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20. 骨肉의 愛憎 ㅡ 이미 때는 늦고

鶴山 徐 仁 2007. 3. 8. 20:23
팔만대장경김인존은 선종조의 공신 시랑평장사 문정공 상기(文貞公 上琦)의 아들이다.
 
천성이 명민하여 소년에 등과하고 한림학사, 수태부, 문하시중, 판리부사 등을 역임했으며, 선종, 헌종, 숙종, 예종을 거쳐 인종에 이르는 동안 조정의 중요한 정사에는 다 참여한 공신이었다.
 
또 문장이 뛰어나 숙종 칠년 요나라 사신 맹초(孟初)가 왔을 때 접빈관으로 시를 주고 받아 천재라는 찬사를 들은 일도 있었다.
 
이리하여 역대 임금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극진한 예대를  받다가 예종이 승하하고 어린 인종이 대통을 계승하자 외조부 이자겸의 행패로 말미암아 화가 미칠 것을 미리 짐작했다.
 
그래서 사전에 화를 모면할 생각으로 관직을 사할 것을 상주하였으나 워낙 인망이 두터운 공신이라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도 김인존은 요직에 앉아 있는 것이 불안스러웠다. 그래서 하루는 입궐하는 길에 빙자해서 관직을 면해 줄 것을 간청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재상 자리를 떠나 판비서성사 감수국사(判秘書省事監修國史)라는 실직으로 물러 앉았다. 말하자면 선견지명이 있고 처신이 신중한 현인(賢人)이었다.
 
인종의 분부를 받고 김안이 찾아와서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한 거사 여부를 문의하자 김인존은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원래 상감께서는 성장하셨으니 정으로 보아도 외가를 배신할 수 없지 않소?"
 
"그야 그렇습죠. 그렇지만 그 양반(李資謙)의 처사가 너무 지나쳐서…"
 
"뿐만 아니라, 그 일당이 조야에 가득해서 도저히 그 힘을  꺾을 수 없는 터이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도록 하시오."
 
김안은 돌아가서 김인존의 뜻을 왕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있던 지녹연이 펄쩍 뛰었다.
 
"이러니까 소위 학자님들과는 답답해서 일을 같이 할 수 없단 말야. 이럭저럭 따지기만 한다면 세상 일 쳐놓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이요? 폐하!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소이다. 우리가 거사하리라는 것은 이자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니 거사를 하다 실패하건 그대로 주추물러 앉건 죽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부질없이 개죽음을 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서 궐기해야 합니다."
 
마음 약한 왕은 지녹연이 강경히 주장하자 이번에는 그 편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렇다면 경들에게 만사를 맡길 터이니 좋도록 하시오." 이렇게 승낙하고 말았다.
 
지녹연, 김찬, 안보린 등은 곧 상장군 최탁, 오탁, 대장군 권수 등을 불러 이자겸을 거꾸러뜨릴 계책을 강구했다.
 
그러자 무신들은 "이자겸이 힘을 쓰는 것은 척준경(拓俊京) 형제의 무력을 믿는 때문이요. 그러니 이 기회에 그놈들도 없애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주장했다.
 
척준경은 곡주(谷州)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해서 글을 배우지 못하고 무뢰한들 속에 끼어 세월을 보내다가 숙종이 계림공으로 있을 때 그 문중에 드나들며 종자가 되었다.
 
그 후 숙종이 등극하자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가 되었으니 이 별가란 직책은 종구품도 못되는 한낱 이속(吏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리가 척준경에게는 입신의 발판이 되었다. 
 
숙종 구년 평장사 임간(林幹)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우고 천우위녹사(千牛衛錄事)가 되었다. 즉 천우위는 육위(六衛)의 하나로서 상령(常領) 一명, 해령(海領) 一명, 상장군 一명, 대장군 一명, 장군 二명 등 一천명으로 구성된 정규군이다. 
 
그러므로 척준경은 추밀원에서 전직되어 무관이 된 셈이며 군부에 세력을 부식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 후 다시 예종 이년에는 중군병마 녹사(中軍兵馬錄事)로서 윤관(尹瓘)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출정하여 석성 영주(石城英州)싸움에 대승한 공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그리고 인종 초에는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參知政事)를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가 되었으니 실로 관직이 정이품에 이르렀다.
 
이와같이 미천한 집에서 태어나 자기 실력으로 입신한 자들에게서 흔히 보듯이, 척준경은 무엇보다도 문벌에 대해서 선망과 비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자겸이 그의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하려고 가까이 하자, 척준경은 오히려 감격하여 견마지로(犬馬之勞)를 아끼지 않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왕의 밀지를 받은 지녹연 등은 무신들과 함께  만반태세를 갖추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종 사년 이월,  마침내 거사를 하게 되었다. 
 
그날 궁중에는 척준경의 동생 준신(俊臣)과 준경의 아들로서 왕의 내시가 된 순(純)이 있었다. 
 
무신들은 궁중에 들어가자 우선 이 두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궁문 밖으로 내던졌다.
 
"자,  이제는 괴수 이자겸과 척준경만 죽이면 된다."
 
무신들은 이렇게 외치며 두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자기 집에 있었는데 궁중에 배치해 두었던 심복으로부터 변이 일어났다는 급보를 받았다.
 
이자겸은 권모술수에는 능하지만 한편 겁이 많은 인간이었다.
 
"뭐라구? 무신들이 들구 일어났다구? 이거 큰일 났구나! 아무 준비도 없는데 이런 일을 당했으니 인젠 꼭 죽었구나!"
 
새파랗게 질려서 와들와들 떨기만 하는 이자겸에 비해 척준경은 일찍이 전진(戰陣) 속을 왕래한 터이라 겁만 먹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아우와 아들까지 피살된데 대한 분노가 그를 용감하게 한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요. 죽든 살든 싸울 때까지 싸워 봅시다."
 
그리고는 가까운 곳에 있는 부하 장졸을 모아보니 겨우 삼십 명도 못 되었다.
 
"아니 이걸 가지고 어떻게 수 많은 병력을 당해 낸다는 건가? 차라리 그러지 말고 피신이나 하세."
 
겁많은 이자겸이 다시 이렇게 말하니까 척준경은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달아나긴 어디로 달아난단 말이요? 결국은 잡혀서 죽긴 매한가지니까 시원히 싸워 보고나 죽겠소."
 
그리고는 삼십명 미만의 병력을 이끌고 궁중으로 향했다. 
 
궐문 밖에 당도하자 준경은 부하들을 모아 계책을 내렸다.
 
"궁중 안에 얼마만한 병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병력이 많은 것처럼 알게 하는 것이 싸움에는 유리하니 사방에 흩어져서 되도록 야단스럽게 함성을  지르도록 해라. 그런 다음,  여기 저기 불을 지르고 쳐들어가도록 하자."
 
준경의 부하들은 즉시 궁궐을 에워싸고 요란하게 함성을 질렀다. 
 
이때 지녹연의 지시를 받은 상장군 최탁 등은 아직도 이자겸과 척준경을 찾느라고 궁중을 수색하고 있다가 뜻밖에도 궁궐 밖에서 함성이 일어나자 대경실색했다.
 
"이크! 큰일 났구나!"
 
"적의 도당이 어느새 대군을 모아 가지고 궁궐을 에워싼 모양이다."
 
불과 삼십명 미만의 병력일 줄을 꿈에도 모르는 그들은 그저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불길이 오르기 시작했다.
 
"저것봐라! 저 불길만 봐도 적의 병력은 대단한 모양이야."
 
최탁의 무리들은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므로 한 번 겁을 먹자 도무지 명령이 서지 않았다. 그저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제 목숨 살기에만 바빴다.
 
담 너머로 이러한 광경을 엿본 척준경은 용기백배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담을 뛰어넘어 들어가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은 삽시간에 퍼져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까지 연소되었다. 
 
그리하여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근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산호정(山呼亭)으로 몸을 피했다.
 
타오르는 화염, 우왕좌왕하는 무신들, 울부짖는 궁녀들! 궁중은 완전히 수라장으로 화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이야말로 이자겸, 척준경들에게는 유리했다. 비록 삼십 명 미만의 병력이지만 그들은 오래 길러온 심복이므로 명령만 떨어지면 수족같이 움직여 주었다.
 
이리하여 최탁, 오탁, 권수 등 왕당파(王黨派)무신들을 차례로 참살하고 그날 궁중에 숙직하고 있던 신하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때 궁궐 밖에서 충천하는 화염을 바라보자, 왕의 신변을 염려하여 비분강개한 충신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척준경 등의 무력을 두려워하여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있는데 단 한사람 홍관(洪灌)이란 노신만은 즉시 자기 집을 뛰어나왔다. 홍관은 당선군 사람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학사가 되었으며 예종의 명을 받아 삼한(三韓) 이래의 사적을 편찬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인종조에 이르러서는 조수사공상서 좌복야(朝守司公尙書左僕射)에 임명되었다.
 
"이자겸 일당이 궁중에 불을 지르고 상감을 해치려 하는데 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가족들이 말리는 손을 뿌리치고 홍관은 부르짖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건만 내 어찌 편안히 보고만 있겠는가?"
 
늙고 병든 몸이라 몇 차례나 고꾸라지며 궁궐 서화문(西華門)에 당도했다. 그때 서화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질 않았다. 홍관은 사람들의 손을 빌려 담을 기어 올라 궁중으로 내려뛰니 다리뼈는 부러지고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겨우 기어서 왕의 곁에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이 난리로 궁중은 잿더미가 되고  남은 건물은 겨우 산호정, 상춘정(賞春亭), 상화정(賞花亭), 세 정자와 내제석원(內帝釋院)의 회랑(回廊) 수십간만 남길 정도였다고 한다.
 
왕당파에게 요행히도 승리를 거둔 이자겸 등은 김찬 등 살아 남은 왕당파를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 보내어 일소한 다음 왕이 궁중에 있으면 또 어떤 계교를 꾸밀는지 알 수 없다 해서 강제로 멀리 떨어진 연경궁(延慶宮)으로 쫓아 버렸다.
 
이때 홍관은 늙고 병든 몸이나마 억지로 왕을 따라 길을 떠났는데 워낙 몸은 쇠약하고 다리까지 다쳐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이것을 보자 무지막지한 척준경은 "이 늙은 것이 왜 이리 추군추군하게 굴까?" 소리치고는 한 칼에 늙은 충신의 목을 베어 버렸다.
 
연경궁에 유폐된 왕은 이제 완전히 자유를 잃은 몸이 되고 말았다. 
 
국사를 직접 처결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조차도 자겸 일당의 감시와 극도의 제한을 받기에 이르렀다.
 
"내 이럴 줄 알았으면 거사를 말리던 김인존의 말을 들을 것을…"
 
줏대 없는 왕은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렇게 뉘우쳤지만 결국 부질없는 넋두리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