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17. 女體開眼

鶴山 徐 仁 2007. 3. 8. 20:18
팔만대장경현종이 환도한지 팔년 후인 현종 십년(AD 1019) 십이월, 글안주[契丹主]는 고려 침공의 야심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십만 대병으로 다시 내침했다. 
 
이때 서북행영도통사 강감찬(西北行營都統使 姜邯贊)은 7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맞아 흥화진(興化鎭)과 자주 내구산(慈州 來口山)과 마탄(馬灘) 등 여러 곳에서 여지없이 적을 격파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에 적의 한 부대가 서울을 치려다가 실패하고 구주(龜州)를 지나 물러갈 때에는 추격전을 벌이어 치명상을 입히니 적이 입은 손해는 실로 막대했다. 
 
적의 전사자의 시체가 들을 덮었고 고려군이 노획한 인마, 무기 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적군 십만 중에서 살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전투가 고려군에게는 얼마나 큰 승리였으며  적군에게는 얼마나 큰 타격이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글안의 침공은 고려의 조야에 심한 고통을 주기는 했으나 그 대신 고려의 군력은 나날이 강성해지고 영토 또한 서북쪽으로 날로 늘어 갔다.
 
이리하여 현종(顯宗), 덕종(德宗), 정종(靖宗), 문종(文宗), 순종(順宗),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肅宗) 등을 거쳐 예종(睿宗)에 이르는 약 백년간은 외국의 침략도 잠잠해지고 국내 정세도 안정되어 고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반면 귀족들은 사치를 일삼고 권신들은 정권다툼에 눈이 어두워 고려 조정은 속으로부터 썩기 시작했다.
 
이때 정계의 중심 인물이 되어 조야를 어지럽힌 자는 이자겸(李資謙)이었다. 이자겸은 중서령 자연(中書令 子淵)의 손자로서 문벌을 배경으로 관계에 나아가 마침내 합문지후(閤門祗侯)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다.
 
자겸은 원래 문벌만 좋을 뿐 아니라 사람됨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야심이 만만했다. 그러므로 제十二대 순종(順宗)이 즉위하자 여러 가지로 운동을 한 끝에 자기 누이동생을 왕비로 들여보냈다. 
 
이가 곧 장경궁주 이씨(長慶宮主李氏)이다. 물론 누이동생 덕으로 왕을 움직여 권세를 잡아보려는 것이었으며 요행히 누이동생 몸에서 왕자라도 탄생하면 국권을 한손에 좌지우지할 생각까지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석같이 믿던 순종은 즉위한지 불과 석달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순종의 아우 운(運)이 왕위를 계승하니 곧 선종(宣宗)이다.
 
순종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자겸의 야심은 우선 시초부터 꺾인 셈이 되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치기로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났다.
 
순종의 왕비로 들어갔던 장경궁주 이씨는 궁궐에서 나와 밖에서 거처하고 있었는데 얼마 아니해서 이상한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렇게 귀한 몸이 관노(官奴) 따위와 정을 통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큰 소리로 했다가는 큰일 날 말이지만, 글쎄 장경궁주가 밤마다 자기 방에 천한 관노를 불러들여 갖은 추잡한 짓을 다 한다지 뭔가?"
 
"그게 정말인가?"
 
"장경궁주를 모시는 시녀의 입에서 난 말이니 틀림없을 걸세."
 
"그거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인데… 한 나라의 왕비가 되었던 분이 그래 사내가 없어서 관노 따위와 정을 통해?"
 
사람들은 이렇게 수근거리며 혀를 찼다. 이 소문이 마침내 자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자겸은 대경실색했다. 
 
이 일이 사실이면 누이동생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 연루되어 자기 신변에까지 어떠한 화가 닥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겸은 곧 장경궁주의 처소로 달려갔다.
 
"궁주, 요즈음 이상한 소문이 도는데 사실이요?"
 
"무슨 소문인데요,  오라버니?"
 
궁주는 시침을 뚝 따고 이렇게 되물었다.
 
자겸은 누이동생의 모습을 이윽히 뜯어보았다. 독수공방의 처지를 감수하기에는 너무나 젊고 요염했다. 뿐만 아니라 윤기가 잔뜩 도는 눈매와 입술은 이미 사나이의 사랑을 흡족히 받은 흔적이 역력했다.
 
그것을 확인하자 자겸은 딱 잘라 말했다. 
 
"궁주 방에 요즈음 외간 남자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그게 사실이냐 말이요?"
 
자겸은 이렇게 말하면 궁주가 당황해서 구구한 변명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궁주의 대답은 너무나 대담하고 뜻밖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남녀간의 정을 즐기고 사는데 나만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 지내란 말씀이요?"
 
자겸은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밤마다 남자를 불러들인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이구료?"
 
"사실이요. 사실이니 어쩌겠다는 거요?"
 
궁주의 눈에는 독기와 함께 원망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오라버님 권세욕의 제물이 돼서 허약한 임금에게 시집을 갔었소. 하루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라버님과 집안을 생각해서 상감이 살아 계신 동안은 젊은 불꽃을 끄고 죽은 듯이 살아왔소. 그렇지만 이제 상감이 승하하신 터에 무엇을 꺼리어 더 참고 지내라는 것이오?"
 
장경궁주의 말은 한 인간의 절절한 절규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자기 가족들조차도 권세를 위한 이용물로 생각하고 있는 자겸에게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오? 한 나라의 왕비였던 몸으로서 체통을 생각해 보오."
 
"호호호… 체통이라구요?"
 
궁주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 체통이란 말에 묶여 오늘까지 산송장의 신세를 면치 못한 거요. 나는 왕비이기 전에 한 여자로서 사나이의 사랑을 받고 싶소이다."
 
이렇게 말하는 궁주의 말끝은 눈물로 흐려졌다. 
 
그러나 자겸은 노발대발할 뿐이었다. 두 주먹을 부르르 떨고 당장에라도 누이동생을 때려 눕힐 기세였으나 그야말로 체면을 생각해서 겨우 그것을 참고 소리만 질렀다.
 
"에이 집안 망할 계집 같으니… 모처럼 왕비란 귀한 몸을 만들어 주었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천한 관노와 정을 통하는 거야?"
 
"천한 관노라구요?"
 
금방 울먹이던 궁주의 목소리는 싸늘한 비웃음으로 변했다.
 
"천한 관노밖에 누가 있어요? 그야말로 체면만 생각하는 사나이들 속에 나 같은 여자의 정을 풀어 줄 자가 천한 종 이외에 어디 있는 말이예요?"
 
이렇게 말하며 궁주는 이번엔 소리를 내어 통곡을 했다.
 
"에이, 더러운 것 같으니…"
 
자겸은 누이동생의 등에 침을 칵 뱉고 그 방을  뛰쳐나왔지만 그렇다고 감정에만 흐를 그가 아니었다. 자겸은 즉시 궁주의 시녀들을 불러 엄중히 다짐을 했다.
 
"앞으로 이곳에 외간 남자가 절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라. 그리고 자난 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도록 해. 만약에 그것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렸다!"
 
자겸이 무엇보다도 염려한 것은 궁주의 추문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 자기 지위가 위태로워 질 것을 걱정한 점이었다.
 
그러나 자겸의 엄한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비밀은 마침내 탄로되어 사실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비의 몸으로 관노와 통하다니… 전무후무한 추행이로다! 당장에 장경궁주를 폐출할 것이며, 그의 오라비 이자겸도 파직토록 하라!"
 
이리하여 야심만만하던 이자겸도 완전히 실각하고 만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