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일본 특파원 3

鶴山 徐 仁 2007. 3. 24. 17:44
일본, 지역감정은 없는가
2004-09-20
19416

일본은 홋카이도, 혼슈(본토란 의미), 시고쿠, 규슈 등 크게 4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멀리 남서쪽에는 18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독립국 류큐왕국이었던 오키나와가 있지요. 총면적은 남한보다 대략 4배 정도 넓고, 인구도 1억2000만이 넘습니다.

이렇게 넓다보니 근세이후 크게 동쪽과 서쪽 지역간의 지역감정이란 게 있었다고 합니다. 원주민이 있는 홋카이도나 오키나와의 특수한 지역정서를 제외하면 바로 간토(관동)와 간사이(관서) 간의 지역감정이랄까, 지역색이 두드러졌지요.

지역감정이나 지역색깔은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지극히 엷어지긴 했지만, 특히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일은 없다고 하지만 아직도 생활과 문화 속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증언입니다.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동-서간 지역감정은 크게 세 번의 고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1600년 일본이 통일되기 전 동군과 서군이 총력전을 펼쳤던 세키가하라전투이고, 두 번째는 1868년의 메이지 유신입니다. 그리고 1945년 일본패전이 마지막 고비입니다.

세키가하라전투는 1600년 9월 혼슈의 중간지점인 기후현의 세키가하라에서 있었던 전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이 격돌한 전투입니다. 전 일본의 다이묘들이 갈라져 격돌했다는 점에서 근대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전투로 꼽히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간토와 간사이, 혹은 동일본과 서일본의 기준점이라고 하는 일본 최고봉인 후지산, 그 후지산중에서도 단연 최고봉인 해발 3776미터인 검봉에 자리잡은 기상관측소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은 161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추종세력들을 마지막으로 제압하고, 일본을 완전히 통일합니다. 그 때 승리한 동군진영은 메이지유신까지 일본 역사의 중심이 되고, 패한 서군 소속의 인사들은 하급무사로 전락, 대부분 서쪽지역 변방으로 밀려 비주류세력으로서 30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이처럼 세키가하라전투에서 패한 사람들의 후손으로 대부분 서일본에서 한을 품고 자라온 세력들이‘에도바쿠후 타도’를 외치며 메이지유신의 주체가 됩니다. 바쿠후(막부의 일본발음) 타도와 유신운동의 주체는 사쓰마, 조슈, 도사 세 지역 출신의 하급무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근대국가 실현 열망도 컸지만 근저에는 신분차별, 지역차별에 대한 깊은 한도 서려있었다는 증언도 많습니다.

근·현대사 동-서 지역감정 세 번의 고비

메이지유신 주역들은 이후 수도를 도쿄로 천도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 정치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이들 세 지역 출신들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된 초대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선두로 정계의 요직을 차지합니다.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사쓰마번(가고시마현), 도사번(고치현) 출신들은 내각의 요직을 패전 때까지 주름잡습니다. 그 후광은 70년대까지도 작용했다고 합니다. 역대총리 56명 중 12명이 이 세 현 출신이니 대단한 것이지요. 참고로 일본의 47개나 되는 도(都)-도(道)-부-현 중 총리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곳이 20곳이 넘습니다.

이처럼 일본 역사, 정치세력의 큰 중심이 동-서 세력간 두 번에 걸쳐 요동친 뒤인 패전 후에는 승전국 미국의 필요 등으로 인해 동서간 인재의 불균형 현상은 크게 해소됩니다. 전후에는 간토지역의 정치경제적 성장이 두드러져 간토와 간사이는 특히 경제적으로 큰 온도차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10년이란 거품붕괴 후 2004년 들어 간토지역은 경제가 상당한 회복세를 보이며 다소 흥청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불황의 최대 피해지역이라는 간사이 지역은 썰렁합니다. 실업률도 높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간사이를 대표하는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가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를 대표하는, 막강한 경제력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제치고 파죽지세로 우승했을 때 간사이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간토지방과 간사이지방간의 대결이라는 지역감정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 많았었지요. 주류와 비주류간의 대결이었다는 해석도 있었고, 간사이로 표현되는‘약자들의 반란’이라서 열광했다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간토, 간사이 하는데 과연 지리적인 분리 기준점은 어디일까요. 설이 무척 많습니다. 후지산이 간토와 간사이의 기준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에도 바쿠후가 설치했던 하코네의 세키(關)가 기준이란 설도 있지요. 아울러 400년 전 세키가하라전투가 벌어졌던 기후현의 세키가하라가 기준이란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간토와 간사이를 가르는 명백한 지리적 기준점은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간토라는 말은 1923년 간토대지진 때의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로 인해 익숙하고, 간사이는 94년 개항한 오사카 간사이공항으로 인해 낯설지 않습니다.

간토와 간사이라고 하면 관문이란 뜻을 갖는 세키(關)의 동쪽이나 서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키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최초의 세키는 700년대 말 나라시대나 이후 교토로 천도한 뒤 중앙정부가 세운 관문이었습니다. 그 동쪽이 간토이지요.

간사이 중심지 역할·간토는 '야만의 땅‘

그런데 그 세키라는 것이 과거에는 교토와 아이치현의 중간 지점인 시가현 오우미하치만시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에도 바쿠후가 생기면서 하코네에 검문소격인 세키를 설치했고, 지금도 하코네에 가면 후지산 분화로 생긴 거대한‘아시노 호수’변에 세키의 유적이 복원돼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간사이나 간토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고 합니다. 간사이 지방 사람들의 우월의식이 스며있는 말이라나요. 즉 간사이는 정치나 경제, 문화의 중심지역 역할을 해왔지만 간토지방은 ‘야만의 땅’혹은 최근 들어선 ‘촌놈들의 땅’이란 다소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사이란 말은 별로 사용되지 않은 채 간토라는 단어를 다소 무시하는 투로 구사했고, 간사이 지역은‘천황’정권이 있는, 문명도가 높은 지역이란 자존심을 담아‘긴키’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기(幾)는 도읍이란 뜻이 있습니다. 현재 긴키는 교토,오사카부, 시가, 미에, 나라, 와카야마, 효고현 등지를 가리킵니다.

이런 긴키를 간사이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 데는 간사이가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변방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의미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결국 간사이나 간토라는 지리적 경계는 명확한 것이 없고, 문화적 경계구분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간사이와 간토의 지리적 경계는 모호하지만‘서일본’과‘동일본’의 지리적 경계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즉 중부 아이치현과 미에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베다강’이라고 합니다. 이 강은 아주 강폭이 좁지만 이를 경계로 양 쪽 강안지역의 언어 억양이 명확히 다를 정도라고 합니다. 서쪽은 오사카말, 동쪽은 나고야말이라고 합니다. 이 강을 동-서로 해서 많은 한자를 읽는 방법이나 억양 등이 크게 달라져 서일본말, 동일본말이 됩니다.

그리고 간토 사람과 간사이 사람은 음식이나 언어, 생활습관에서 여전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간사이인과 간토인, 오사카와 도쿄사람의 문화적 차이점은 다음 회에 전해드리겠습니다.

taein@seoul.co.kr

마누라와 애인의 차이
2004-09-29
31481

얼마 전에 미국의 NFL(프로 풋볼*미식축구) 시즌이 시작됐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풋볼과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 네 종목이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입니다.

4대 스포츠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종목은 무엇일까요? 미국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야구라고도 하고, 풋볼이라고도 하는데 객관적으로 보기에 미국인들은 풋볼에 훨씬 더 열광합니다. 우선 야구는 ESPN 등 스포츠 전문채널과 지역방송에서 주로 중계하지만, 풋볼은 CBS, NBC, ABC 등 전국 네트워크 TV에서도 자주 중계합니다.


프로야구경기
사진 스포츠서울 이주상특파원 rainbow@sportsseoul.com

제 생각에는 야구와 풋볼의 차이는 마누라 (혹은 남편) 와 애인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우선 야구는 시즌이 시작되면 거의 매일 합니다. 부부가 결혼하면 매일 함께 지내는 것처럼요. 이에 비해 풋볼은 주말에만 합니다. 한 팀이 일주일에 한 게임만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보통 애인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만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더 설레고요.

미국인, 야구보다는 풋볼에 더 열광

또 야구는 역사가 오래된 종목입니다. 월드시리즈가 100년이 넘었으니까요. 이에 비해 풋볼의 최고 타이틀인 수퍼볼은 올해가 38회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부의 역사가 애인간의 관계보다는 길겠죠.

야구는 날마다 경기를 하다보니까 큰 전략의 변화가 없는 데 비해, 풋볼은 일주일에 한번 경기를 하니까, 별의 별 전략을 다 짜놓고 합니다. 마치 애인과 데이트 하러 나가기 전에 갖은 경우의 수 별로 시나리오를 짜놓는 일부 완벽주의자들처럼요.

또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 포함되는 등 공인된 스포츠인데 비해서, 풋볼은 미국인들만의 스포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부가 애인보다는 훨씬 공인된 관계라고 할 수 있죠.

야구는 이따금씩 파업을 합니다. 부부 사이에 이따금씩 냉전이 벌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1972년과 1984년, 그리고 1994~1995년에 세 차례 큰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마다 야구팬들은 ‘당신들 진짜로 파업하면 우리 풋볼장으로 간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파업이 장기화되자 많은 팬들이 풋볼로 옮겨갔습니다. 세 번의 파업이 야구와 미식축구의 인기를 뒤집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부부 사이도 세 번씩 냉전을 벌이고, 별거를 하게 되면 그 후유증이 엄청나지 않겠습니까?


풋볼경기
EPA제공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요인 가운데 풋볼은 일주일에 한번, 야구는 매일 경기하는 것과 관련해서, 미국의 기업인들은 풋볼은 마케팅에, 야구는 세일즈에 비교합니다.

수퍼스타 등장 따라 인기부침 심해

세일즈는 매일매일 팔아서 실적을 올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단기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죠. 야구도 하루하루 경기를 이겨야 하니까 장기적으로 팀을 운영하기 힘듭니다. 반면에 마케팅의 목적은 장기적인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주일 내내 전략을 짜서 주말에 한번 시행해보는 풋볼과 비슷하다는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보통 마케팅 하는 사람들이 세일즈 하는 사람들보다 똑똑한 편입니다. 폼도 더 잡고요. 그런데 기업이 어려워져서 둘 중의 한 부서를 없앨 경우에는 백이면 백 마케팅을 없앱니다. 이유는 잘 아시겠죠. 하루하루 물건이 안 팔리면 장기적 전략이고 뭐고 필요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에게 야구와 풋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쉽게 풋볼을 선택하지 못할 거라고 합니다.

4대 스포츠 가운데 농구는 친구에, 아이스하키는 돈 많은 친척에 비유하곤 합니다. 농구는 쉽게 아무데서나 할 수 있고, 아이스하키는 워낙 가격이 비싸서 보고 싶어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의 인기는 수퍼스타의 등장에 따라 변화하곤 합니다. 마이클 조던이 코트를 평정하던 시기에는 농구가, 웨인 그레츠키가 활약하던 시기에는 아이스하키의 인기가 크게 올랐습니다. 타이거 우즈가 등장하면서 골프 열풍이 분 것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리, 같은 일본 사람 맞아?
2004-09-30
15279

“우리가 같은 일본 사람 맞아?” 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일본 간사이-간토 사람들이 상대방과 문화적 차이의 정도를 말할 때 가끔 사용하는 말이지요. 그만큼 같은 일본 사람이지만 간사이 사람과 간토 사람의 언어를 중심으로 한 기질적, 문화적인 차이가 크다는 얘기겠지요.

이처럼 간사이, 간토 두 지역 사람의 차이가 나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거론됩니다. 그 중에서도 자연환경이 다르다는 게 중요하게 꼽힙니다. 간사이지방은 아열대성 기후에, 상대적으로 구(오래된)화산암 지대여서 화강암으로 된 부드러운 산들도 제법 많다고 합니다. 반면 온대지역인(상대적으로) 간토지방은 신화산암석의 거친 산, 특히 3000미터 이상의 고봉준령이 많습니다.

강력한 지진대는 간토지방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난 1995년 1월 고베 대지진이 있기 전까지 간사이지방, 서일본지방은 비교적 큰 지진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으로 인식됐습니다. 반면 간토지방은 1923년의 간토대지진을 비롯, 큰 지진피해의 중심지였습니다. 올여름은 물론 근년에도 간토지방서 비교적 큰 지진이 많았습니다. 두 지역의 식생(식물의 분포)도 크게 다릅니다. 강의 모양새나 평야의 크기도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강제 개국시킬 때 하코다테와 함께 개항된 일본 중부지방 시즈오카현 시모다항 전경. 당시 흑선(검은 증기선)의 위력에 전율을 느낀 조슈, 사쓰마, 도사 세 번의 무사들이 위기의식으로 무장, 이후 메이지유신을 일으켜 일본 지역감정이 다시 요동치게 된다.

이런 자연환경의 차이가 두 지방 사람의 성격차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일본 문화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해석입니다.

‘한류열풍’만 해도 간사이와 간토의 차이는 눈에 띌 정도입니다. 즉 ‘겨울연가’의 경우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지방의 시청률이 매 회 간토지방 보다 2~3%포인트 높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간사이 사람이 한국 사람의 정서(겨울연가적인 우정과 직설적 감정표현)와 조금 더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간사이 사람들은 이 같은 시각을 거부합니다.

올 여름 있었던 한 방송국의 몇 가지 실험은 간사이를 대표하는 오사카 사람과 간토를 대표하는 도쿄사람이 얼마나 다른지 잘 보여줍니다. 방송국 제작팀은 첫 번째로 길거리에서 휴대용 휴지를 공짜로 가져가도록 하는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자연환경이 두 지방의 성격차이 형성

제작팀이 휴지를 공짜로 가져가도록 길거리에 놓아두었지만 도쿄사람들은 슬슬 눈치를 살피며 1시간이 지나가도 거의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반면 오사카 사람들은 여러 개를 한꺼번에 가져가거나, 가방에 담아가기도 해 10여분만에 휴지가 동나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길가는 사람에게 10엔짜리 동전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교통비가 없어서’라는 등이지요. 이 실험에서 도쿄사람들은 대부분 외면해버렸습니다. 반면 오사카 사람들은 “10엔으로 되겠느냐”며 100엔을 주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적극 도와주었습니다. 결국 1시간 동안 도쿄에서는 90엔을 모았으나, 오사카에서는 850엔을 얻었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났습니다.

세 번째는 제작팀이 어린이들에게 입으로 ‘빵’ 소리를 내며 권총을 쏘는 듯한 동작을 해보이며 반응을 살핀 것이었지요. 실험에서 도쿄 아이들은 ‘빵’ 소리에 대부분 쳐다보지도 않고, ‘웃기고 있네’라는 표정을 지으며 가버렸지만, 오사카 아이들은 “윽”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시늉을 하거나 함께 “빵” 소리를 내는 등 적극적으로 응해주었습니다. 도쿄아이는 50명중 2명만이 응했지만, 오사카 아이는 37명이나 응했지요.(정확한 수치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전문가의 분석도 흥미로웠습니다. 즉 400년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시대부터 도쿄에서는 무사들의 규범-질서사회 전통이 이어져 공식적이고, 엄격한 대인관계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잔재가 오늘까지도 남았다는 해석이었습니다.

반면 오사카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상인사회 중심이었기 때문에 서민적이고, 인정 많은 전통이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도쿄 사람은 겉치레를 뜻하는 일본어 다테마에로 주로 사람을 대하고, 오사카 사람들은 속마음을 뜻하는 일본말인 혼네를 상대적으로 잘 드러낸다는 분석도 덧붙였습니다.

두 지역의 기질 차이는 실험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발견됩니다. 불과 130여 년 전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변신하기 전까지 무려 300여개 번으로 나뉘어 있던 지방분권 전통과도 뿌리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역별 독특한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것이지요. 이미 1300여 년 전에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전통이 이어져온 우리나라에서도 지역색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대비가 가능합니다.

교통・통신의 발달로 차이 갈수록 줄어

실제로 두 지역간 언어차이는 대단해 일본인들은 아직도 “음식점에서 간사이지역 사람끼리 모여 얘기를 나누면 이를 간토사람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많은 게 현실”이라고 합니다. 10년간 직장 때문에 오사카에서 살았던 60대 후반의 전직 회사원은 "도쿄와 오사카 사람과 문화의 차이는 상상외로 대단하다.”고 합니다.

생활상의 차이는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우선 도쿄는 에스컬레이터 추월선이 오른쪽이지만 오사카는 반대입니다. 도쿄사람들은 지하철에서 탄 사람이 다 내리면 타지만, 오사카 사람들은 내리기도 전에 전차에 올라 무질서해보입니다. 휴대전화 통화도 오사카 사람들은 지하철안에서 큰 소리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도쿄 사람들은 비교적 덜한 편입니다. 수다를 떠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물론 차이가 줄고 있긴 하지만요

일본의 거품경제 붕괴가 시작된 1990년대 은행이나 증권사들의 파산이 줄을 이을 때 양 지역 예금주들의 차이도 놀라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두 지역 다 창구로 예금자들이 몰려간 것은 인지상정이었지요. 그러나 그 후 간토지방 사람들은 “예금지급은 보장되어 있습니다.”라는 창구직원의 말을 듣고는 그대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하지만 정열적이고, 감정표현이 직설적인 간사이 사람들은 달랐다고 합니다. 몰려드는 고객에게 직원이 “줄을 서주세요.”라고 말하면 “줄을 서라는 게 다 뭐야 지금. 너희는 조아리고 있어야지.”라며 거세게 화를 내거나 욕설을 퍼부으며 흥분했다고 합니다. 당장 예금을 돌려달라며 다음날 아침까지 농성하는 예금주도 있었다지요.

이밖에 음식문화 차도 뚜렷합니다. 간토지역이 돼지고기를 좋아하고, 간사이 사람은 쇠고기를 좋아합니다. 간토사람은 또 청주를 좋아하지만 간사이 사람은 소주를 좋아합니다. 간사이 사람은 식초를 좋아하고, 간토 사람들은 청국장과 비슷한 낫도를 좋아하지요. 간편한 벤토(도시락)나 냉동식품은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는 간사이 사람이 더 즐긴다고 합니다.

간사이와 간토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용하는 전기의 주파수가 달랐고, 집세를 내는 방법도 다르지요. 간토지방은 보증금조의 시키킹이 월세의 2개월분 정도, 전후 주택난의 영향으로 집주인에게 고맙다면서 내는 사례금이 2개월분 정도이고 중개료가 따로 있지만 간사이는 야반도주 등을 우려, 보증금조로 10개월분 정도를 요구하는 등의 차이가 있습니다. 옷 입는 것이나 오락, 목욕문화도 상상외로 차이가 크다고 합니다.

물론 텔레비전 보급과 교통, 통신수단의 발달 등의 영향으로 전반적인 두 지역의 차이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taein@seoul.co.kr

일본열도가 떨고 있다
200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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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일본열도. 자연재해 부문에서 대단한 한 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강력한 지진이 잇달아 일어났고, 잠잠하던 도쿄인근 화산도 폭발했습니다.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운 여름으로 기록됐고, 태풍도 가장 많이 상륙한 한 해였지요.

초대형 자연재해가 꼬리를 문 것이지요. 자연재해에 비교적 이골이 난 일본인들이지만 “은근히 떨고 있다.”는 말도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실제 화산폭발 지역 인근 초등학생 중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나타날 정도라니까요.

세계 도처의 자연재해도 심상치 않게 받아들이는 모양입니다. 미국 워싱턴주에서, 멕시코에서 화산이 폭발하고 미국 항공우주국이 10월5일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초대형지진이 10년 내에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당연히 세계적인 지진대, 화산대인 일본열도의 긴장도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활화산인 후지산 정상에서 본 환상적인 일출

일본인들은 좀처럼 내색을 하지 않지만 지난 여름 도쿄가 39.5도라는 사상 최고기온을 기록하는 등 가마솥더위가 맹위를 떨치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던 1923년에도 여름 더위가 맹위를 떨쳤다며, 올해 안에 대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주간지보도가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지진의 80년 주기설, 150년 주기설을 들며 “올해가 바로 그 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지난 8월부터 대지진설이 끊이지 않자 일본 정부 지진조사위원회는 8월말 도쿄 아래쪽 사가미 해구 지진대에서 향후 30년 이내에 리히터 규모(M) 8급의 강력한 간토대지진 형태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은 0~0.8%로 사실상 제로라고 발표했습니다.

이 지진대는 육지의 플레이트(지각판)아래에 필리핀바다 플레이트가 밀쳐들어 플레이트 경계가 파괴되면서 1923년의 간토대지진(M7.9)이나 1703년의 겐로쿠대지진(M8.1) 등 거대 지진이 반복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진조사위원회는 14만 명이 숨진 간토대지진형태의 지진은 200~400년 간격으로 일어난다고 판단하고, 겐로쿠지진과 같이 대단히 큰 지진은 2300년 간격으로 추정, 이 같은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올들어 강력한 지진·화산 폭발등 잇따라

이런 가운데 9월5일 미에현을 중심으로 한 일본 서부지역에 리히터 규모 6.9와 7.4의 강력한 지진(진도 5도가량)이 잇달아 발생하고, 며칠 뒤 또 한 차례 강력한 지진이 인근 지역서 발생하면서 대지진 공포는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 온천은 지진의 영향으로 투명해지던 물이 유백색으로 돌아가는 등 그 위력을 실감하게 합니다.

그 후에도 대형 지진에 대한 경고는 잇달고 있습니다. 일부 지진고고학자는 일본의 지진대인 도카이와 난카이 지진이 동시에 일어나는 대지진의 날이 멀지 않았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피해가 큰 직하형 지진경고가 많습니다. 도카이 지진은 주기가 150년인데 1854년 발생한 적이 있기 때문에 150년이 되는 올해가 위험하다고도 합니다.

후지화산대인 이즈반도의 평화로운 절경

그래서인지 어느 때보다 지진 방재교육은 더욱 실감이 납니다. 직장이나 학교가 중심이 돼 교육이 반복됩니다. 물론 불필요한 불안증폭을 우려, 호들갑을 떨지는 않습니다.

에어컨이나 액자 등은 벽에 단단히 고정하고, 텔레비전 등 가구도 지진 때 흉기로 변하지 않도록 고정시킵니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거나, 집을 빠져나갈 때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을 통해 이불이나 옷, 가방 등으로 머리를 가리고 피난하는 방법도 숙지시키지요. 비상식량이나 식수준비 권고는 기본입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가족들이 만날 장소를 미리 정해 놓으라는 조언도 들립니다.

9월 1일에는 군마현과 나가노현 경계상의 활화산 아사마산이 폭발했습니다. 수백t의 화산재가 날려 농작물이 훼손되고 한때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해발 2568m의 정상 분화구가 21년 만에 폭발했지요. 연이어 붉은 용암을 뿜어내고, 머리나 주먹 크기만한 돌이나 화산재가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9월29일에는 세 번째 중규모 폭발이 발생하는 등 한달이 넘었는데도 크고 작은 폭발이 가끔 있고, 올해 말까지 폭발이 이어질 수 있다며 긴장하고 있습니다. 화산성지진이 하루 1000번 이상 발생한 날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후지산의 화산활동 재개 염려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화산의 위력도 대단합니다. 지난달 중순까지 사발형으로 움푹 팬 분화구의 바닥에 높아지고 있던 마그마 돔은 지난달 29일까지의 분화로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직경 약 70미터, 깊이 약 40미터의 거대한 구멍이 새로 생겼습니다. 분화구 상공에는 유황냄새 가득한 가스연기가 최고 수키로미터까지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산정에서 분화구 바닥까지의 깊이는 약 190미터입니다. 중심부는 붉은 마그마의 열로 최고 온도가 517도까지 관측되었습니다.

태풍도 8개 상륙...엄청난 인명·재산피해

피해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화구에서 북동쪽으로 9킬로에 있는 군마현 나가노하라마치의 키타카루이자와 초등학교(학생 103명)에서는 저학년을 중심으로,“밤에 무서워 잘 수 없게 됐다.”“구토가 있다.”는 등의 증상을 호소하는 학생이 나오고 있습니다. 학교측은 학부모들에게 “아이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스킨십을 강화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화산재가 멀리 200키로미터까지 날아가 배추나 양배추 등 농작물피해도 수십억원입니다. 인근지역의 호텔 예약이 취소되고, 단풍관광도 꺼리는 등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일본에는 많은 활화산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 900여개의 활화산중 10% 이상이 일본에 있을 정도입니다. 일본화산분화예지연락회는 2003년 1월 활화산을 당시의 86개에서 108개로 늘렸습니다. 활화산의 정의는 그때까지 ‘현재 활발한 분화 활동이 있는 화산’및 ‘과거 2000년 이내에 분화(폭발)한 화산’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0000년 이내에 분화한 화산이 활화산’이란 국제기준을 채택, 활화산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일본의 활화산은 거의 동일본지역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일본 주요 활화산 57개 가운데 후지산과 다이세츠산 등 47개가 동일본(간토)에 위치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홋카이도가 13개로 제일 많지요. 도쿄 도내에도 4개의 활화산이 있지만, 도심지역이 아닌 수백키로미터 떨어진 이즈제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처럼 땅 속이나 땅위의 피해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지난달 말 태풍 21호가 열도를 횡단하면서 25명이상의 사망자를 내고, 엄청난 재산피해를 냈습니다. 앞서 태풍 18호도 지난 9월초 일본을 강타, 무려 40명 가까이 희생자를 내는 등 올해 들어서만 벌써 8개의 태풍이 상륙했습니다.

이는 역대 최고의 기록으로 앞으로도 몇 개의 태풍이 더 일본에 상륙할 수 있다는 예보가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재해 보험료 4조원 가량이 필요해진 손해보험사들도 울상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일본에 비하면 지진이나 화산, 태풍에서 비교적 피해를 덜 입는 우리나라가 “복받은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가끔씩 사라, 매미 등 강력한 태풍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때도 있지만요.

인간은 자연 앞에서 너무도 왜소한 존재인가 봅니다.

taein@seoul.co.kr

도쿄 산책-숭어 이야기
2004-10-18
10605

도쿄 시내에서도 번화하고, 특히 지난해 신칸센 시나가와역이 개통돼 화려해진 미나토구 해안지역에는 다카하마 운하가 있습니다. 폭은 평균 50m 정도이고, 수심은 족히 5m이상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닷물이 드나들어 조수간만의 차도 3m이상은 됩니다. 복잡하게 설계되어 다른 운하로 이어지기 때문에 길이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운하가 바로 도쿄의 명물입니다. 도심의 이 운하에서는 숭어와 야생오리떼, 가마우지 등 야생생물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가끔씩 섬뜩하게 큰 뱀도 출몰하고, 물이 새는 운하 벽쪽으로는 덩치가 작은 게들도 떼를 이루어 다닙니다. 게들은 사람이 가면 깜짝 놀라 도망칩니다.

그 중에서도 숭어가 단연 돋보입니다.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숭어는 썰물 때, 그것도 물이 중간정도 빠져 나갔을 때 많이 보입니다. 숭어들은 떼를 지어 다닙니다. 보통 10마리 안팎이지만 50마리정도의 무리도 있습니다. 때로는 수백마리씩 무리지어 다닐 때도 있지요. 특별히 수문부근에서는 수백마리가 몰려있습니다.

도쿄시내의 다카하마 운하


그것만이 아닙니다. 한여름 일주일 이상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수만, 수십만 마리의 크고 작은 숭어들이 운하를 온통 물 반 고기반의 형국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숭어들의 천국입니다. 숭어란 놈들은 철저히 큰 놈은 큰 놈끼리,작은 놈은 작은 놈끼리 무리를 짓습니다.

요코하마항 바다에서도 자연수족관처럼 많은 숭어들이 유영을 해 놀란 적이 있습니다. 특히 요코하마항에는 숭어만이 아니고 우럭 등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이 평화로웠습니다. 꽃게도 보이고. 이즈반도 남단의 시모다항에서도 거대한 숭어떼는 장관이었습니다. 도심 가까운 곳의 숭어떼는 정말 수수께끼입니다. 얌체 낚시꾼들의 몰래낚시도 눈에 띄지요.

운하 수문부근에 숭어떼 수백마리 장관

다시 다카하마 운하의 풍경으로 돌아갑니다. 운이 나쁘면, 만조 때나 날씨가 흐릴 때는 숭어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대신 다른 볼거리가 항상 준비돼 있습니다. 야생오리나, 잠수해 고기를 잡아먹는 게 주특기인 가마우지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철새인 야생오리가 먹이가 풍부한 이 곳에 텃새로 자리 잡고 새끼를 부화, 키우는 모습입니다. 10마리씩 거느리고 다니는 어미도 있고, 5~6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도 보입니다. 새끼부화는 늦은 봄부터 늦여름까지 이어집니다. 오리들은 주로 운하벽에 붙어있는 해조류를 먹는데, 어미오리의 모성애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보초를 서다가 사람이 접근하면 새끼들을 데리고 줄행랑칩니다.

오리들이 급할 때 헤엄치지 않고, 물위를 뛰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셨습니까. 가끔 TV에서 자연다큐멘터리를 방영할 때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새끼오리들이 일행에서 뒤쳐지거나 위험에 직면하면 놀라운 속도로 물위를 뛰어갑니다. 세계적인 도시 도쿄에서 보는 야생오리 무리는 색다른 느낌을 선사합니다.

이 운하는 배타기 훈련장이나 유람선의 이동로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가끔 해질녘이면 수십 명의 장정들이 우렁찬 구호에 맞추어 카누 등의 훈련을 합니다. 평화롭게 소형 유람선을 타고 식사를 즐기는 모습도 보입니다.

숭어에 대해 보충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숭어들의 세계에도 규칙이 있나 봅니다. 무리는 반드시 덩치가 비슷한 놈들끼리 이룹니다. 피라미처럼 적은 것에서부터 60센티미터 이상의 것까지 다양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큰 놈들은 주로 물밑 30센티미터 정도 아래서 유유히, 여유 있게 이동합니다.


다카하마 운하의 오리가족

30센티급의 중치들은 물 아래 20센티 정도에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특히 이 놈들은 만조 때면 물 위로 1미터 이상씩, 뛰어오르곤 합니다. 불끈 솟구쳐 오르는 모습에서는 힘과 경쾌함이 느껴집니다. 한번 뛰어오르면 2~3미터정도는 이동합니다. 어떤 놈들은 같은 방향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3~4번을 뛰어오릅니다.

피라미급들은 수면에서 재빠르게 움직입니다. 15센티급의 작은 녀석들은 물 아래 1센티 정도에서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정말 빠른 속도로 수십, 수백, 수천마리가 떼를 지어 이동하곤 하지요. 이 놈들도 물위로 뛰어오르는 경우가 잦은데 역시 작은 놈들인지라 10센티 안팎 뛰어오르는 정도에 그칩니다. 앙증맞지요.

해일 밀려오면 연안지역 피해 줄여줘

하지만 이 놈들이 집단으로 뛰어오를 때는 장관입니다. 가끔씩 수만마리의 작은 숭어들이 태양광을 받아 희게 번쩍거리며 일제히 물 밖으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면 약동하는 생명, 그 생명의 넘치는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난바다에 나가보면 바닷물이 날씨에 따라, 깊이에 따라, 시간에 따라 수많은 색깔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운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린 날 검푸른 것에서부터 맑은 날 거울처럼 투명한 색깔을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갯내음도 날씨에 따라 다릅니다. 바람이 정면으로 불거나 저기압일 때 냄새가 코를 찌르고, 특히 썰물 때 일부 바닥이 드러나면 더욱 강합니다. 낮고 두꺼운 구름이 잔뜩 끼었을 때, 습도가 높은 때는 그 갯내음이 상당히 멀리까지 퍼져 나갑니다.

그런데, 이 작은 운하는 일본인들이 어떻게 지진이나 화산폭발, 태풍에 대처하는 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도쿄만 해안에는 다카하마 외에도 게이힌 운하 등 많은 운하들이 거미줄처럼 정비되어 있습니다. 지진이나 해저 화산활동, 태풍 등으로 인해 거대한 해일이 순식간에 몰려올 때 해일에너지를 흡수해 연안지역의 피해를 줄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운하가 평소에는 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처로 활용되는 것이지요. 숭어떼가 유영을 하고, 오리떼가 가족 단위로 먹이를 찾고, 가마우지가 부지런히 잠수하며 물고기를 잡아먹는 풍경은 살아있는 자연생태학습장, 그 자체지요.

지진과 화산, 태풍이라는 무시무시한 자연재해가 일본인들에게는 선물 아닌 선물도 주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죽느냐, 사느냐의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해 기상학, 토목학, 지진학 등을 발달시키면서 세계적인 과학기술 강국으로 부상한 것이지요.

분명 일본은 살기에는 불편한 나라입니다. 잠시 일본을 방문한 한국 사람들은 자연재해와 좁은 집, 살인적인 물가 등을 겪어보고 나면 “일본은 한 번 구경할 만한 나라이지만 살고 싶은 나라는 아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특히 지진과 화산을 지적합니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은 이런 삭막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공원을 만들고, 운하를 만들어 댑니다. 집에서 몇 분만 나가면 조성된 드넓은 공원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평시엔 이를 자연생태공원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학교나 주민회관 등 공공시설도 넓고 특별하게 튼튼하게 지어 평소에는 공공시설로 개방하고, 지진이나 태풍 등 재해시에는 주민대피시설로 활용합니다.

일본인들의 주거생활, 공원배치, 인공적인 운하건설 등이 이처럼 자연재해를 피하려는 몸부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최근 일본인 친구들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일본인식의 응전이라고 할까요. 일상생활과 자연재해 극복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taein@seoul.co.kr

대중목욕탕 센토에 가봤더니
2004-10-25
60793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생활하다보면 가장 불편한 것 중의 하나가 목욕하기입니다. 주택가나 도심에서 대중목욕탕 센토(푼돈을 내는 목욕탕이라는 의미)를 찾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목욕중’이라는 입간판도 없고, 이발 안내 회전광고판도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목욕은 일상생활입니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수분이 많아 저녁때가 되면 온몸이 끈적거려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는 것 이지요. 그런데도 대중탕은 찾기도, 이용하기도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외국인에게 그렇습니다.

물론 일본의 목욕문화는 서일본과 동일본의 차이가 큽니다. 간사이 사람들은 대중목욕탕이 비교적 넓고, 탕도 여럿이며 목욕 자체를 즐깁니다. 하지만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사람들은 목욕을 할 때 매우 엄숙합니다. 에도 바쿠후 시대 무사들의 목욕전통이 남아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식으로 절도 있게 합니다.

도쿄시내의 대중목욕탕 센토에는 거의 모두 높은 굴뚝이 있다. 일본인들은 "굴뚝을 찾아가면 그 곳에 센토가 있다."고 센토 찾는 법을 가르쳐준다.

외국인여행자나 초보 외국인이 센토를 찾을 수 있는 열쇠는 세 가지 정도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높은 굴뚝을 찾는 것입니다. 높이가 10m 안팎이지요. 주택가에 높은 굴뚝이 있으면 그곳에 거의 대부분 센토가 있습니다. 건물입구에는 무슨무슨 탕이란 한자가 씌어있습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습니다. 입구에 빨래방이 있으면 센토임이 틀림없습니다.

센토는 옹색합니다. 대부분 60년대 전후에 지어져 매우 낡았습니다. 이용시간도 불편 합니다. 주택가에서는 오후 3~4시에 영업을 시작, 자정에서 오전 1시까지 합니다. 도심부에서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 전후까지 영업합니다.

요금은 도쿄 시내의 센토는 400엔(약 4000원) 입니다. 초등생과 중학생은 특별히 180엔 정도입니다. 그 이하 어린아이도 80엔을 받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일요일 오후에 두 시간 정도를 정해 동네 어르신들을 무료로 모십니다. 학생을 공짜로 대접하는 특별행사도 합니다. 2000엔 안팎(요금체계 복잡)의 시설 좋은 사우나도 생겨나긴 했습니다.

높은 곳에 요금소 둬 남녀탈의실 감시

여러 곳의 센토에, 시간대를 달리해 다녀봤습니다. 그런데 절반은 요금을 받는 곳이 탈의장 밖에 있지만, 나머지는 남녀 탈의장이 있는 중앙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남탕, 여탕 탈의실은 물론 목욕하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는 위치지요. 도난방지를 위해서는 효율적지만 조금 이상합니다. 게다가 남탕에 여성이 불쑥 들어와 청소를 합니다.

요금소가 밖에 있는 센토는 어김없이 “도난 조심하세요.”라는 여러 개의 경고문구가 붙어있습니다. 거의 모든 센토에는 빗이나 화장품이 없으며, 드라이가 비치되지 않는 곳도 많습니다. 이발소도 없는 것은 물론 수건과 비누도 없습니다. 주택가에서는 3~4가지 샴푸에 수건 등을 넣은 목욕통을 들고 지나는 남성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탕 안은 비좁기 그지없습니다. 넓어야 30명 정도가 쭈그리고 앉아 몸을 씻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수도꼭지도 1970년대 한국에서 볼 수 있었던 눌러야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원한 샤워시설이 여럿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아타가와 온천

깔판이나 물통도 묵은 때가 덕지덕지 낀 곳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조심조심 물을 끼얹어 몸을 씻습니다. 놀라운 것은 샴푸를 많이 쓴다는 것입니다. 면도도 밤 11시를 전후, 목욕탕에서 하는 것도 특징입니다. 그리고나서 43~45도의, 질릴 정도로 뜨거운 탕 안으로 잠시 들어가 몸을 데운 뒤 목욕을 끝냅니다.

탕은 2~3명만 들어가도 꽉 찰 정도로 비좁습니다. 몇 가지 약탕이나 기포탕, 초음파탕, 전기탕 등의 그럴싸한 광고에 솔깃해 들어갔다가는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탕이 하나 혹은 둘이 보통인데 각종 약초 등을 돌려가며 뜨거운 물에 넣어둡니다. 하지만 눈 가리고 아옹식입니다.

지금까지 가 본 센토 중에 냉탕이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사우나도 없습니다. 눈물겹게 비좁은 사우나가 있는 곳은 별도 요금 500엔 이상을 받습니다. 시설은 아주 형편없습니다.

욕조물의 역한 소독약 냄새도 특징입니다. 목욕을 끝내고 몸을 말린 뒤에도 이 냄새는 계속됩니다. 낡아빠진 탕 한쪽 벽면에는 후지산 벽화가 많습니다. 1~2년에 한 번씩 다시 그린다고 하지만 건물 자체가 대부분 40년이 넘은 것이라 산뜻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림 아래는 예외 없이 전당포나 양복수선소 등의 광고판들이 붙어있습니다.

젊은세대 외면…위기 처한 센토 많아

그나마 1층을 지키고 있는 센토는 형태가 거의 비슷해 1층에 들어가면 좌우로 남탕, 여탕이 있고 남녀탕의 중간에는 1층 높이의 벽이 가로막혀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는 3층 높이까지 뚫려있습니다. 남탕에 있다보면 건너편 여탕의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가 많습니다.

목욕탕 안의 문화도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기가 쓴 물건은 제 자리에 갖다 놓고, 비누거품도 남기지 않았다고 하는데 제가 가 본 탕들은 비교적 정리가 되어있긴 하지만 깔끔하지는 않습니다. 물도 아낀다는 인상을 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낡고 비좁고, 냄새나고, 때가 덕지덕지 낀 목욕탕에는 청소년이나 어린이 손님이 거의 없습니다. 외면하는 것이지요. 중학생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어른들이 너무 떠들고 지저분해서 가지 않아요.”라고 합니다. 외국인도 거의 없습니다.

젊은 세대의 외면에 따라 위기에 처한 센토가 많다고 합니다. 제가 가끔 가던 곳도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폐업안내를 내건 뒤 며칠 뒤엔 굴뚝과 건물을 헐어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영업 중인 많은 센토들도 자구책 마련에 비상입니다. 센토업자들은 무료 잡지를 발행하고, 인터넷홈페이지로 서비스를 개선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센토는 정말 70년대 수준 그대로입니다.

최근에 지어지는 주택 대부분이 욕조를 갖추고 있는 것도 센토손님이 줄어드는 요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2,3대를 이어 가업을 지킨 센토업주들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며 비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집안의 목욕문화 전통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400엔도 싸지 않다고 말합니다. 3~4인 가족 전체가 매일 목욕을 하는 일본인들의 전통상, 400엔이라는 비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이라고 일본인 친구들은 설명합니다.

그래서 일본 가정에서는 보통 밤늦게 가족들이 모이면 욕조에 물을 받아 아버지로부터 시작, 자녀와 어머니가 모두 그 물을 사용하며 목욕을 한답니다. 욕조에 들어가기 전에는 샤워를 하고 욕조에는 ‘때를 불리는 것’이 아닌 ‘몸을 담갔다가 나오는’ 식으로 목욕을 한답니다. 끈적거림을 씻어내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지요. 이 물을 정화, 이틀 정도 사용하기도 하며 이 후엔 세탁용, 혹은 화장실용 물로 재사용합니다. 귀한 손님이 왔을 때는 목욕순위 1위는 손님으로 바뀝니다.

이처럼 거센 시대의 변화는 일본 목욕문화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가업으로 이어오며, 지하로 내몰리지 않고 1층을 굳건히 지켰던 일본의 공중목욕탕들이 격렬한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홍보 등 뒤늦게 몸부림쳐보고 있지만 벅찬 모양입니다. 그래서 문을 닫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taein@seoul.co.kr

명성황후 시해 낭인의 후손을 추적해보니
200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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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110년 전으로 돌려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당시 국모였던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시대의 과거사 정리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른 오늘의 한국사회에도 시사점이 있을 듯해서 소개합니다.

‘110년에서 딱 1년이 모자라는 1895년 가을이 깊어가던 10월 8일 꼭두새벽. 당시 훈련대 2대대장이던 우범선 참령이 흥선 대원군을 찾아갑니다. 명성황후와 정치적으로 갈등관계였던 대원군을 방패역으로 이용하기 위해섭니다. 우범선은 대원군과 함께 경복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침입자들의 주력부대는 일본의 대륙낭인들이었습니다. 그 뒤를 일본공사관의 수비대가 따랐고, 그 뒤에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가 따릅니다. 이들이 경복궁을 침입할 때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소오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부대는 경회루를 동쪽으로 돌아 몰려갔고, 우범선은 낭인부대를 엄호했습니다. 명성황후를 모르는 대륙낭인들은 한참을 헤매게 됩니다. 마침내 황후를 발견하자 미야모도 등 두 사람의 일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낭인 데라자키라는 자가 칼로 내려쳤습니다. 황후를 살해한 이후 미우라 공사가 경복궁으로 들어가 사체를 확인하고, 불태우도록 합니다. 그 유해는 우범선의 지시에 의해 정전에서 좀 떨어진 곳의 땅속에 묻히게 됩니다.’

구마모토현의 상징인 아소산이 끓는 모습.

이상은 각종 역사서나 자료에 나와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당시 모습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치욕의 을미왜변이지요. 이를 종합하면 당시 조선사람으로는 우범선이라는 인물이 주범이고, 일본인으로는 ‘대륙낭인’들이 행동대로 등장합니다.

다시 시계바늘을 2004년 11월로 돌립니다. 109년이 지난 오늘. 이들 명성황후 시해범들의 조선인, 일본인 후손들이 일본 규슈지방의 구마모토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거처는 다르지만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말입니다.

핵심인물 우범선은 우장춘 박사의 부친

우선 우범선이란 인물은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육종학자 우장춘(1898~1959) 박사의 아버지입니다. 19세기말 당시 친일파 중 무관으로 중요인물이었던 그는 명성왕후가 친러시아정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자 친일정권 수립의 최대 적으로 간주, 시해에 앞장섭니다.

이후 정치적 환경이 급변하자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그도 1903년 11월 동포에게 응징 살해되고 맙니다. 이런 우범선과 일본인 부인 사이에 태어난 이가 우장춘 박사이고, 우 박사는 1950년 아버지의 죄를 조금이라도 씻겠다는 듯,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귀국해 여생을 육종산업 발전에 바칩니다.

그런데 이 우범선의 혈육이 현재 구마모토현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신분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답니다.

역사의 고리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했던 37명의 대륙낭인 중 21명이 구마모토현 출신이었습니다. 그들 21명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 5~6명이 지금도 구마모토현 내에서 살고 있습니다. 증언도 있고, 일본인 추적자도 있습니다.

특히 낭인들 중에 기쿠치(菊池)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후손도 현재 구마모토 현내에 살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최근의 취재를 통해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기쿠치라는 이름의 시(市)도 구마모토에 존재합니다.

구마모토의 관문 구마모토공항


그렇다면 왜 하필 구마모토 출신 낭인들이 명성황후 시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까요. 현재 정사에는 당시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가 구마모토 출신이었는데, 그가 미우라 고로 공사의 의뢰에 따라 자신의 고향인 구마모토 낭인들을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구마모토가 조선과 가깝다는 지리적 요인도 작용했겠지요.

구마모토 향토사학에 조예가 깊은 한 일본인의 분석은 흥미롭습니다. 구마모토의 정치-경제적 결정론입니다. 정치적으로 소외됐던 구마모토 출신 낭인들의 탈출구가 당시의 조선, 중국, 만주였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조선에 진출했던 구마모토 낭인들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는 얘기입니다.

당시 일본의 시대적 사정을 되돌아보지요. 1867년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은 조슈, 사쓰마, 도사번 3개 번의 하급무사 출신들이었습니다. 특히 3개 번 연합체를 성사시키기 직전, 메이지유신의 토대를 마련한 도사 출신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당하면서 유신 성공 뒤에는 조슈와 사쓰마 출신들이 메이지정부의 주체세력이 됐고, 이후 130년 이상 정치무대의 주역이 됩니다.

여기에 구마모토 출신 젊은 낭인들이 대륙에 진출하게 된 수수께끼의 해답이 있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 출신들은 우리식으로 하면 육군사관학교를,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 출신들은 해군사관학교를 좌지우지 했다고 합니다.

후손들 구마모토현에서 은둔자로 살아

따라서 구마모토 출신들은 육군이나 해군학교에 가도 장군까지는 진급이 되지 않아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육군학교 장성진급자는 조슈 출신들이 장악하고, 해군학교는 사쓰마 출신들이 주무른 것이지요. 이에 실망한 구마모토 출신들이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조선으로 진출, 낭인으로 활동하면서 대륙진출 첨병역할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탄생한 구마모토 낭인들이 명성황후 시해 때 경복궁에 난입한 것이지요. 이처럼 구마모토 출신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상층부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풍족한 지리조건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즉 구마모토는 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고시마를 평정하기 위해 가다가 “일본에도 이렇게 넓은 평야지역이 있는가.”라고 탄복했을 정도로 드넓은 평야지대입니다.

그만큼 구마모토는 풍부한 자연을 가졌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외지로 나갔다가 일이 잘못되어 고향으로 돌아와도 먹고 살 것이 있어서 출세를 위한 정치투쟁에 목숨을 걸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쓰마나 조슈번은 매우 척박해서 “한 번 나간 아들은 장남이 아니면 고향에 돌아가도 먹고 살게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중앙정치무대에서 목숨을 걸고 정치-경제투쟁을 전개,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자연이 풍부한 지역 출신들은 외부로 진출(침략)하지 않아도 먹고 살 것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 패자가 된 사실이 적지 않다는 것이 지인의 설명이었습니다. 반대로 척박한 땅 몽골의 칭기스칸은 세계를 정복, 대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한반도에서도 척박한 신라가 유족한 백제를 패망시킨 것이 유사한 사례라고 분석했습니다.

구마모토에 살고 있는 조선-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범 후손들. 그들은 현재 역사의 음지에서 은둔자로 살고 있습니다. 연좌제는 아닐 것이고, 업보도 아닐진대...

이런 구마모토현은 한반도와 인연이 깊습니다. 북부 기쿠치시는 1500년 전 백제 때부터 인연을 맺었습니다. 현재도 기쿠치시는 온천자원을 주로 해 기초지방자치단체로는 이례적으로 한국과 교류가 활발합니다. 반면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 영주를 지냈던 일을 회상하면 좋은 인연과 악연의 순환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사를 돌고 도는 것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taein@seoul.co.kr

일본열도 명문대-일류대병 ‘홍역’
2004-11-14
25076

명문대, 일류대병이 어느 나라 보다 심한 일본열도에 대학입시 홍역이 시작됐습니다. 지난 10월 대학입시센타시험 접수로 시작된 대입열기는 내년 3월 후기대학 입시가 끝날 때까지 반년 간 계속될 것입니다. 6개월의 장기입시레이스지요.

일본의 일류대 열병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명문대 출신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명문대에 입학시켜 좋은 직장에 취직시키려는 부모들에 의해 유치원 시절부터 사교육 열풍이 뜨겁습니다.

일본에는 대학 수만도 엄청납니다. 지난해 5월 현재 전국 4년제 대학은 702개교입니다. 국립대학이 100개이고, 공립이 76개입니다. 나머지 526개 교가 사립대학입니다. 이 밖에도 단기(전문)대학이 525개, 간호학교가 818개 등입니다.

이처럼 대학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자녀가 적어지는 소자화(少子化) 경향이나 경기가 나빠 대학진학을 포기하는 고교생이 증가하면서 평균적으로 대학 가기는 무척이나 쉬워졌습니다. 이르면 2007년에는 대학 모집정원과 대학응시자의 수가 같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도쿄대의 상징인 야스다강당

망하는 대학도 적지 않습니다. 일본 동북부 센다이시의 도호쿠문화학원대는 지난 6월 파산신청을 했습니다. 1997년 4년제로 전환한 이 대학은 의료복지 종합정책 과학기술 등 3개 학부에 2600명의 학생이 있습니다. 2년제이던 이 대학은 신입생 모집 실적이 저조하자 4년제 대학개설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전환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국립대학간 통폐합 등 대학들의 ‘생존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526개 사립대 중 지난해 신입생 수가 정원에 미달한 대학은 147개교로 약 30%였습니다. 2년제 단기대학(전문대)의 경우 최근 5년간 24개교가 학생 모집을 중단했고, 4년제 대학 중엔 히로시마의 L대학이 전후 최초로 올해초 자진 폐교한 바 있습니다. 이에 따라 문부과학성은 파산사태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명문대 입시경쟁률 10대1 안팎까지

반면 명문대로 향하는 수험생들의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고 있습니다. 도쿄대, 와세다대, 게이오대, 교토대, 주오대, 하토쓰바시대, 도후쿠대, 메이지대, 오사카대, 도시샤대학 등 이른바 명문대 입시경쟁은 치열합니다. 올초 입시에서 도쿄대, 게이오대가 5대1 안팎, 와세다대학은 10대 1 안팎으로 치열했습니다.

내년에 3053명(전기-2월말 2729, 후기-3월중순 324명)을 뽑을 예정인 도쿄대학을 예로 들어볼까요. 도쿄대는 우리의 수능시험격인 대학입시센터시험을 통해 1차에서 정원의 2.5~4배를 선발합니다. 문과 1, 2, 3계열과 이과 1, 2, 3계열로 뽑습니다. 그리고 본고사격인 국어, 수학, 외국어, 사회(과학) 등의 시험을 치러, 1대 4(본고사)의 비율로 사정합니다. 국비외국인유학생도 20여명정도 뽑지요.

올해 도쿄대 입시경쟁은 치열했습니다. 3053명 모집인원에 전체적으로 1만4631명이 지원, 평균 5대 1 가까운 경쟁률을 보였지요. 특히 의대인 이과 3계열은 90명 모집에 635명이나 지원, 지원자 경쟁률이 7대1일 정도였습니다. 법대인 문과1계열도 5대1이 넘었습니다.

이른바 명문 사립대학인 와세다나 게이오대학의 경쟁도 치열합니다. 일본은 대학의 복수지원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립대학들은 모집정원보다 많은 학생을 선발합니다. 와세다대는 올해 복수합격자의 이탈을 계산, 1만8300여명의 신입생을 선발했습니다.

와세다대의 경우 법학부 일반입시의 경쟁률은 10.9대 1로 뜨거웠습니다. 경제학과가 9.6대 1, 교육학부가 8.0대 1등이었습니다. 전체평균 실질경쟁률도 5.5대 1이었습니다. 게이오대학도 입학허가자가 1만107명이었지만 지원자수는 4만3277명으로 평균 4대1이상의 경쟁률을 보였습니다.

도쿄대 공부벌레들이 정열을 쏟고 있는 중앙도서관

이처럼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명문대학에 들어가면 이른바 일류 직장 취업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직장 내 선배가 후배를 강력히 끌어주는 대학도 적지 않답니다. 일본에서 인기가 높다는 사법시험의 경우 11월10일 발표된 2004년도 2차시험 합격자는 도쿄대 226명(201명), 와세다대 226명(174명)으로 공동 1위였고, 게이오대 170명(123), 교토대 147명(116명), 주오대 121명(104), 히토쓰바시대 57명(43), 메이지대 46명(33명), 오사카대 45명(32명), 고베대 33명(24명), 도시샤대 30명(29명-괄호안은 지난해) 순이었습니다. 전체는 지난해보다 400여명이 많은 1483명을 뽑았습니다.

사법시험・회계사등 명문대출신 독점

국가공무원채용1종 시험 합격자도 이른바 명문대 출신들이 대부분입니다. 2003학년도의 경우 도쿄대 488명(436), 교토대 200명(176), 와세다대 118명(106), 게이오대 82명(92), 도후쿠대 75명(67), 규슈대 63명(53), 홋카이도대 57명(46), 도쿄공업대 50명(44), 나고야대 48명(40), 오사카대학 47명(37 괄호안은 2년전) 등입니다.

공인회계사는 지난해의 경우 게이오대 228명, 와세다대 152명, 도쿄대 78명, 주오대 76명, 히토쓰바시대 71명, 교토대 49명, 도시샤대 48명, 고베대 47명, 메이지대 45명, 오사카대 37명 등입니다. 도쿄대를 비롯한 각 지역의 대표적인 국립대학들이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는 것에서 보듯, 일본은 학비도 싸고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국립대학들이 명문대로 인기가 높습니다.

대학들의 전체적인 취업률을 단순 비교하는 건 무리입니다. 취직하는 회사의 수준이나 초임수준 등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주간 이코노미스트의 조사에서 도야마현립대학은 입시 때 수준은 중간정도이지만 올 초 졸업생의 취업률은 무려 98%로 1위였습니다. 이에 비해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세계 10위권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도쿄대의 취직률은 76.9%(102위)라고 합니다. 역시 입학시험성적이 최상위권인 게이오대도 70.2(177위)%, 와세다대는 55.7%(321위)로 나타났습니다.

취직률이 높은 대학은 대부분 졸업정원이 수백명에 그치거나 2~3천명인 공과대학 등입니다. 때문에 종합대학 평균취직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지요. 결국 분수에 맞는 직장에 취직하는 것과 대학입학 성적과는 다소간의 차이가 것으로 보입니다. 취직률 30~40%대의 대학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이른바 유명회사 취직자 현황을 보면 명문대 집중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으로 주간지 아에라는 보도했습니다. 도요타자동차, 덴쓰, 후지TV, 도쿄미쓰비시은행, 미쓰비시상사, 산토리 등에는 게이오대, 와세다대, 도쿄대학 출신 등이 집중되었지요. 주간 프레지던트지 조사에서는 상장기업 최고경영자중 압도적인 다수가 도쿄대, 게이오대, 와세다대 등 이른바 3대 명문대의 상대, 법대, 공대 출신인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특이한 회사는 거대기업 소니입니다. 신입사원 선발에서 개성을 중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명문대 집중 현상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각 대학 한개 학과에서 많아야 3명(3개과), 2명(6개과)씩이고 나머지는 전부 1명씩만 뽑았지요. 사원들의 개성을 중시하고, 학벌타파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사회 전체적으로는 학벌사회 타파, 대학서열화 철폐가 당분간은 묘연해 보입니다. 국민들의 일류대를 향한 열기가 거의 홍역의 수준이고, 언론들도 이에 대한 반성 보다는 대학을 서열화 시켜 보도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taein@seoul.co.kr

일본 월급쟁이들의 시름
200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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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떠올리기도 싫다는 ‘잃어버린 10년’. 그 장기불황의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는 일본의 월급쟁이(샐러리맨)들의 삶은 팍팍해지기만 하는가봅니다. 올해는 실적이 좋아 대기업을 중심으로 순익이 크게 증가했다고 하지만 월급쟁이들의 몫은 오히려 뒷걸음질입니다.

일본 총무성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2002년 현재 총 취업자는 6330만명입니다. 이 가운데 농-어업과 자영업자 등을 제외한 월급쟁이는 4400여만명입니다. 각종 통계에 나타난 일본 월급쟁이들의 삶은 힘겹습니다.(연봉이나 월급여 등 통계수치는 조사기관과 기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04년 일본 대졸 구직자의 평균 초임이 19만5천엔(약 195만원)으로 4년만에 하락세로 돌아섰습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1만4천여개 사업장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남자는 지난해에 비해 1.5% 감소한 19만8천300엔, 여자는 1.6% 감소한 18만9천500엔으로 각각 집계됐습니다.

업종별로는 서비스업종이 가장 높아 20만3500엔에 달했으며 의료ㆍ복지업종이 18만6천엔으로 가장 낮았습니다. 고교졸업자의 평균 초임은 15만2600엔으로 지난해에 비해 0.2% 하락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올해 한국의 대졸 신입사원의 평균연봉은 2472만원으로 조사됐습니다. 참고로 일본의 집세, 교통비, 전기요금 등은 한국 보다 2~3배 비쌉니다.

출근길의 샐러리맨들

많은 샐러리맨의 일상도 고달프다고 합니다. 도요타자동차나 후지제록스 등 정상급 회사원들은 “소득은 늘지 않고, 노동 강도는 갈수록 세진다.”고 말합니다. 회사들이 경비절감을 위해 인력을 최소화하고 있지만, 경기가 좋았던 올해는 업무가 크게 늘어나 야근을 밥먹듯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9월 일본 국세청 민간급여실태 통계조사에 따르면 월급쟁이들의 평균 연봉이 6년 연속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본 샐러리맨 4466만명의 지난해 연봉이 평균 443만 9천엔(급료와 수당 373만8천엔+상여금 70만1천엔)으로, 전년보다 3만9천엔, 0.9% 가 낮아졌다고 합니다.

평균 연봉 6년 연속 줄어들어

그 중 남성은 554만엔2천엔으로 전년보다 4만1천엔, 0.7%감소했습니다. 여성은 274만8천엔으로 2만9천엔, 1% 감소했지요. 총무성통계국 자료에서도 거의 모든 직종에서 남성의 월급이 여성보다 최대 1.5배 안팎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002년 전기-가스업의 경우 남성은 월평균급여가 41만5천엔이지만, 여성은 28만천엔이었습니다. 금융-보험도 남성은 45만9천엔, 여성은 23만9천엔이었지요.

직장별 급여수준은 부익부빈익빈입니다. 일본 경제 격주간지 프레지던트는 최근 주요 3684개 상장회사를 상대로 평균연봉을 조사한 결과 최고는 1529만엔이고, 최저는 218만으로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2003년 기준으로 한 조사에서 연봉(급여에 수당과 상여금 포함 세전금액)이 가장 많은 기업은 후지TV로 1529만엔(1억5290여만원)이었고, 4위엔 니혼TV 1481만엔, 6위 TBS(1429만엔), 9위 TV아사히(1357만엔) 등 방송사들이 최상위권 이었습니다. 보험업종의 미레아HD는 1507만엔으로 2위였습니다. 광고회사 덴쓰가 1315만엔으로 10위를 차지했습니다.

10위권 밖 주요 기업의 연봉은 미쓰비시상사(1174만엔) 17위, 미쓰이물산(1171만엔) 18위, 미쓰이스미토모파이낸셜그룹(1118만엔) 21위, 미쓰비시도쿄파이낸셜그룹(1111만엔) 23위 등 종합상사와 은행업 등이 비교적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뒤이어 신일본석유(937만엔) 51위,기린맥주(882만엔) 81위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조업계의 최강자 도요타자동차는 822만엔으로 100위권 안에도 들지 못했으며, 혼다자동차(807만엔)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닌텐도가 838만엔, 마쓰시타전기산업이 759만엔, 도요타방직 555만엔 등으로 조사됐습니다. 신문사는 아사히신문이 1331만엔, 닛케이가 1262만엔으로 고액연봉이었으나 마이니치신문은 850만엔에 그쳤습니다.

도쿄시내 미나토구 신칸센 시나가와역 인근에 있는 임시 도시락 판매상으로부터 벤토(도시락)를 사는 샐러리맨들

반면 평균연봉이 158만엔(경영사정 급속악화로 예외)에 그친 업체도 있었으며, 서비스업인 토스넷(218만엔)이나 가라카미관광(251만엔) 등은 200만엔대의 연봉만 지급됐습니다. 200만엔 대 연봉을 기록한 기업은 모두 16개사였습니다. 연봉이 393만엔 이하인 기업도 225개 였습니다. 대기업의 평균연봉은 대체로 600만만엔 전후가 많았습니다.400만엔대도 적지않지요. 입사 15년~20년차 회사원의 평균월급은 50만엔 정도로, 세계 최고수준의 물가를 생각하면 풍족한 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올해 한국의 삼성전자, SK텔레콤, POSCO, 국민은행, 현대자동차, KT 등 시가총액 기준 국내 10대 기업들의 직원 1인당 평균 연봉이 4800만원인 것과 비교해 보면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최고경영자 연봉도 부익부 빈익빈

공무원들의 급여는 평균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03년 4월1일 기준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전직종 국가공무원 45만7920명의 평균 월급여는 41만4천여엔(평균 나이 41.6세)이었습니다. 이 중 의료직 70여만엔, 연구직이 50여만엔으로 높은 편이었고, 교육직도 53만8천엔에서 43만4천엔으로 공무원 중에서도 높은 편이었습니다. 314만1천여명의 지방직 공무원은 국가공무원 보다는 5%정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30만엔대 공무원도 적지 않습니다.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연간수입도 엄청난 격차를 보였습니다. 납세액을 기준으로 할 때 최고 16억엔의 추정연간수입을 기록한 경영자도 있었으나 도요타자동차의 오쿠다 회장은 1억3548만엔, 조 후지오 사장은 1억318만엔으로 160명의 화제의 경영자 가운데 100위권에도 얼굴을 내밀지 못했습니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 회장은 3622만엔을 받는 등 3~4천만엔대 경영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반면 미국계열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대부분 10억엔을 넘었습니다. 기업 임원들은 연간수입이 수백만엔대서 억대까지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비정규직 근로자의 사정은 딱할 정도입니다. 비정규직 비율이 급증, 올 들어 사상 처음으로 35%선에 이른 것으로 후생노동성 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전국의 5인이상 사업장 1만6천개를 무작위로 선정, 조사한 결과 비정규직의 비율은 34.6%로 5년전 조사 때 보다 7.1%포인트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위해 비정규직 고용을 늘리는 추세입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도 적지 않아 일본 월급쟁이들의 평균 월급여액은 50~54세를 정점으로, 그 이후는 하락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중에서는 파트타임이 3분의2를 차지하는데 기업들은 비정규직 사원을 고용한 이유를 “임금을 줄이기 위해”라고 합니다. 이들의 임금은 상당수가 시간급 1천엔 안팎의 ‘초라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비정규직 취업자 증가에 따른 생산성 저하와 소비침체 등 경제적 손실이 2001년에 13조8000억엔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특히 내년부터 샐러리맨들의 수입증가 전망은 없는데 오히려 부담은 수만엔씩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사회보험료가 상당히 증가합니다. 1999년부터 소비제고를 위해 실시됐던 월급쟁이들에 대한 감세혜택도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폐지될 예정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본의 경제가 장기불황의 터널에서 벗어난 듯 하더니,지난 7~9월 다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등 다시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어 일본의 월급쟁이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taein@seoul.co.kr

일본 집값거품 얼마나 빠졌나
200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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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한 해가 저물어 가면서 일본경제에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름까지만 해도 10여년간의 장기불황 탈출 기대감이 높더니 찬바람이 일면서 “다시 추락하나.”라는 우려가 더 강합니다. 경기회복을 선도해온 디지털카메라 등의 재고가 쌓이고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하며 “괜찮다.”고 강변하던 일본 정부도 경기가 조정기에 들어간 점은 인정합니다.

어디보다 찬바람이 이는 곳은 주택시장인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집을 세 들어 살 경우 보통 2년간 계약한 뒤 갱신할 때는 집세 1개월분의 갱신료를 냅니다. 하지만 지난 가을 이후 사정이 확연히 변했습니다. 집주인이나 관리 회사가 “갱신료를 안 받을 테니 그냥 사세요.”라고 자세를 낮추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안정기미를 보였던 주택시장이 흔들리는 것이지요.

도쿄 도내 한복판의 도쿄대옆 초고층맨션이 모델룸을 설치, 입주자를 기다린다는 안내광고를 내걸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주택거품은 얼마나 빠졌을까요. 부동산 매매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심한 사례이지만 도쿄에서 전철로 약 1시간 거리인 동쪽 지바현 지바시 하나미가와구의 3DK(실평수 15평 안팎으로 거실은 없는 방3개) 집 몇 채는 420만~450만엔(약 4500만원)씩에 매물로 올라와 있습니다.

이 곳은 약 160여개동(약 5700세대)의 대규모 5층맨션 단지로 대부분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 지어졌습니다. 베드타운이었지요. 이 맨션들은 전성기에는 무려 3500~4000만엔 까지 나갔다고 하니 얼마나 거품이 빠졌는지 실감나지요.

물론 이 맨션은 너무 낡았으며, 엘리베이터도 없고, 교통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젊은층이 피하는 등의 온통 불리한 조건만 갖추고 있어 집값거품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지가 돼버렸습니다. 하지만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이나 도쿄의 변두리인 다마뉴타운 등지의 낡은 베드타운도 ‘맨션 투매’현상이 나타나며 ‘빈 도시’화되고 있답니다.

도쿄 도심부도 거품이 쑥 빠졌습니다. 과거 8천만엔 정도 나갔던 도쿄도내 오다이바나 고도구 등 도쿄만 연안지역의 경관이 빼어난 방 두개, 거실 한개 정도의 맨션을 4천만엔대면 구입할 수 있게 됐습니다. 거의 절반의 거품이 꺼진 것이지요. 고급주택가인 세다가야구의 30평대 맨션이 9천만엔대서 4천만엔대로 추락한 예도 있습니다.

고급맨션 “2000만엔까지 깎아주겠다”

도쿄 도심에서 10~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지역에서도 실평수 15평 정도의 맨션을 3000~4000만엔이면 구입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도심의 거품이 빠지며 변두리, 신도시로 빠져나갔던 사람들의 ‘도심회귀’현상도 수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2005년부터 집값거품이 2차 붕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벌써부터 붕괴조짐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수도권에서 거품붕괴가 한창이던 1994년부터 지금까지 연간 7만~9만호의 맨션이 대량으로 공급되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의 붕괴는 없다고 계산한 것이지요. 그 이전에는 연간 2~4만 가구였다니 비교가 되지요.

하지만 거품은 계속 빠지고 있는 가운데, 경기는 살아나지 않아 자연히 공급과잉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고급 초고층맨션들이 가장 많이 들어서고 있는 도쿄도내 시나가와나 오오모리 지역 등에는 30~40층의 신축중이거나 준공된 초고층맨션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완공 1년이 되어가도 입주자 모집이 계속되는 곳이 많습니다. 일부 업체는 임원들 명의로 구입해 놓고, 마치 분양이 거의 다 된 것처럼 위장, 소비자를 유혹하기도 한답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자금난을 우려한 일부 건설업체들은 벌써 투매를 하고 있습니다. 예들 들면 도쿄도 미나토구 고급맨션 모델룸에 가면 3LDK(30평 안팎) 전망 좋은 맨션을 구입하려 할 경우 최초 흥정가격이 8000만엔까지 이르지만 “비싸다.”고 돌아서려고 하면 순식간에 천만엔, 2천만엔까지 떨어지고 있답니다. 연락처를 남기고 집에 돌아가면 2000만원까지 깎아주겠다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맨션 털어내기 세일행진’이란 용어가 등장할 정도입니다.

새로 지은 고급맨션이 이 정도이니 중고물품들의 하락세는 더 심하겠지요? 10년 전인 지난 1994년 지어진 맨션들을 보면 전차역에서의 거리, 조망, 전체 층높이에 따라 하락 정도가 차이가 있습니다. 평균적으로는 당시 4천만엔짜리가 2400만엔으로 40%안팎 떨어졌습니다.

준공된지 상당기간이 지났지만 입주자 모집이 계속되고 있는 도쿄 시내 시나가와역 인근 초고층맨션.

94년 일본수도권에서 공급된 맨션의 평균가격은 4413만엔이었고, 평균전용면적은 65.29평방미터(약 19.58평)이었다고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전합니다. 따라서 넓이는 70평방미터로 하고, 가격은 4000만엔으로 낮추어 공급한 사이타마현 후지미시의 후지미노역 주변 아파트는 당시 주목을 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습니다.

당시 후지노역 주변 신축맨션의 평당 분양가는 164만엔이었지만, 98년 중고물 가격은 평당 154만엔으로, 2000년에는 136만엔으로 속속 떨어지더니 2003년에는 106.9만엔까지 추락했다고 합니다. 분양 당시의 65%대로 떨어진 것이지요.

2010년 전후 거품붕괴 ‘진짜 위기’ 경고

거품붕괴의 강도는 교통과 조망 등에 따라 다르게 진행됐다는 것이 여러 조사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전철역에서 5분정도 소요되는 곳은 그래도 70%정도를 유지하지만 10분이 넘어가면 60% 후반대까지 내려앉았고, 20분 가까이 걸리는 곳은 60% 초반대까지 추락되는 형태였다는 것이지요.

건물의 전체 층수에 따른 하락폭 차이도 두드러졌습니다. 5층 전후의 맨션들이 50%대 후반까지 거품이 꺼졌지만 15층 안팎의 맨션은 60%대 전반까지만 하락했고, 20층 이상의 맨션은 70%가까운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거품 붕괴는 수도권은 물론 오사카나 고베 등 간사이 지역도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간사이 지역 중 일부 지역은 수도권 보다 더 심한 곳도 있다고 합니다. 다만 나고야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중부일본은 도요타자동차 등 지역기업이 활황을 보여 거품붕괴의 정도가 약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지역도 2003년부터 맨션이 공급과잉상태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최근 도쿄 긴자(서울의 명동 같은 곳)나 나고야 중심부 등 일부에서 땅값 회복기미를 보이고, 상당수 지역이 토지와 집값 하락세를 멈추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일본의 상당수 전문가들은 “추가적인 거품이 끼고 있다.”는 경고를 잇달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이 집을 살 적기”라는 건설사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소비자들에게 경고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일본의 장부상 토지자산 가격이 GDP(국내총생산)의 3배로 서구의 1배 안팎 보다 너무 높고 ◆소자화(少子化) 등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부동산의 태반을 가진 고령자들이 생활압박을 받아 부동산을 처분하기 시작하는 오는 2010년을 전후해 거품붕괴의 ‘진짜 위기’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 국민들은 잃어버린 10년의 장기불황 고통 속에, 집값거품 붕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급격한 집값상승은 서민들에게 고통이지만, 급격한 하락 역시 국민 전체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주택시장의 조건이 닮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본이 걸어온 길을 유사하게 밟아왔다는 한국의 주택시장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요.


tae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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