 종교가 1071만3248명 등입니다.(2002년 12월31일 기준)

이처럼 모든 종교의 신도수를 합하게 되면 무려 2억1596만3855명입니다. 일본 인구가 2004년 8월 현재 1억2758만명(총무성 통계국 잠정치)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종교의 신도수가 인구의 두 배 가까이나 된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는 일본인들 상당수가 중복된 종교생활을 한다는 의미지요. 즉 신토를 믿는 사람은 다수가 불교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태어날 때는 신토식의 의식을 치르고 결혼 때는 기독교나 신토, 불교식 등으로 갈리지만 죽어서는 대부분 불교식 장례를 치른답니다.

실제 생활을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일본인들 다수는 각기 다른 신을 모신 신사에 가서 절을 하고, 복을 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사와 절이 함께 있을 때는 신사와 절에 참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종교를 배척하거나, 선을 긋는 성향이 약한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과 가족, 지역사회나 국가의 복을 비는 ‘기복신앙’적 성격이 강합니다.

유일신 믿는 성향 약해 기독교 약세

종교생활도 그리 엄격해 보이지 않습니다. 종교생활은 하면서도 계율이 엄격한 신앙생활은 별로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집에 신단과 불단을 함께 갖추었었지만 점차 줄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지방에서는 집 입구 등에 신단을 차려놓은 집이 많지만 도쿄 등 대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종교활동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특히 일본인들은 기독교처럼 주일을 정해 절이나 신사를 찾는 식의 규칙적인 종교생활을 하는 비율이 낮습니다. 편리할 때 집근처 절이나 신사에 가서 복을 빌거나, 여행지의 신사나 절을 찾는 식이지요. 물론 일부 신흥불교 등은 일요일 정기법회를 하고 있습니다만.

종합적으로 일본인들은 절대신, 유일신을 믿는 성향은 극히 약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계가 약세라고 합니다. 서구인이나 한국인이 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절에 가서 부처에게 기도할 때나 혹은 신사의 신에게 기원할 때도 그 신사의 신이 무슨 신이며 또한 부처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소원을 비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종교관 자체가 매우 실용주의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도로 등록해 놓고 절에도 다니기도 한답니다. 이슬람 신도가 신사에 가기도 하는 식이지요.

앞에서도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신사나 절은 수적인 면에서도 압도적입니다. 신사가 8만1222개이고, 절이 7만7083개입니다. 이에 비해 기독교계 교회는 6958개지요. 이러니 일본을 다니다보면 신사나 절은 잘 보이지만 교회는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신도수를 보유한 신토는 역사도 가장 길지요. 일본의 고유 민족신앙으로, 조상이나 자연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입니다. 일본인의 실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신사가 있는가 하면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야스쿠니신사는 메이지유신 이후 전몰자들의 위패 등이 안치돼 있습니다.

승려 대부분 결혼...가업으로 이어져

특히 일본인 생활속의 신토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에 일왕(천황)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 종교가 되고, 신사는 정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국가와 종교의 일체화가 이루어졌고, 특히 1930년대 이후에는 ’국가신토‘가 널리 보급됩니다. 신토가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토대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 같은 분위기에 따라 에도시대에 막부의 도움을 받아 크게 융성했던 불교는 이 시기에 긴 침체기에 들어갑니다. 전후에 세력이 크게 회복되고, 1000만명이 넘는 신흥불교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현대의 대부분 불교는 평소 일본인들의 실생활과는 밀접하지는 않답니다. 다만 장례의식만큼은 불교식이 압도적으로 많아 ‘장례식 불교’란 용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일본 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대부분 승려가 결혼한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가업잇기 전통에 따라 승려도 가업으로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일본불교의 승려들은 가혹한 수행을 거치며 학문수준도 높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승려의 아들 중에는 여러 이유로 대학교수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앞길이 창창한 교수가 소리소문 없이 승려직을 잇기 위해 사직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일본의 종교사에서 1945년 2차대전에서의 패전은 대전환의 계기였습니다. 일왕을 신의 존재로까지 떠받들었던, 그리고 신토로 단결했던 일본에서 일왕이 1946년 1월1일 이른바 '천황의 인간선언‘을 통해 인간으로 내려오고,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국가신토는 해체됩니다. 일왕은 정치상 권한이 없어졌고, 일왕의 제사도 사적인 행사로 되면서 일왕의 축제일이 없어지고, 국민의 축일이 제정됩니다.

이른바 일왕의 인간선언은 그 때까지 ‘천황’을 신으로 믿고, ‘천황’에 충성하는 것이 이른바 신하된 백성의 의무이고 영광이라고 교육받아온 일본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고도 합니다. 전쟁 때 종교를 통제하기 위해 제정됐던 종교단체법은 폐지되고, 새로운 종교법인령이 공포됩니다.

종교단체는 신청서를 제출하면, 쉽게 종교법인으로 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근거에 따라 민간의 종교단체로서 신사본청이 설립됩니다. 신사본청은 이세신궁을 본종으로 해 전국 신사의 대부분인 7만8000여사를 조직했고, 당시의 나머지 약 1000여개는 다른 종교법인을 만듭니다.

1947년에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로서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무조건 보장하고, 이에 기초해서 엄격한 정교분리를 규정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어떤 종교단체도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거나 정치상의 권력행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종교행사 참여에 강요받지 않게도 됩니다. 국가 관련기관은 종교교육이나 종교활동도 할 수 없게 되지요.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오늘의 일본 종교활동의 기초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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