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일본 특파원 리포트 1

鶴山 徐 仁 2007. 3. 24. 17:26

 
이춘규 기자 : 도쿄통신

제 별명은 '촌놈'입니다. 많은 선배나 친구들이 촌놈이라고 해 굳어져버렸습니다. 그러니 촌놈이 맞겠지요. 촌놈은 호기심이 많다지요?그 촌놈 일본하고도 도쿄에 왔습니다. 마음껏 호기심을 발휘,일본의 힘 특히 일본경제의 힘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찾아보겠습니다. 피상적인 게 아닌 최대한 본질에 가까운 변화도 추적, 전해드리도록 애쓰겠습니다. 가끔씩은 '일본상식 뒤집기'도 해보이겠습니다.

 

‘상식’을 뒤집는 新일본인
200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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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신사나 절을 찾아 나라의 안녕과 자신의 복을 자주 빈다. 사진은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지역 한 절에서 향을 태우며 기원하는 사람들.



약간의 기대와 조금의 부담을 갖고 첫인사 올립니다.
서울신문 신임 도쿄특파원 이춘규(李春奎)입니다.

먼저 저를 소개해 볼까요. 저는 지난 4월5일 주일특파원으로 부임해서 이제 갓 한 달이 된 햇병아리 특파원입니다. 아직은 낯설고 물 설고, 모든 게 부족하기만 한 상태입니다. 지금도 특파원으로서의 업무처리와 도쿄에서 외국인으로서 살아가는 준비작업을 해 가는 초기정착단계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설익은 정보나마 일본에 대해 제가 보고 느낀 얘기들을 전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 조금 서둘렀습니다. 일본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고 나서 쓰겠다고 생각하면, 마지막 떠나는 날까지 한 줄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기분도 저를 재촉했습니다. 앞으로 70~80년대 대학생 시절 익히고, 16년간의 기자시절 다듬은 지식과 정보들을 토대로 도쿄에서의 얘기들을 차분하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회에 무슨 글을 쓸까 생각해 보았는데 '여지없이 무너진 일본 상식'이 지체 없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한달 간 지켜본 일본은 그만큼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일본이 빠르게 변하면서 제가 특파원으로 부임하기 전 네 차례 일본에 와서 보고, 짧지만 방송통신대학 일본학과에서 공부하고, 일본인 친구들에게 듣고, 책에서 읽고 방송에서 들었던 상식들이 차례차례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21세기형 일본이, 신일본인이 태어나고 있다고 보면 무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제가 짧은 시간 만나본 교수, 공직자, 언론인, 상인, 외교관 등 다양한 직업의 일본인 수십명도 이런 지적에 동의했습니다. 그동안 집단주의와 국가주의에 충실했던 일본인 사회에 전혀 새로운 젊은층이 속속 합류하면서 '새로운 일본 문화, 일본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신일본인들이 결과를 알 수 없는 대실험에 돌입한 분위기입니다.

일본인에 대한 ‘상식’ 여지없이 깨져

그동안 알고 있었던 일본인에 대한 상식은 질서를 지키고, 친절하며, 상대를 배려하고 하는 등등이었지요. 그리고 일본인들은 싱겁게 먹고, 술을 적게 마시고 등등 음식문화에 대한 상식도 마치 정답인양,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일본에는 지금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뒤집어진 상식 그 첫 번째, 질서를 잘 지킨다고요? 물론 다수의 일본인들은 아직도 질서를 잘 지킵니다. 하지만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1주일만 생활하면 "어 이게 아닌데!" 라는 느낌이 금방 옵니다.

출퇴근 시간 전철을 타보면 피부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표시를 무시하고 움직입니다. 사람이 많아서인지(일본인구는 3월 현재 1억2759만명) 움직인다고 하기보다는 휩쓸려 가는 면도 있지요. 그리고 도쿄에는 자전거 이용자가 많은데 제가 사는 도쿄시내 한 전철역 앞은 무질서하게 주차된 자전거들이 평일엔 인도까지 점령해버립니다. 한적한 주택가를 제외하면 도쿄시내 많은 거리와 공원은 담배꽁초와 버린 껌, 쓰레기가 널려있습니다. 공원에는 개를 '가급적' 데려오지 말고, 데려 올 경우에는 목줄을 매서 데려오라고 하는데도 왜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애완견을 데리고 나오는지.

친절하고 상대를 배려한다구요? 물론 아직도 다수 일본인은 놀라울 정도로, 어쩔 때는 귀찮을 정도로 친절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닌'신일본인'들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지요. 제가 일본에 와서 외국인등록을 하고, 은행계좌를 개설하고, 딸아이를 학교에 편입학시키고, 인터넷을 설치하고 하는 과정에서 불친절하고 쌀쌀맞은 대접을 받아 당황했던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11년전 제가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불친절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난 10년간 불황의 터널을 지나면서 그만큼 삶이 각박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를 잘 배려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일본인 대다수는 상대를 적극적으로 배려합니다.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이 그렇다는 얘기지요. 젊은 사람들 다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제가 일본에 오기 전에 귀가 아프게 들은 말이 전철에서는 휴대폰 스위치를 끄거나 진동으로 하되, 급한 전화가 걸려오면 차에서 내려 통화하라는 것이었지요. 만약 전철안에서 통화하면 사람들의 눈이 화살처럼 박혀들거라면서요. 하지만 그런 상식은 일본에 온 첫날부터 여지없이 깨져버렸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중심이긴 하지만 전철 안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제가 그동안 한국에서 익숙했던 풍경들과 차이가 별로 없었습니다.

자전거로 받고도 사과하는 사람 없어

또 하나. 제가 출퇴근 할 때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일본인에게 몇 차례 치었습니다. 그 때 일본인들 사과를 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다소 과장이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수차례 들이받히다시피 했지만 단 한 차례도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거나, 그런 표정을 짓고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씽씽 달려가 버립니다. 제 아내와 중학교 1학년인 딸아이도 유사한 경험을 했답니다.

음식을 싱겁게 먹는다구요? 아닙니다. 저는 음식이 짠 남도에서 20년 살다가, 상대적으로 싱거운 서울에서 산 게 25년 정도 되었지만 아직도 짠 음식에 익숙한 편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아니 적어도 도쿄의 음식은 무지무지하게 짭니다. 제 가족이 어느 토요일 도쿄시내 중심부에서 처음으로 우동을 함께 먹다가 너무 짜 물을 타서 먹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에도 짜지 않은 음식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술을 적게 먹는다구요? 물론 아직도 대다수 일본인들이 술을 적당히 먹고,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5일까지 계속된 일본의 '황금연휴' 기간동안 전철을 타면 아침인데도 전철역에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일본인들이 마시기 시작하면 양은 많지 않지만 새벽3~5시, 날 샐 때까지도 마신다나요. 그리고 전철역이나 시내 어디에서도 심야에는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11년전 일본에 왔을 때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었는데. 살기가 팍팍해져서 그런 걸까요.

이렇듯 21세기하고도 2004년 일본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은 놀라운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는 나중에 알수 있겠지요. 현재로는 변화의 내용에서 좋은 면도, 좋지 않은 면도 엿보입니다. 물론 섣불리 결론을 유도하려는 어리석음은 철저히 경계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신일본인들이 어떻게 세계적인 경제 강국, 과학기술 강국을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는지를 두 눈 치켜 뜨고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에게서 취할 것이 무엇인가를 우선 찾아보겠습니다. 한일관계, 동북아 신질서의 변화기류도 냉정하게 주시하고, 전해드리겠습니다. 많은 충고와 격려 부탁드립니다.

마사코 왕세자비에게 자유를?
200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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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1993년 6월 1억2000만 일본인들을 열광시키며 나루히토 일본 왕세자와 결혼한 뒤 쉼 없이 뉴스의 초점이 되었던 오와다 마사코(小和田雅子·41) 일본 왕세자비에 대한 얘기를 전해드릴까 합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던가요. 언제나 방긋방긋 미소를 띠며 언론에 나타났던 마사코비가 지금 최대의 위기국면에 빠져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결혼 1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함박 웃는 모습으로 왕세자, 딸 아이코(愛子)와 함께 왕세자궁의 뜰에 앉아 포즈를 취하는 마사코비. 아에라와 주간여성 등 주간지들이 ‘마사코사마의 좌절’ 등 자극적인 제목으로 취급한 기사내용. 그리고 나루히토 왕세자의 기자회견을 소개한 신문기사.

마사코비에 대한 뉴스가 한참 뜸했지요. 이유가 있답니다. 11년 가까운 왕실생활에서 ‘적응장해’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위험수위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이 자주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우울증이라고 보도하는 주간지도 있습니다. 4월엔 나가노의 친정별장에서 보내는 등 장기요양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사코비가 위기를 극복해 공식업무에 복귀하거나, 반대로 상태가 더 악화되어도 머지않아 세상을 또 떠들썩하게 할 것 같습니다. 그녀로 인한 왕실 내 불화설도 ‘설’ 차원에서 나돌고 있습니다.

마사코비의 근황이 11일 일본 조간신문 사회면에 일제히 비슷한 크기로 보도되었습니다. 12일 덴마크, 스페인, 포르투갈 등 2주간의 유럽 3개국 순방에 나선 나루히토 왕세자가 전날 기자회견을 했기 때문이지요. 왕세자는 혼자가게 된 사정과 심경을 밝히며 마사코비가 ‘앞으로도 정상적인 공무로 돌아오기에는 당초예상보다 긴 시일이 걸릴 것 같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신데렐라처럼, 영국의 다이애나비처럼 언론과 세상의 주목을 끌었던 마사코비가 왜 이런 위기에 빠져들었을까요. 1963년생인 마사코비는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모스크바, 뉴욕 등 국제적인 도시에서 성장한 국제소녀였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고, 도쿄대 법학부에 학사 입학했다가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뒤 도쿄대를 중퇴하고는 87년 4월 외무성에 들어갔습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여러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촉망받는 외교관으로서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던 ‘386 신세대 캐리어우먼’이었지요.

자유인을 원했던 그녀, 결국 세자비로

그런 마사코비는 당초 ‘자유인’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처음 나루히토 왕세자의 구혼에 세자비로서의 공식적인 처신에 자신이 없다면서 완강하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구중궁궐생활의 고독함을, 즉 현재의 자신의 운명을 예견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왕세자와의 인연이 질겼나 봅니다. 수년간 왕세자의 시선에서 벗어났으나 우연히(?)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지요. 주변 사람들은 “외교관으로서의 빛나는 캐리어가 신세대 왕세자비에게는 필요한 요소다.”라고 설득했고 왕세자도 “내가 모든 걸 잘 돌봐주겠다.”며 간절히 구애, 결혼에 골인했답니다.

그러나 왕실에 들어간 뒤가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결혼한 후 아무리 기다려도 2세가 태어나지 않자 그녀에게 뜨거운 관심을 가져온 일본인들은 ‘황실의 대가 끊기는 게 아니냐.’면서 그녀보다는 일왕실의 혈통계승 문제를 걱정했습니다. 결국 한 차례의 유산을 한 끝에 2001년 11월 딸 아이코(愛子)를 얻었지만 기쁨도 잠시였던 것 같습니다.왕실에 들어가도 국제친선외교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주위의 말은 달콤한 유혹에 불과했다는 것도 확인했겠지요.

일본 왕실전범(내부규약 정도로 해석)도 문제인가 봅니다. ‘여성은 천황(일왕의 일본식 표현)에 오를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사코비가 아들을 낳으면 차차기 일왕 후보 1순위가 됩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대안이 없는 것도 마사코비를 짓누르는 요인이랍니다. 현재 일왕 직계로는 나루히토 왕세자와 동생 후미히토(38)가 있지만 그도 딸만 둘입니다. 게다가 일왕의 남동생 3명도 모두 딸만 있거나 소생이 없어 결국 일본 왕실에서는 38년동안 아들을 보지 못한 ‘한’이 있답니다. 왕실이 오매불망 마사코비의 아들출산에 목을 매는 연유지요. 일부는 후미히토에게 아들출산을 권유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그것도 안 될 경우를 대비, 여성 일왕 문제도 검토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헌법개정 등 문제가 복잡하기 때문에 가장 무난한 수순으로 마사코비의 아들출산을 원한답니다.

따라서 마사코비는 딸을 낳은 이후, 우리 나이로 40이 넘은 나이에도 아들을 바라는 무언의 압력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시달렸다는 사실이 지난 2월 왕세자의 기자회견을 통해서도 확인됐습니다. 오죽했으면 ‘마사코비는 아들을 낳는 일이 최우선 공무이기 때문에 외국순방 외교는 뒷전이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겠습니까.

왕세자, 왕실 내부의 따돌림에 불만 토로

이런 정황이 어우러지면서 마사코비는 ‘너무 지쳐있다.’는 것이 왕세자의 증언입니다. 나루히토 세자는 10일 기자회견에서 왕세자비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이유에 대해 “결혼후 마사코의 캐리어와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왕실내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언론들은 이에 대해 “황태자사마(왕세자의 일본식 표현)가 강력한 표현으로 주변에 불만을 토로했다. 이례적이다.”고 해석했습니다. 왕실 내부에서 마사코비를 못마땅해 하는 분위기가 존재하며, 이로 인해 따돌림을 받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다는 것이지요. 왕세자는 회견에서 “마사코는 10년동안 자신을 왕실의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잘 안돼) 피로가 극에 달한 것처럼 보인다.”고 전했습니다. 세계를 누비며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고 싶었던 마사코비의 이상과 왕실내의 현실과는 갭이(괴리가) 너무 컸나 봅니다.

실제로 결혼 직전까지 해외무대를 누비며 ‘자유인’을 만끽했던 마사코비지만 결혼 뒤에는 처지가 급변, 부부가 11년 가까이 국제친선외국방문에 나선 건 세 차례에 그쳤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마사코비 자신도 2002년 외국방문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외국을 방문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이런 상황은 솔직히 내가 적응하는데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고 왕실 생활 적응의 어려움과 한계를 토로했었습니다.

마사코비의 상황이 이처럼 ‘최악’으로 치닫자 주간지를 중심으로 그녀의 근황을 소개하는 기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목은 대부분 자극적입니다. 그녀의 장기요양을 소개하면서 ‘마사코사마의 좌절과 고뇌’라거나 ‘자유를 잃어버린 스트레스’ 등이라고 동정합니다. 일부는 “하다못해 영국 다이애나비처럼 휴대전화를 갖고 운전도 하고, 운동 등을 하는 자유만 주어졌어도”라고 안타까워합니다. 386마사코비가 자유인으로서의 모습을 세계외교무대에 보여주었으면, 일본과 일본여성의 이미지를 몇 단계 상승시킬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토로했습니다.

결국 앞서도 말했지만 인생은 돌고 도는 새옹지마인가 봅니다. 마사코비의 화려한 캐리어가 세자비가 되어 11년 가까이 흐른 지금은 불행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어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마사코비의 처지가 어느 날 갑자기 좋아질 것이란 전망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집단주의가 아직도 위력을 떨치는, 그것도 한 때는 ‘살아있는 신’처럼 떠받들어지던 일왕의 세자비로서 마사코비의 공식업무 ‘부적응’(일탈)이 어떤 형태로 결론지어질까요.

과거 마사코비가 결혼했을 때, 임신설이 있을 때, 아기를 낳았을 때 너무나 요란했던 일본인과 일본의 신문과 방송들은 지금 거꾸로 너무도 조용합니다. 조심스럽습니다. 어찌 보면 엄숙하기조차 합니다. 그렇지만 마사코비가 벙긋 웃는 얼굴로 재기하거나, 아니면 일본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지금 보다 상황이 더 악화되면 앞서 말한 대로 일본이 다시 한 번 들썩거릴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12월초 스트레스성 대상포진 치료를 위해 입원한 것을 계기로 심신이 지쳐있다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한 마사코비에 대한 소식은 10년 장기불황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조짐을 보이는 일본 경제회복 기조에도 일정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가 5개월 이상 공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점점 더 쑥덕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왕세자가 직접 마사코비가 아픈 원인을 밝히자 왕실을 담당하는 궁내청에 비난여론이 일고 있습니다. 이에 당황한 왕세자 내외 담당 궁내청 관계자는 12일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가능한 대처하겠다."고 수습에 나섰지만 여론은 시큰둥한 반응입니다. 뒷얘기가 나오면 또 전해드리겠습니다. 변함없는 관심과 채찍을 기다리겠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섹스를 혐오하십니까
200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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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젊은이들이여, 섹스를 혐오하십니까.’ 혹은 ‘부모에게 기생하는 젊은이 10년래 1.6배 증가’ 등으로 연일 언론의 도마에 올라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일본 젊은이들의 급격한 변화상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어린이 날(5일)과 어머니 날(9일)이 낀 5월 들어 일본의 언론들은 일본의 신세대, 이른바 신일본인이나 신인류 등으로 불리는 젊은이들의 다소 염려스러운 면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기성세대와는 현저하게 다르게, 그것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얘기죠.

먼저 이달초 일본의 유력지 아사히신문사가 발행하는 주간지 아에라는 3일자를 통해 ‘젊은이들이여, 섹스를 혐오하십니까.’라는 다소 자극적인 기사를 사실상 커버스토리로 실었습니다. 20~30대 젊은 남성들은 자신감을 상실해서, 젊은 여성들은 지나친 결벽증 등으로 인해 각각 성기능 장해가 심각한 상황이란 얘기였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아닌, 일본사회의 장래를 우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으로 유명한 도쿄 시부야 거리. 요즘 일본 기성세대는 섹스를 혐오하고 취직을 하지 않으며 2세 출산을 꺼리는 젊은이들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

잡지는 통계로 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1999년(NHK 조사) 보다 섹스 횟수가 크게 줄었다는 일본가족계획협회의 2002년도 여론조사 수치를 제시했습니다. 즉 '과거 1년간 섹스를 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20대 남성은 99년 74%에서 2002년 68%로, 30대 남성은 89%에서 79%로 각각 급격하게 줄었답니다. 또 20대 여성은 81%에서 62%로, 30대 여성은 84%에서 79%로 줄었다고 합니다.

물론 조사기관과 조사기법이 달라 단순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추세를 비교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의 섹스혐오증이 급증한 원인으로 두 가지 가 꼽히는데 섹스리스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정신과의사 아베 테루오씨는 1997년 이후 급증한 퍼스널컴퓨터를 이용한 인터넷과 대형 임대비디오점을 꼽았습니다. 인터넷이나 DVD 등을 통해 상대가 없어도 의사(疑似) 성체험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직접 경험에 대한 필요성이 줄고, (가상현실과 비교가 잦다보면)자신감도 줄어든다는 얘기입니다.

섹스혐오증으로 관련산업 휘청

이처럼 젊은이들의 섹스혐오증의 영향으로 관련 산업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합니다. 콘돔판매 및 러브호텔 이용자가 급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 2위의 콘돔업체는 지난 5년간 출하량이 20%나 줄었습니다. 업계 최대업체인 오카모토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섹스관련사업은 영원불멸일줄 알았는데...”라는 탄식까지 나오고 있다나요?

일본 후생노동성 통계에 따르면 콘돔의 국내출하량은 지난 2002년의 경우 과거 20년간 최대를 기록했던 1993년(6억8000만개)에 비하면 무려 40%나 줄었습니다. 이에 따라 오카모토 등 관련 기업들은 ‘탈콘돔화’에 박차를 가해 가정용 탈취제 등을 생산, 판매하는 등 자구책 마련에 안간힘을 쓰고 있답니다.

비교적 오랫동안 호황을 구가하던 러브호텔 업계에도 이변이 일어나고 있답니다. 지난 5년간 업계의 매출이 20~30%정도 급감하고 있다는 것이 관련업계의 증언입니다. 침대만 갖다놓으면 손님이 오던 시대는 지났다는 얘기입니다. 이에 따라 러브호텔은 가라오케 등으로 용도가 점진적으로 변하고 있답니다. 젊은 단체손님들이 좋아하는 가라오케나 게임시설 등을 설치, 업체끼리 무한경쟁에 돌입하고 있지만 전망은 밝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손님이 줄면서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던 러브호텔들의 가격깎기 경쟁이 심화돼 하룻밤에 방 하나에 4천엔(약 4만2000원) 하는 곳도 있답니다. 이 경우 여러 명이 단체로 들어오면 정식 가라오케 보다 훨씬 싼 가격에 독립된 공간에서 마음껏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다음은 일본 젊은이들이 아직도 10년 불황의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경제의 불확실성 때문에 취업도 꺼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최근 일본 문부과학성과 후생노동성이 합동으로 발표한 조사자료에 따르면 ‘취직하고 싶다.’는 대졸남성이 58%에 그쳤답니다. 96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이 수치가 50%대로 떨어진 것은 처음이랍니다. 특히 국립대생을 중심으로 대학원진학이나 유학을 하면서 “경기가 회복되는 걸 기다리겠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답니다.

이 같은 경향에 따라 국립대를 졸업한 남학생의 경우는 ‘취업하고 싶다.’는 비중이 불과 39%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나마 취직을 희망한 남녀 대졸자 중에서 취직이 확정된 사람의 비율이 92.8%로 전년에 비해 0.3%포인트나마 높아졌다는 것으로 일본 정부측은 위안을 삼고 있답니다.

부모에 '기생'해 사는 젊은이도 급증

출산율 저하도 최근 지적됐습니다. 젊은층의 출산기피 심화로 이른바 소자화(少子化) 경향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후생노동성이 14일 발표한 1998년~2002년 인구동태 통계에 따르면 여성 한명이 평생 출산하는 아기 수(합계특수생산율)에서 전국 시-구-정-촌을 종합하면 증가한 곳은 14%에 그쳤고, 무려 84%가 감소했답니다. 특히 도쿄 시부야구(0.75명), 메구로구(0.76), 나카노구(0.77), 스기나미구(0.77) 등 젊은이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대도시 기초단체들의 합계특수생산율은 0.7~0.8명대에 머문 곳이 많아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답니다. 농-어촌지역은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취직할 의욕이나 일할 의욕이 없이 부모에 ‘기생’해 사는 젊은이(무업자-無業者)들도 지난 10년간 1.6배가 급증한 63만 명(지난해 기준 15~36세 사이)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나 일본 기성세대를 더욱 속 터지게 하고 있답니다. 이 숫자는 이들 세대 전체 인구의 무려 2%를 웃도는 수치라고 산케이신문이 17일 보도했습니다. 더욱이 이 수치에는 정식 취업은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활하는, 이른바 프리터(freeter-내각부 통계상 417만 명)는 제외한 수치라고 하니 일본 기성세대 고민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신문은 무업자나 프리터들이 너무 많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세수입이 줄어들고, 연금제도의 정상적 운영 악영향 등 경제, 사회적인 영향이 크게 염려할 정도라고 지적하면서 “일본사회가 차세대 직업인을 육성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사회전체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가정의 달인 5월, 급격히 나약해지는 젊은이들과 일과 출산을 꺼리는 젊은이들 때문에 일본의 기성세대들의 시름이 깊어가는 모양입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의 처지와 상황은 어떨까요. 바다건너 도쿄에서 생각해 본 하루였습니다.

代이은 수난...납북日人 2세대들의 시련
200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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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하순, 이 곳 일본에서는 북한에 납치됐다가 귀국한 일본인 1, 2세들의 ‘대를 이은 수난’ 문제가 단연 으뜸의 화제였습니다. 납치 1세대인 하스이케 가오루(46)씨 부부와 지무라 야스시(48)씨 부부, 그리고 미군 탈영병 출신의 남편 젠킨스씨와 두 딸을 북한에 두고 온 소가 히토미(45)씨도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특히 지난 5월22일 귀국한 하이스케, 지무라씨 부부의 ‘2세대 자녀 5명’에게는 온통 시선이 집중됐습니다.

이들의 부모들이 동서간 냉전대치의 희생양 격으로 지난 78년 여름 20세를 전후해 납치돼 24년을 북한에 살다 2002년 늦가을 귀국하는 시련과 감격(?)을 함께 맛보았지만, 스무살 안팎의 2세 5명은 사회주의 체제 북한에서의 20년 안팎 생활이 하루아침에 부정되고 있는 시련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일본 잡지와 신문 등 언론들은 요즘 납치 피해자 1, 2세대들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5월22일 귀국한 2세대들의 일본적응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관심이 집중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귀국한 지도 벌써 열흘입니다. 이들은 지난 5월22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2차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부모의 고향, 일본에 도착한 것입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귀국이 아니고 첫발이지요.

하스이케 가오루씨 부부의 장녀(22), 장남(19)과 지무라 야스시씨 부부의 장녀(22), 장남(20), 차남(16) 등 5명은 현재 모두 부모의 고향인, 일본 본 섬의 북쪽 니이가타와 후쿠이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2세들의 마음의 귀국’은 아직 멀어 보입니다.



영주귀국 여부 북-일관계 진전에 달려

이들의 부친들은 일본 귀환 열흘을 맞아 각각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녀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한마디로 자녀들은 아직까지도 일본으로의 영주귀국인지, 아니면 북한으로 돌아가는 지도 모르는 채 자신들의 운명을 북-일관계의 진전에, 그리고 부모들의 선택에 맡겨놓은 상태랍니다.

하스이케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녀 2명이 일본어를 배우겠다는 결의에 차있고, 인터넷에 열중하고 있지만 북한으로 가겠다는 말은 아직 꺼낸 적이 없다고 전했습니다. 물론 북한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마음에 걸린다는 말은 종종 하고 있답니다. 일본에 처음에 도착했을 때는 ‘서울에 가고 싶니?’라고 물으면 거절했으나 한국의 TV드라마 ‘겨울연가’를 통해 일본어 학습을 하고 나면서부터는 “서울에 가보고 싶다.”고 말한답니다.

하스이케씨에 비해 지무라씨는 세 자녀 문제에 대한 걱정이 더 많은 듯합니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피랍자라는 점을 정식으로 밝히지 않았답니다. 자녀들이 눈치껏 알아챌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지요.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지고는 있지만 외출하게 되면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들이 있기 때문인지 밝아진다.”고 2세들의 심리상태를 전했습니다. 지무라씨의 부인은 지난 31일 열린 합동 기자회견에서 "3일전 저녁식사 후 납치문제에 대해 아이들에게 얘기해주었더니 나이어린 차남을 제외하고, 장남-장녀는 눈물이 맺힌 심각한 표정이더라. 하지만 납치문제 자체에는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은지에 대해선 지난달 22일 평양순안 공항에서 일본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한 방송사와 인터뷰에서 2세대 중 1명이 “일본에 가 부모를 만나본 뒤 공화국(북한)으로 돌아올 예정이다.”고 말한 것으로 한 주간지가 보도했으나 미확인상태입니다.

이들의 이런 심리상태를 고려, 고향 자치단체들은 부모들의 귀국 때와는 달리 대대적인 환영 대신에 소박하게 이들을 맞이했습니다. 일본에 첫 발을 디딘 지난 22일 2세들 중 일부는 불안한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특히 부모의 고향에 갔을 때는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표정이었습니다. 이후 간단한 인사말 정도의 일본어만 할 수 있는 상태인 2세들은 일본어를 배우면서 성묘도 하고, 동네사람들과 탁구나 농구, 축구를 하면서 일본인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일본생활에 잘 적응할지 우려 목소리도

그러나 이들이 과연 끝내 일본생활에 잘 적응할지 근본적으로 우려하는 소리도 있습니다. 북한에서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고, 부모로부터 “귀국한 재일조선인”이라고 들었던 그들이 ‘피랍 일본인 2세’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문제랍니다. 실제 하스이케씨의 두 자녀는 부모가 피랍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더 첩첩산중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일본어 교육을 받고, 북한과는 전혀 다른 체제인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서 과거를 지워버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미 대학을 졸업한 자녀들은 다시 대학에 가야 하는지, 또 재학생은 고등학교나 대학교육을 어디서,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현지 지자체의 고민이랍니다. 그들에 대한 경호나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도 문제겠지요. 북한에서는 사범대학이나 컴퓨터, 기계공학 분야 등의 엘리트였다지만...

이들의 부모도 고민이 많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최근 이들의 귀국에 대비, 큰 집으로 옮기고 ‘귀국지원본부’의 지원도 받고 있지만 앞으로는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소식입니다. 생활비와 교육비가 급증할 것이 뻔한테 현재의 소득으로는 힘겹다는 얘기지요.

실제로 귀국한 피랍일본인 부부는 모두 20대 초반(소가씨는 여고시절 피랍)에 납치돼 북한에서 24년이나 살았기 때문에 자산이 전무한 상태라고 합니다. 정부로부터 받는 원조는 ‘납치피해자지원법’에 따른 원조금을 부부 몫으로 월 24만엔 (약 240만원)을 받았었고, 가족이 영주귀국 의사를 표시하면 이 돈을 ‘급부금’으로 바꿔 받게 됩니다. 자녀들이 귀국한 뒤에는 자녀 1인당 1개월에 3만엔씩이 주어지기 때문에 30만엔, 혹은 33만엔을 받게 됩니다.

이 밖에 이들은 시청 등지에서 임시직원으로 일하며 일당 5500엔 정도를 받고 있지요. 대학에서 한글 강사를 하고 있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임시직원으로 일한 수입이 연간합계로 200만엔(약 2000만원)을 넘게 되면 정부원조금이 삭감되기 때문에 근무시간을 조정하고 있는 답답한 상태라고 합니다.

특히 정부 보조금은 5년으로 한정돼 있고,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임시직원의 자리도 불안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정부지원에 대한 불만도 있답니다. 물론 가장 큰 불안은 자녀들의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마음’의 적응문제입니다. 그래서 임상심리사나 정신과의사 등도 나서 일본생활에 대한 적응을 도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문제가 지적되면서 지원법에 의해 급부금 지급이 끝날 경우 현지 자치단체가 수익이 훨씬 많고, 안정적인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지만 납치 1세대들의 불안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납치피해자지원법 자체를 2006년 개정할 예정으로, 각 자치단체와 내각부의 지원실이 1세대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개정방향을 검토 중이기도 하답니다.

결국 이들 ‘납치 피해자 2세대의 수난’ 문제는 당사자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이웃나라 일본 전체가 풀어야 할 큰 국가적 숙제로 보여집니다.
taein@seoul.co.kr

나고야의 영웅들? 도요토미, 도쿠가와...도요타
200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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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일본 중부지역 나고야시에 다녀왔습니다. 나고야시와 함께 아이치현에 있는 도요타시의 도요다자동차 본사를 취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칸센 열차로 나고야시까지 가서, 나고야에서 도요타까지는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려야 50분정도가 걸립니다.

나고야시는 지난 1997년 전후 ‘나고야의 태양’으로 불리며, 이른바 광속구로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대활약했던 선동열 선수(현 프로야구 삼성 투수코치)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친근한(?) 도시이지요.

이번 나고야 방문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물론 지난해 포드를 제치면서 세계 자동차 업계 2위의 판매실적을 기록하고, 순이익만 1조1000억엔(약 11조원) 이상 올린 도요타자동차가 사실상 나고야시 생활권에 속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고야는 아이치현의 현청으로 아이치현 전체가 나고야 생활권이며, 중부일본의 산업과 문화의 핵심지역입니다.

지난해 세계 2위의 판매대수를 달성하고, 순익 1조1000억엔을 돌파해 세계인의 눈길을 끈 도요타자동차 츠츠미공장의 생산라인 모습
또 하나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근대 일본의 기초를 다진 16세기 후반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일본인들의 ‘3대 영웅’이 모두 나고야의 옛 지명인 ‘오와리’ 나 ‘미카와’ 출신이란 점이었습니다. 오와리와 미카와 지역은 현재의 아이치현 지역에 속합니다.

따라서 나고야 사람들은 도요타도 같은 나고야 생활권으로 규정, 나고야가 16세기에 근세 일본국가의 틀을 다진 3대 영웅을 탄생시켰다면, 요즘 들어서는 도요타자동차라는 이 시대의 새로운 일본의 영웅을 탄생시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들은 도요타가 일본의 자존심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도요타가 있게 한 나고야도 일본의 자존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세계 제일주의‘로 초일류 기업 결실

알려진 대로 도요타자동차가 세계 초일류 제조업체로 성장한 것은 도요타자동차의 ‘세계 제일주의’가 빚어낸 결실이지요. 도요타 시내의 도요타자동차 본사와 공장, 노동조합 회관에서 만난 도요타자동차 식구들은 세계 1등주의로 무장, 자존심이 대단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특유의 위기의식으로 겸양을 보였지만요.

일본의 세계 1등 주의는 바로 나고야 지역 출신인 영웅 오다 노부나가가 원조라는 얘기도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나고야전문가 한 사람은 오다가 16세기말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당시의 조총이나 칼, 찻잔, 종 등 모든 분야의 기술자들에게 ‘천하제일의 물건을 만들면 인정한다.’는 세계 제일주의를 처음으로 실시했다고 강조하면서, 나고야야 말로 세계 제일주의인 일본 정신의 원류라고 분석했습니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더 잘 알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현재의 나고야역 근처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통일 후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신화창조 인물로 지금도 많은 일본 젊은이들의 우상이기도 합니다. 오다 보다 두 살 아래인 마부 출신의 그가, 추울 때 주군인 오다의 신발을 가슴속에 품어 따뜻하게 해 신게 했었다는 일화와, 죽을 때까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고 말년에야 겨우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점 등이 신화적으로 비쳐지는 모양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토양 속에서 도쿄, 오사카, 요코하마에 이어 일본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고야(220만명)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일본의 허리이자, 한 가운데인 나고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합니다. 이름도 나고야가 아닌 ‘중경(中京)’으로 바꿔야 한다면서요. 물론 아직까지 이런 목소리는 나고야 지역에서만 맴도는 실정이지요.

잠깐 언급했지만 나고야 사람들은 나고야시가 속한 아이치현 전체를 광의의 나고야 지역으로 통칭하기도 합니다. 아이치현에서 나고야시는 수도이고, 도요타시는 나고야, 도요하시시에 이어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은 시지만, 아이치현에 도요타자동차를 비롯한 유수의 제조업체들이 많은 점에 대해서도 나고야 사람들은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나고야가 속한 아이치현은 최근 일본 경제의 중심으로 급부상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내년 3월 ‘2005년 세계박람회’가 이 지역에서 열릴 예정이어서, 나고야는 이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일본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대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계박람회의 가장 주요한 스폰서는 역시 지역기업인 도요타자동차라고 합니다.

미쓰비시자동차의 ‘거짓말’이 우환으로

나고야 지역은 ‘잃어버린 10년’에 허우적거린 일본에서 가장 먼저 디플레 탈출의 기미가 있다고 합니다. 도요타자동차 등 제조업체의 기지로서 수많은 협력업체들이 자리 잡고 최근 수년간 많은 돈을 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고야지역은 자동차는 물론 항공기, 공작기계, 도자기, 섬유산업 등이 일본은 물론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고야 지역은 일본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꼽혀 일본식 경영인 종신고용을 보장하는 업체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점이 나고야 경제 활황에 도움이 되고, 인구도 늘고 있는 원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외지인 출신이 운영하는 한 백화점이 성공하자, “드디어 나고야에서도 외지인의 기업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가 보다.”라는 말이 나도는 것은 나고야에 외부인이 뿌리내리기가 힘들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나고야 지역은 지금 활기에 차 있습니다. 지역경제의 활황에 힘입어 나고야항도 일본에서 무역액이 3년 연속 1위였답니다. 세계박람회를 앞두고 중부국제공항도 내년에 문을 열 예정입니다. 따라서 나고야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며 지역인사들은 들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고야 지역도 요즘 큰 우환이 생기고 있습니다. 바로 작은 거짓말로부터 시작된 ‘큰 거짓말’이 들통 나면서 창업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미쓰비시자동차의 아이치현 오카자카 공장이 곧 문을 닫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쓰비시의 거짓말이란 차체결함으로 29세 주부 등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는데도, "차체 결함이 아니라 정비 불량에 의한 사고"였다고 강변 했다가 최근 들어서야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을 말합니다. 결국 이 거짓말로 인해 미쓰비시자동차는 5월 차량판매대수가 56.3%대나 급락했고,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추가투자 포기 등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실제로 미쓰비시측은 오는 2006년까지 일본 내 주력 자동차 생산 공장인 오카자키 공장을 폐쇄한다고 발표, 1만6000명의 공장 직원은 물론 가족과 하청업체 등 오카자키시 전체를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기도 합니다. 일본 근세의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태어난 오카자키성으로도 잘 알려진 오카자키의 불안감이 나고야 지역 전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최근 빠른 경제회복세로 쾌속질주하고 있는 나고야 경제계는 물론 일본 전체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나고야 지역이 너무 쾌속 질주하자, 질투의 신이 오카자키시를 시련에 빠지게 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