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19. 姨母를 王妃로

鶴山 徐 仁 2007. 3. 8. 20:22
팔만대장경숙종이 승하하자 숙종의 장자 오(俉)가 대위를 계승했으니 곧 제十六대 예종(睿宗)이다. 예종은 어려서부터 유학(儒學)을 즐겼으며 숙종 五년에 태자가 되었다.
 
예종은 즉위할 때 나이 이미 이십칠 세였으나 좀처럼 왕비를 정하지 않았다. 예종은 원년 이월, 재상이 상서하여 납비(納妃)를 청하였으나 아직 탈상(脫喪)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락지 않았다.
 
그것은 유학을 숭상하던 왕의 성품으로 보아 있음직한 일이었다. 그 달 말경 다시 재상은 글을 올려 납비를 청했으나 역시 허락지 않다가 예종 삼년 정월에 이르러서야 비를 맞아들였는데 바로 이자겸의 둘째 딸이었다.
 
이때 이자겸의 벼슬은 급사중(給事中)에 이르렀으니 왕이 즉위한 후 삼년 동안 얼마나 은밀히 활약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딸을 왕비로 들인 후 이자겸은 물을 만난 고기와 같았다. 날로 관직이 높아지더니 중서시랑(中書侍郞),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등을 거쳐 소성국 개국백(邵城國 開國伯)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자겸의 행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예종 十七년 삼월경부터 왕은 우연히 얻은 신병으로 고생하더니 사월에 이르러 병세가 몹시 위중했다. 
 
이때 이자겸의 딸인 순덕왕후(順德王后)는 이미 예종의  장차 해(楷)를 낳아 열네살이 되었으며 이에 앞서 예종 십년에 왕태자로 책립까지 된 터이므로 예종이 승하하면 응당 자기 외손자인 태자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었다. 
 
그러니 왕의 병이 심하면 심할수록 자겸의 기쁨은 컸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간교한 자겸은 그런 감정을 추호도 겉에 나타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순복전(純福殿)에 꿇어 엎드려 거짓 눈물을 흘리며 병든 왕을 위해서 빌기까지 했다.
 
"옛날 주무왕(周武王)이 병들었을 때에 주공(周公)은 지성으로 하늘에 기도하여 왕의 병이 회복한 일이 있사옵니다. 신 등은 모두 어리석고 변변치 못한 인간들로서 벼슬자리만 채우고 있었던 탓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힘이 모자라 백성들을 편안케 하지 못하였사오며, 덕이  없어 그릇된 짓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하늘이 진노하시어 그 화가 군부(君不)께까지 미친 줄로 아옵니다. 하오나 이는 오직 신 등의 허물이오니 바라건대 하늘은 밝히 살피시어 허물을 신 등의 몸에 내리게 하시고 군부로 하여금 병환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옵소서."
 
병든 왕은 자겸이 이렇듯 기도했다는 말을 듣고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왕의 병은 날로 위중해 갈 뿐이었다. 마침내 왕은 근신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다음 재상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짐이 부덕한 탓으로 하늘이 벌을 내리어 병이 낫지 않으니 어찌 백성들을 다스리고 군국(軍國)의 대사를 통어(統御)하겠는가? 태자는 비록 나이 어리지만 덕행이 숙성하니 제공은 마음을 합해서 보필하고 선조들이 이룩하신 사직을 지키도록 하라."
 
왕이 말을 마치자 여러 신하들은 엎드려 눈물만 흘릴 뿐 아마 말도 하지 못했다. 
 
왕은 다시 태자를 불러 말하기를 "내 병이 날로 더해서 나을 가망이 없으니 나라의 무거운 짐을 너에게 물려 주마. 내 평생에 한 일을 돌이켜 보면 잘한 것은 적고 잘못한 것은 많구나. 그러니 아비를 본받지 말고 마땅히 옛 성현의 가르침과 우리 태조의 교훈을 받들어 오래도록 백성들을 편안케 하라."
 
이 말에 태자 역시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러자 왕은 근신 한안인(韓安仁)에게 명하여 국새를 가져다가 태자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며칠 후에 선정전에서 승하하였으니 이때 왕의 나이 사십오세였다. 이제 모든 일이 이자겸의 뜻대로 된 셈이다. 
 
그래도 왕이 승하하자 여러 왕제(王弟)들은 태자가 나이 어린 것을 기화로 대통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자겸이 그 기회를 놓칠 까닭이 없었다.
 
선수를 써서 즉시 태자를 받들어 중광전에서 즉위하도록 했으니 곧 제十七대 인종(仁宗)이다.
 
인종은 즉위하자 모후 순덕왕후 이씨 즉  이자겸의 둘째 딸을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로 추존(追尊)하고, 이자겸을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守太師中書令邵城侯)로 삼았다. 
 
누이동생 원신궁주로 말미암아 실각한지 실로 근 삼십년 만에 명실공히 국권을 손아귀에 쥔 셈이었다.
 
이자겸은 이제 국권을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자 관직도 제멋대로 올렸다. 
 
인종 이년 칠월, 그는 왕에게 자기 자신을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책봉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자겸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 해 팔월 자기의 셋째 딸을 왕비로 삼게 했다. 그러니 말하자면 인종은 어머니의 여동생인 이모를 아내로 삼은 셈이었다. 이자겸이 이런 부자연한 혼사를 강행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욕심에서였다.
 
다른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였다가 왕의 총애가 그리 쏠린다면 자기 일문의 권세에 금이 갈는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외조부인 동시에 장인이 된 이자겸의 권세가 얼마나  도도했는지 다음과 같은 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왕은 백관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대할 때 태자를 대하듯 예를 갖추게 했으며, 그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해서 만백성이 하례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니 자겸의 일가 친척은 모두 조정의 요직을 차지했으며, 그 자손들의 저택은 왕성의 요지에 즐비하여 마침내 왕의 권세를 능가하는 형편이었다. 
 
자겸 일문이 세도의 극에 달하자 그에게 아첨하는 무리, 뇌물을 바치는 무리들은 벼슬을 받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공이 있고 유능한 인사라도 실각을 하게 마련이었다.
 
그러기에 이자겸의 집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바치는 뇌물이 산처럼 쌓였으며 먹다 남아서 썩는 고기가 항상 수만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자겸은 셋째 딸이 왕비가 된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인종 삼년 정월, 다시 넷째 딸을 왕비로 밀었다.
 
셋째 딸을 왕비로 들이밀 때에는 그래도 이모와 결혼하는 것을 간하는 신하도 있었지만 넷째 딸까지 왕비가 되자 너무 기가 막혔던지 혹은 그 권세에 눌리어 입을 못 떼었던지 아무도 간하는자조차 없었다.
 
이자겸의 행동은 나날이 방자해지고 국정은 문란해 갔다. 
 
인종 사년 정월, 왕도 어느덧 나이 십팔세가 되었다.
 
비록 성숙한 성년은 못되지만 그래도 세상 물정을 대강 짐작할 나이는 되었다. 그러니 상식에 벗어나 거의 광인에 가까운 이자겸의 처사가 마음에 거슬리지 않을 리 없었다.
 
그날도 이자겸의 행패를 전해 듣자 왕은 혼자 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 자가 만일 외조부만 아니라면 본때를 뵈줄텐데…"
 
이렇게 왕이 중얼거리는 것을 재빠르게 들은 것은 내시지후 김찬(內侍祗侯 金粲)과 내시녹사 안보린(內侍錄事 安甫鱗)이었다. 
 
김찬과 안보린은 전부터 이자겸의 횡포를 은근히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문득 입 밖에 낸 왕의 말을 듣자 심중으로 크게 반가워했다.
 
"여보시오, 안공. 상감께선 자겸의 외손자가 되시므로 자겸이 하는 일은 옳게만 보시는 줄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으신 모양이구료."
 
"그러게 말이요. 그러니 만일 뜻있는 사람이 있어서 자겸을 잡아다가 귀양을 보내든지 한다면 상감께서도 기꺼워하실 게고 나라 일도 바로 잡힐 게 아니요?"
 
안보린도 즉시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어야지. 그자를 꺾자면 무력이 필요한데 무신들과 통 접촉이 없는 자리에 있으니 답답하구료."
 
김찬이 이렇게 한탄하자, 안보린은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김공, 염려마오. 좋은 사람이 하나 있소."
 
"좋은 사람이라니?"
 
김찬은 두 눈을 번뜩이며 다가 앉았다.
 
"추밀원사 지녹연(樞密院事 智錄延) 공과 의논하면 무슨 수가 날 거요. 그 분도 자겸의 행패를 항상 미워할 뿐만 아니라 군부와도 잘 통하는 분이거든."
 
지녹연은 상장군좌복야 지채문(上將軍左僕射 智蔡文)의 증손이로서 일찍이 동북면 병마판관(東北面兵馬判官)이 되어 재간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숙종 구년에는 여진을 정벌해서 큰 공을 세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으며, 인종조에 이르러 다시 추밀원사가 되었다. 그러니 군부에 동지와 후배들이 많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녹연은 원래 성격이 사납고 학문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간혹 학문의 필요성을 논하는 것을 들으면 코웃음을 치기가 일쑤였다.
 
"켸켸묵은 책장만 뒤적이며 글을 읽어 무얼 하자는 거야? 사람이 크게 되자면 글보다도 세상 일을 바로 볼 줄 아는 지혜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만 있으면 충분하단 말이디."
 
이런 성격의 소유자이므로 김찬과 안보린이 의논을 하자 주먹을 휘두르며 즉시 찬동했다.
 
"상감의 뜻이 그러시다면 응당 궐기해야지, 조금도 염려들 마시오. 상장군 최탁(崔卓),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등과는 막연한 사이이니 내가 말만 하면 당장에 궐기할 것이요.  그러나 상감의 참 뜻을 직접 들어야 거사할 수 있으니 나하고 같이 입궐합시다."
 
지녹연은 이렇게 말하고 즉시 입궐하여 인종을 뵈었다.
 
"상감마마, 자겸 등의 횡포를 미워하시고 기를 멀리 쫓아보낼 뜻이 계시단 말씀을 들었사온데 사실이옵니까?"
 
지녹연은 이렇게 탁 터놓고 말했다.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일은 있지만 왕은 아직 거기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신하들이 막상 들고 일어나니 슬며시 겁도 났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고 내시 김안(金安)을 보내어 가장 믿을 수 있는 공신 김인존(金仁存)과 이수(李壽) 등의 의향을 물어 오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