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精神修養 마당

法頂의 山中書信

鶴山 徐 仁 2007. 2. 28. 19:45
법정스님산중에 외떨어져 살면서 내가 흔히 받는 질문 중 하나는, 혼자서 외진 곳에 살면 무섭지 않으냐다. 무서워하면 홀로 살 수 없다.
 
무서움의 실체란 무엇인가. 무서움의 대상보다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 무서움이 일어난다. 밤이나 낮이나 똑같은 산중 환경, 다만 조명상태가 밝았다 어두웠다 할 뿐인데 마음에 그림자가 생기면 무서움을 느낀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나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 있는 생명체로 대한다면 그 품은 한없이 너그럽다. 무섭기는 갑자기 돌변하는 인간의 도시다.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인 사건 사고가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실체보다도 두려워하는 그 마음이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두려움은 몸의 근육을 마비시키고 혈액순환에도 영향을 미쳐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명의 활동을 저해한다.
 
우리 마음은 자력과 같아서 내부에 두려움이 있으면 온갖 두려움의 대상들이 몰려온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 두려움이 옮겨간다. 병균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도 전염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순례자가 순례의 길에서 흑사병(페스트)과 마주치자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로 가는 길이냐?”
 
흑사병이 대답했다.
 
“바그다드로 5천명을 죽이러 가는 길이오.”
 
며칠 뒤 순례자는 되돌아오는 흑사병을 보고 그에게 따졌다.
 
“너는 일전에 나한테 바그다드로 5천명을 죽이러 간다고 했는데, 어째서 3만명이나 무고한 생명을 죽였느냐?”
 
이때 흑사병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오. 나는 내가 말한 대로 5천명만 죽였소. 그 나머지는 두려움에 질려서 자기네들 스스로가 죽은 것이오.”
 
두려움이 사람들을 죽게 한 것이다. 세상사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응하고 있다. 이것이 우주의 메아리이며 그 질서다. 어두운 생각 속에 갇혀서 살면 우리들 삶 자체가 어두워진다. 애걸복걸하면서 국제구제금융으로부터 묵은 빚을 갚기 위해 새 빚을 얻어와야 하는 우리네 처지를 생각하면 착잡하고 암담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런 일이 남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 분수를 모르고 헤프게 살아온 결과임을 상기할 때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 이런 경제난국이 아니면 무슨 힘으로 허세와 과시와 과소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또한 살아 있는 우주의 흐름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나타난 결과다. 어떤 현상이든지 우리의 초대를 받아 우리 앞에 온 것이지 우연히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지나간 과거사에 얽매일 것 없이 새로 시작한다는 결의와 각오다.
 
인간의 행복과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근원적으로 생각을 돌이켜야 하고, 그동안 잘못 길들여진 생활습관을 하나하나 고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한탄의 늪에서 벗어나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마음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이어주는 법칙은 놀랄 만큼 정확하고 빈틈이 없다. 걱정과 근심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늘 걱정 근심거리만 생긴다. 그러나 희망에 넘치고 신념에 차 있는 마음은 희망과 신념에 찬 우주의 기운을 자기쪽으로 끌어들인다. 비관과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면, 낙관과 희망은 건전한 삶에 이르는 재기의 통로다.
 
오늘과 같은 암담한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상황 아래서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기죽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인생은 끝없는 시도요 실험 아닌가. 걱정 근심을 미리 가불해 쓰지 말고, 그날그날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얼어붙은 겨울 속에서도 봄은 움튼다.
 
1998년 1월 18일

 

 

 

법정스님며칠전에 남도를 다녀왔다. 섬진강변에는 매화가 구름처럼 피어 있었다.
 
경제적인 불황과는 상관없이 이 땅의 여기저기서 꽃이 피어나고 있다. 봄은 남쪽에서부터 꽃으로 피어나고, 겨울은 북쪽에서부터 눈으로 내린다. 그 어떤 세월에도 어김없는 이런 계절의 순환이 우리를 받쳐주고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게 여겨졌다.
 
이와 같은 순환은 자연계의 질서일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도 적용된다. 한쪽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환인데 반해서 다른 한쪽은 인위적인 순환이다. 지금 우리 앞에닥친국제통화기금(IMF) 한파는 밖에서 휘몰아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불러들인 인위적인 재난이다. 그러니 세상일은 우연히 되는 일도 없고 공것도 없다. 모두가 뿌려서 거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밀려나 그 가족들과 함께 살길이 막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는 절박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국민의 세금으로 번쩍거리면서 지내고 있는 이 땅의 정치꾼들은, 내가 옳네 네가 그르네 하면서 수렁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실로 한심스러운 작태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사로잡히면 평온하지 못하다. 마음이 아무것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을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고, 그때 그 마음은 본래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 기왕에 쥐었던 권력을잃었다고해서 너무 연연해서도 안되고, 새로 얻었다고 해서 함부로 휘둘러서도 안된다.잃은쪽이나 얻은 쪽이나 순환의 질서 앞에 겸허해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을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당리당략에만 혼을 빼앗겨 민심을 잃는다면 그런 정당은 미래가 없다. 집안에 불이 났으면 모두가 나서서 함께 불을 끄는 일이 시급한데, 네탓 내탓을 따지기만 한다면 어떻게 불이 꺼지겠는가.
 
우리 시대에 정권이 바뀐 것도 민심에서 싹튼 순환의 질서로 보아야 한다. 말이 없던 민중이 선택한 순환의 질서다. 그래서 말없는 민중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요즘의 정치적인 혼미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민중은 머지않아 있을 지방선거에서 순환의 질서를 다시 한번 보여줄 것이다. 정치꾼들은 이런 민중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집권 여당은 지나간 정권에서 저질러진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순리를 벗어난 무리수를 써가면서 강행한 그 폐해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이끌어가는 입장이니 자만하지 말고 한걸음 물러설 줄도 아는 아량과 여유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어려운 결단이겠지만, 총리인준 문제로 정국이 꼬여 안 풀리면 차선책을 쓸 수도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당사자의 지혜로운 선택이 따라야 할 것이다. 눈앞 일로만 보면 첫 라운드에서 참패하는 것 같겠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지는 길이 곧 이기는 길이다. 나라일이 위급할 때 자기 한 몸을 희생할 줄 아는 그 도량과 용기가 ‘서리’라는 가시방석보다 훨씬 명예로울 것이다. 이 또한 정치적인 역량으로 평가될 것이고,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현명한 전술일 수도 있다. 왕년의 집권 여당에서 현재의 야당으로 물러앉은 한나라당은 권력의 덧없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권력도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순환한다는 교훈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무고한 국민이 겪게 된 이런 재난이 어떻게 해서 초래되었는지, 집권 여당이었던 자신들의 책임소재를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못먹는 밥에 재를 뿌리고 있다는 국민적인 지탄을 받지 않도록 각성해야 한다.
 
사마천은 그의 ‘사기(史記)’에서 말한다. “정치의 도리는 화(禍)가 될 수 있는 일이라도 그것을 잘 활용하여 복이 되게 하고, 실패를 돌이켜 성공으로 이끄는 데에 있다.”
 
누가 말했던가. 사람은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해도 정치쪽에서 관련해 온다고.
 
1998년 3월 15일
 

 

 

 

법정스님내가 사는 곳은 겨울이면 영하 20도를 오르내린다. 지대가 높고 또 개울가라 무척 춥다.
 
대관령이 영하 몇 도라고 일기예보가 나가는 걸 보면 내가 사는 곳이 대개 4,5도 더 낮은 듯하다. 얼음이 두꺼워 개울에서 물을 길어올 때는 도끼로 얼음을 깨야만 한다. 깨고 나면 또 금방 얼어붙는다.
 
추운지는 별로 모르겠지만 숨을 쉬면 코가 찡찡해지고 눈이 어릿어릿하다. 그 정도인데 견딜만은 하다. 이보다 더 추운 지방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가. 계절이라는 게 추울 땐 추워야 하고 더울 땐 더워야 한다
 
산중은 사실 여름보다는 겨울이 더 지내기 좋다. 여름도 내가 사는 곳은 지대가 높아 모기나 파리가 없기 때문에 아주 쾌적하지만, 산중이라는 곳이 다 그렇듯 겨울이 차분하다.
 
둘레가 조용하고, 가끔 뒷골에서는 올빼미나 노루 우는 소리라든가 바람소리가 지나가고, 밤으로는 등잔불을 켜고 이렇게 벽에 기대 앉아 등잔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 이런 공간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쁘게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지만 혼자 거기서 조촐한 삶의 기쁨을 누릴 때가 많다.
 
그 전에 불일암에 있을 때도 혼자 사니까 가끔 사람들이 와서 홀로 지내기가 무섭지 않느냐고 묻곤 했다. 무섭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다. 밤이라고 해도 한낮과 똑같은 것이다. 그 골짜기, 그 산, 그 나무, 그 바위 그대로 있는데 단지 조명 상태가 어두워진 것 뿐이다. 그런데 마음이 무서움을 지어낸다.
 
내가 세속에 있을 때는 무서움을 많이 탔었다. 특히 시골집이니까 변소에 가려면 꼭 할머니를 앞세우고 갔다가는 빨리 튀어나오곤 했다.
 
그러다가 무서움이 사라진 계기가 있었다. 지리산 쌍계사에 있을 때의 일인데 한번은 섣달 그믐날 무슨 일로 밖에 나왔다가 화개장에서 내려 거기서부터 사오리 길을 걸어야만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반은 뛰다시피 하고 갔더니 옷이 전부 땀에 젖어 있었다.
 
그 뒤부터는 무서운 생각이 사라졌다.
 
무서움이란 것이 내 마음 안에서 오는 것임을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다.
 
사실 혼자 사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면 다 외롭기 마련이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무딘 사람이다.
 
물론 너무 외로움에 젖어 있어도 문제이지만 때로는 옆구리께를 스쳐가는 외로움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 정화, 자기 삶을 맑힐 수가 있다. 따라서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    내 경우는 완전히 홀로살이가 되어 이제는 고독 같은 것도 별로 느끼지 않고, 그저 홀가분하게 지낼 뿐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좀 괴팍할 것이다. 좋게 말하면 개성들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그래서 혼자 살기 마련이다. 그것도 습관인 것 같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는 홀로 있음으로써 함께 있을 수 있다. 너무 한데 얽혀 함께 지내다 보면 더불어 살아가는 고마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내가 수도 생활을 하는지 그 의미를 잃게 된다. 또한 자기 개성이나 자기 빛깔 같은 것도 상실된다.
 
혼자 있어 버릇하니까 누구한테 폐 될 것도 없고, 또 자기 하고 싶은 일도 할 수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자연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큰 기쁨이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그 산골 아니면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서 그렁저렁 지내고 있다.
 
나는 혼자서 살기 때문에 차 타고 어디를 지나가다가도 산자락에 외떨어져 있는 집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한번 가보고 싶고, 어떤 사람이 사는가 들여다보고도 싶다. 거창한 집이 아니고, 조그만 오두막 같은 걸 보면 무척 정답고, 가서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기웃거려 보고 싶다.
 
이제 어느 곳을 가나 큰 절 주변은 거의 오염되었다. 환경만 오염된 것이 아니고 절 자체도 과소비를 하는 곳이 많다. 생활 환경 자체도 오염되어 절 같지도 않고, 따라서 우리 같은 경우는 절밥을 오래 얻어먹은 습관 때문에 어딜 가면 눈에 띄고 귀에 거슬리는 것이 많다.
 
이제 홀로 떨어져나와 살게 되니  보지 않고 듣지 않으므로 마음 쓸 일도 없다. 다만 이렇게 살면서도 과연 수도자로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이 화두처럼 내게 늘 과제로 떠오른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세상이든 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음이 진정한 인간의 마음으로서 맑고 투명하다면 그 그림자인 세상도 맑고 투명해진다. 세상에서 온갖 사건, 사고와 비리들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맑고 향기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꼭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자기 존재에 대한 그때그때의 물음, 나는 누구인가, 어떤 것이 내 온전한 마음인가, 거듭거듭 물음으로써 삶이 조금씩 개선되고 삶의 질도 달라진다. 우리가 너무 외부적인 것, 외향적인 것, 표피적인 것, 이런 데만 관심을 갖다 보니까 마음이 황폐해졌다. 옛날보다는 훨씬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들은 더 허전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현대 문명의 해독제는 자연 밖에 없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기댈 데가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의 존재와 격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크게 보면 우주 자체가 커다란 생명체이며, 자연은 생명의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자연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커다란 우주 생명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을 망가뜨릴 수 없다.
 
동양의 전통적인 생각 속에서는 커다란 산이라도 하나의 생명체로 여겼다.  그래서 등산이란 말은 쓰지 않았다. 꼭 입산, 산에 들어간다고 했지 산에 오른다는 말을 감히 하지 않았다.
 
자연은 우리가 하나의 수단으로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생명의 근원으로서, 커다란 생명체로 여겨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오늘과 같이 지구의 환경 오염이나 과소비 문제가 안 생겼을 것이다.
 
자연을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 같은 문제가 생겼다. 산에서 살다보면 자연처럼 위대한 교사가 없다.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 그것은 관념이고 피상적인 것이다. 자연으로 얻어듣는 것, 그것이야말로 근본적인 것이고 그때그때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또 자연은, 태양과 물과 바람과 나무는,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 준다. 우리는 그걸 감사하게 받아쓰면서 활용해야 하는데, 그것을 허물고 더럽히는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생명의 근원을 우리가 허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음을 맑게 하고 자연 속에서 많은 생명체들과 교감하며 나누면서 사는 기쁨, 그것을 내가 낱낱이 다 알리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또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 된다. 꽃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꽃이라면 어제 핀 꽃하고 오늘 핀 꽃은 다르다. 새로운 향기와 새로운 빛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 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자기가 살던 집을 훌쩍 나오라는 소리가 아니다. 낡은 생각에서, 낡은 생활 습관에서 떨치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눌러 앉아서 세상 흐름대로 따르다 보면 자기 빛깔도 없어지고 자기 삶도 없어진다. 자주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남의 장단에 의해서, 마치 어떤 흐름에 의해서 삶에 표류당하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생명은 늘 새롭다. 생명은 늘 흐르는 강물처럼 새롭다. 그런데 틀에 갇히면, 늪에 갇히면, 그것이 상하고 만다. 거듭거듭 둘레에 에워싼 제방을 무너뜨리고라도 늘 흐르는 쪽으로 살아야 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일단 새롭게 살기가 누구보다도 손쉬울 것이다. 나는 이렇게 묻는다. 진짜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늘 스스로 묻는다. 그러면서도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싶진 않다. 늘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가령 서울에 오면 가끔 큰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데, 나하고는 전혀 상관도 없는, 내 전공분야하고는 상관도 없는 책들을 고르기도 한다. 그것들을 읽어보면 거기서 얻을 게 많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는 시오노 나나미라는 일본 작가의 책을 읽어봤더니 매력 있는 남성에 대한 이론이 있었다. 자기 빛깔을 지니고, 세속에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매력있는 남성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 책을 통해서 과연 나는 남으로부터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삶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돌아볼 수 있다. 내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내 전공과는 상관없는 책이나 사상을 접하곤 한다. 나는 늘 그렇게 새롭게 살고 싶다.
 
내가 전에 살던 불일암에는 서너 달에 한 번씩 가끔 가다 들른다. 요즘 강원도에 살면서 거처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전기도 안 들어 오고 전화도 없는데, 그전 내 성격 같아서는 기를 쓰고라도 전기를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사는 의미가 없다. 어딜 가나 전기는 있다.
 
또 일단 전기가 들어와 보라. 이제 냉장고다, 텔레비젼이다, 오디오다, 비디오다, 그밖에 무슨 빵 굽는 기계다, 세탁기다, 이게 다 곁들여 올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산중에서 사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요즘에 와서는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몰라도 주어진 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대로 수용하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다.
 
불편하다는 것, 그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가 너무 편리하게 살다 보니까 잠시라도 전기가 나가고 전화가 끊어지면 안절부절 못하고 모든 기능이 정지된다. 그러나 내가 사는 곳에는 그런 것들이 아예 없고, 또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이 땅에 살면서도 전기세와 수도세를 내지 않는다. 따라서 내 자신의 어떤 잠재력,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잠재력이 마음껏 드러난다.
 
지난 해 내가 변소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전에는 변소가 없었다. 사람들이 들으면 조금 언짢은 소리겠지만, 비 오는 날은 우산을 쓰고 밭에 가서 구덩이를 파 가지고, 거기서 동물처럼 배설하고는 덮어 버렸다.
 
그런데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내리면 그것도 불편했다. 그래서 개울가에서 막돌을 주워다가 쌓아올리고 굴피로 지붕을 덮어 뒷간을 하나 만들었다.
 
혼자 하니까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 달 가까이 걸렸는데 좀 불편하지만 최소한 내가 노력해서 그런 건물을 짓고 나니까 훨씬 흐뭇하고 보람이 있었다. 
 
우리가 너무 편리한 문명의 이기에만 의존하다 보니까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자꾸만 소멸되어 간다. 그리하여 문명의 노예처럼, 조금만 문명의 장치가 고장나도 옴짝 못할 정도가 되었다.
 
내가 사는 곳에는 다행히 전기가 안 들어오기 때문에 불편이야 하지만 마음은 더 편하다.
 
전에는 촛불을 켰는데 겨울에는 외풍에 초가 팔락거려서 요샌 램프를 켠다. 저녁 예불 끝에 램프를 켜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월이 고개를 넘는 것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만일 전기가 들어오고 여러 가지 편리한 장치가 있다면 그걸 누리지 못할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밖에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안에서 향기처럼,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것은 많고 큰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사소하고 아주 조그마한 데서 찾아온다. 조그만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 같은 것을 누릴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너무 문명의 이기에 의존하지 말고 때로는 밤에 텔레비젼도 다 끄고, 전깃불도 끄고, 촛불이라도 한번 켜보라. 그러면 산중은 아니더라도 산중의 그윽함을 간접적으로라도 누릴 수가 있다.
 
또한 가족들끼리, 아니면 한두 사람이라도 조촐한 녹차를 마시면서 잔잔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거기서 또한 삶의 향기가 피어나올 수 있다. 때로는 전화도 내려놓고, 신문도 보지 말고, 단 십 분이든 삼십 분이든 허리를 바짝 펴고 벽을 보고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 물어보라.
 
이렇게 스스로 묻는 속에서 근원적인 삶의 뿌리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명의 커다란 이기로부터 벗어나 하루 한 순간만이라도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따뜻한 말을 나눈다든가 눈매를 나눈다든가 일을 나눈다든가, 아니면 시간을 함께 나눈다든가,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와의 유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사는 기쁨도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외떨어져 독립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그건 사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다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내가 사는 곳에는 눈이 쌓이면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서 내려온다. 내가 콩이나 빵부스러기 같은 먹을 걸 놓아준다. 박새가 더러는 오는데, 박새한테는 좁쌀이 필요하니까 장에서 사다가 주고 있다.
 
고구마도 짐승들과 같이 먹는다. 나도 먹고 그 놈들도 먹는다. 밤에 잘 때는 이 아이들이 물 찾아 개울로 내려온다. 눈 쌓인데 보면 개울가에 발자국이 있다. 토끼 발자국도 있고, 노루 발자국도 있고, 멧돼지 발자국도 있다. 물을 찾아 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아이들을 위해서 해질녘에 도끼로 얼음을 깨고 물구멍을 만들어 둔다. 물구멍을 하나만 두면 그냥 얼어 버리기 때문에 숨구멍을 서너 군데 만들어 놓으면 공기가 잘 통해 잘 얼지 않는다.
 
그것도 굳이 말하자면 내게는 나눠 갖는 큰 기쁨이다. 나눔이란 누군가에게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法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