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18. 濁流 奔流

鶴山 徐 仁 2007. 3. 8. 20:20
팔만대장경선종은 일찍이 널리 경사(經史)를 읽고 문장이 뛰어나서 즉위하기 전부터 국정에 참여했으니 문종 십년에는 국원후(國原侯)가 되었으며, 다시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그러니 만큼 정계의 내막에도 정통해서 이자겸의 사람됨도 대강 짐작하고 꺼리던 터였다. 게다가 그 누이 장경궁주의 추행까지 있고 보니 이자겸을 파직시킨 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이자겸이 초야에 파묻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자기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처지라면 제삼자를 내세우고, 자기는 그 배경이  될 수도 있었다.
 
이자겸이 점을 찍은 사람은 역시 이자연(李子淵)의 손자이며, 시중 정(侍中 )의 아들이며 자겸과는 사촌간이 되는 이자의(李資義)였다. 이때 이자의의 누이동생은 선종의 비로 원신궁주(元信宮主)가 되어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원신궁주는 한산후 균(漢山侯 均)을 낳았으니 비록 사숙(思肅)왕후의 소생 욱(昱)이 있기는 하지만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그러므로 균이 왕위를 계승하는 날이면 이자의의 세도는 당대에 비길 자가 없을 것이었다.
 
또 이자의로 말할 것 같으면 항상 무뢰한을 모아가지고 활쏘기를 일삼는 건달이었다. 그런만치 잘 이용만 하면 실권은 자기가 쥘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자겸은 은근히 이자의와 왕래하고 있었다.
 
선종 십일년(AD 1094) 오월, 이자겸을 멀리 하던 선종이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때가 왔다고 이자겸은 생각했다.
 
물론 원자인 욱이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원래 몸이 약해서 언제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왕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면 한산후 균이 왕위를 이어 받을 공산이 컸다. 자겸이 그때를 기다리며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성미  급한 이자의가 그만 일을 저질렀다.
 
이자의는 전부터 사귀어 온 건달들을 집에 모아놓고 큰 소리를 탕탕 쳤다.
 
"내 말 좀 들어들 보게나, 상감께서 원래 허약하시니 오늘 내일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 수 없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대통을 엿보는 자가 많겠지만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누이동생 소생인 한산후를 받들어야 해. 그렇게 되면 나는 조정의 정사를 마음대로 주름잡을 수 있을 거고, 너희들은 공신이 되어 한 자리 톡톡이 할 수 있단 말이야."
 
이 말에 단순한 건달들은 좋다고 날뛰었다.
 
건달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자의의 휘하에는 이미 합문지후 장중(閤文祗侯  張仲), 중추원당후관 최충백(中樞院堂後官 崔忠伯), 흥왕사대사 지소(興王寺大師 智炤), 장군 숭렬(將軍 崇列), 택춘(澤春), 중랑장 곽희(中郞將 郭希), 별장 성보(別將  成甫), 성국(成國), 교위 노점(校尉 盧占), 대정 배신(隊正 裵信), 평장사 이자위(平章事 李子威) 등이 가담하고 있었다.
 
이자의는 자기 휘하에 문무요직에 있는 권신들까지 모아놓게 되자 제법 자신이 생겼다.
 
그리하여 궁중에 군사를 모우고 헌종에게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곧 무력으로 경쟁자를 물리치고 한산후를 왕위에 올려 앉히려는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아! 위태해. 위태한 짓이거늘…"
 
이자겸은 이자의의 거동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비록 의기양양하지만 이자의의 처사에는 너무나 빈틈이 많았다. 강력한 경쟁자가 나서서 모함을 하면 오히려 되잡힐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교활한 이자겸은 공연히 이자의를 이용하려고 접근하다가는 자기도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는 반대로 이때부터 이자의와 발을 끊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자의의 거사는 그보다 훨씬 능란하고 배경도 강한 경쟁자로 말미암아 꺾이고 말았다.
 
그는 다름 아닌 문종의 제삼자이며, 순종의 아우이고, 헌종의 숙부뻘이 되는 계림공 희(溪林公 熙)였다. 
 
계림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성품이 웅의과단(雄毅果斷)하였으며 경사를 널리 읽어 학식 또한 일세에 뛰어났다.
 
그러므로 일찍 부왕 문종은 그를 극진히 사랑하여 칭찬해 말하기를 "후에 왕실이 기울어졌을 때 다시 일으킬자는 바로 너밖에 없으니 자중하도록 하라." 했다고 전한다.
 
선종 구년, 왕이 서경에 행차했을 때 계림공도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 계림공이 거처하는 막사 위에는 영롱한 보라색 구름이 자욱이 서리어 있었다. 
 
이것을 보자 사람들은 서로 수근 거렸다.
 
"계림공 막사 위에 자운이 자욱하니 보통 일이 아닌 걸!"
 
"자운이란 임금이 될 분이 거처하는 곳에만 어리는 것이니까 아마 저분이 장차 상감이 되실는지도 알 수 없지."
 
그러나 그런 징조보다도 선종의 원자가 아직 나이 어린데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았으므로 왕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면 야심만만한 계림공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수근거렸을 것이다.
 
이자의가 한참 거사를 하려고 설치고 있을 때 계림공이 나이 사십이세, 사나이로서 대사를 치르기에 알맞은 때였다. 
 
이때 계림공은 수태사 겸 상서령(守太師 兼 尙書令)으로 있었는데 이자의들이 설치는 것을 보자 때는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어린 조카 헌종을 물리치고 그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그럴 만한 대의명분이 서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던 참인데 이자의 등이 설치고 다니니 핑계는 아주 좋았다.
 
그러나 신중한 계림공은 직접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전부터 뜻이 잘 통하는 평장사 소대보(平章事邵台輔)를 은밀히 불렀다.
 
소대보는 일찍이 문종 말년에 호부시랑(戶部侍郞)을 지냈으며 선종  때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시랑(中書侍郞) 등을 거쳐 헌종이 즉위하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된 역대의 중신이었다.
 
"소공,  근자에 궁중이 심히 소란스러운 듯한데 공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소대보도 한숨을 쉬며 "글쎄올시다. 이자의 등이 무리를 모아들이며 설치고 있으니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소이다."
 
이 말에 계림공은 비로소 가슴을 털어놓았다. 
 
"상감이 어리신 틈을 타서 외척들이 저렇듯 날뛰니 이대로 두었다간 왕족끼리 왕위를 둘러싸고 서로 피를 흘리는 참사가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일을 바로잡을 사람은 소공 뿐으로 아오. 여러 무장들 중에는 소공의 인덕을 흠모하고 소공의 분부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니 한 번 나라를 위해서 발벗고 나서시오."
 
소대보는 일이 너무 중대하므로 얼핏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계림공은 한층 음성을 높이어 "국가의 안위가 오직 공에게 달려 있고 일이 심히 시급한데 무엇을 주저하시오? 어서 마음을 정하시오."하고 독려했다.
 
이에 소대보도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거사할 것을 약속한 후 물러갔다. 소대보는 가장 친하게 지내는 상장군 왕국모(王國模)를 만나서 의논해 보았다.
 
왕국모는 선종 때 상장군이 되었으며, 헌종이 즉위하자 권상서 병부사(權尙書兵部事)가 된 군의 실력자의 한 사람이었다.
 
왕국모도 이자의가 설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므로 즉시 수하 장졸을 거느리고 이자의 일당이 방심한 틈을 타서 궁궐로 쳐들어갔다.
 
왕국모의 휘하에는 고의화(高義和)라는 장사가 있었다. 그는 전주 고산현(全州 高山縣) 사람으로 성깔이 사납고 힘이 장사였다. 일찍이 무(武)에 뜻을 두어 그 용력으로 군보대정(軍補隊正)이 된 인물이었다.
 
고의화는 여러 장졸에게 앞서서 궁중으로 달려  들어가다가 선정문(宣政門) 안에서 몇몇 부하의 호위를 받고 항전하는 이자의를 발견했다.
 
"이놈! 역적 이자의! 내 칼을 받아라."
 
고의화는 이렇게 한 마디 외치더니 한 손으로는 상전을 호위하려던 자의의 부하들을 집어던지고 한 손에 든 칼로 자의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렇게 되어 이자의의 야망도 덧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계림공의 야망만 채워 주는 셈이 되었다. 
 
괴수 이자의가 죽고 나니 그 도당들은 우왕자왕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장중, 최충백들은 선정문 밖에서 잡혀 죽고 말았다.
 
"이 기회에 역적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왕국모는 이렇게 외치고 군사들을 나누어 이자의의 아들  작(綽)과 숭열, 택준, 곽희, 성보, 성숙, 노점, 배신 등 십칠명을 잡아 죽이게 했으며  평장사 이자위 등 오십명을 사로잡았다가 나중에 멀리 귀양 보냈다.
 
이자의의 난이 평정되자 헌종은 그 공으로 소대보로 판리부사(判吏部事)를 삼고 왕국모로 병부사(兵部事)를 삼고 고의화는 산원(散員)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을 다시 계속해서 관직을 올려 주는  한편 소를 내리어 이렇게 말했다.
 
'지난번 간신들이 반란을 도모하였다가 평정되었는데 이것은 오직 장상(將相)들의 공이라 하겠다.  비록 이미 난을 평정하였으나 앞으로도 힘껏 나라일에 이바지하도록 하라.'
 
그러나 공신들의 관직을 올려 주고 칭찬을 하는 것만으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이자의 일당을 평정한 것은 계림공의 뜻에서 나온 것이며 계림공이 거사를 한 목적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 위한 것이었다. 
 
계림공은 심복인 공신들로 하여금 어린 왕을 은근히 강박하도록 했다.
 
"간신이 날뛰고 역적들이 날뛰는 것은 나라의 어른이신 상감이 유약하신 때문으로 아오.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으려면 실로 강한 상감이 계셔야 할 줄로 아뢰오."
 
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어린 임금으로선 어지러운 정국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강하고 능력있는 계림공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옳다는 말이었다.
 
왕과 모후 사국태후(思肅太后)는 번민했다. 물론 왕위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불안과 두려움이 앞섰다. 
 
실권을 쥐고 있는 것은 계림공과 그의 심복들이다. 그리고 계림공은 야심이 만만하다. 만약 끝까지 왕위를 물려주지 않는다면 무력하고 어린 왕은 생명조차 보존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왕은 눈물을 머금고 선위(禪位)할 것을 작정했다.
 
"짐은 선고(先考)의 유업을 계승하여 대위에 올랐으나 나이 어리고 몸도 약하여 국권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뜻을 펴지 못한바 많았느니라. 그리하여 권신들은 서로 음모와 파쟁을 일삼게 되고 간신과 역적들은 궁중에까지 침입하여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짐의 덕이 부족한 탓이라. 이로써, 임금됨의 어려움을 통절히 느낀 나머지 왕위를 물려 줄 사람을 은밀히 가려 본 결과 숙부되는 계림공이야말로 왕자(王者)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분이라. 이에 그분에게 선위할 것인즉 신민들은 마땅히 그분을 받들어 모시도록 하라. 짐은 퇴위한 후 후궁에 거처하여 남은 목숨이나 보존할까 하노라."
 
왕은 이렇게 말한 다음 곧 근신 김덕균(金德均) 등에게 명하여 계림공 희를 맞게 하고 뒤이어 선위한 다음 후궁으로 물러갔으니 때는 헌종 원년 초겨울 십월, 어린 왕이 등극한지 만 일년 사개월만이었다.
 
그리고 애절히 바라던 남은 목숨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다. 
 
그후 이년도 못 된 숙종 二년(AD 1097) 윤이월, 봄소식이 겨우 들리는 흥성궁(興盛宮)에서 나이 십사세로 헌종은 세상을 떠났다.
 
헌종이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난 원인이 원래 몸이 약했기 때문인지 또는 그를 눈에 가시로 안 새 임금이 어떤 손을 썼는지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헌종의 운명은 이조 때의 비극의 소년왕 단종(端宗)의 운명을 방불케 하는바가 있다.
 
헌종이 선위의 분부를 내리자 계림공은 목마르도록 재삼 사양하는 체하다가 마침내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하였으니 곧 제十五대 숙종(肅宗)이다. 
 
숙종은 즉위하는 날로 이자의 난의 불씨가 된 한산후(漢山侯) 형제 두 사람과 그들의 생모 원신궁주 이씨(元信宮主 李氏)를 경원군(慶源郡=지금의 仁川)으로 귀양 보냈다.
 
숙종은 능력 있는 임금이었으니 이 점도 이조 때의 세조(世祖)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는 즉위한 이듬해에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주화(鑄貨)를 만들어 통용케 했으며 다시 숙종 칠년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하여 통용케 하였다. 
 
또 불교를 숭상하여 많은 불회(佛會)를 열고 민심을 종교의 힘으로 묶어 놓았다.
 
한편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윤관(尹瓘)의 진언을 받아들여 군비 확충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런 임금인 만큼 간교한 이자겸이 파고 들어갈 구석이 없을뿐더러 나이 이미 노경에 접어든 탓도 있고 해서 여색(女色)으로 꼬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은인자중(隱忍自重), 이자겸은 끈덕지게도 때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자겸이 바라던 때는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숙종 십년 구월 경부터 왕은 신병으로 앓기 시작 하더니 그 다음달 십월, 신병을 무릅쓰고 서경(西京)으로 행차했다가 도중에서 승하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