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신라 궁중비사] 1. 六村과 鷄林

鶴山 徐 仁 2007. 2. 21. 21:37
첨성대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가 각각 왕국(王國)으로서 삼분천하(三分天下)의 삼국시대를 이루기 이전에 이들의 건국은 신라가 가장 빨랐다.
 
삼국시대 이전에 남반도(南半島)에는 삼한시대(三韓時代)로서 북쪽에 진한(辰韓), 서쪽에 마한(馬韓), 그 동쪽에 변한(弁韓)이 있었다.
 
진한 남부 현재의 경주(慶州) 지방에 서라벌(徐羅伐)이라는 소부락국가(小部落國家)가 생겼다가 그것이 신라 왕국으로 발전됨에 따라서 변하 전체(현재의 경상도)가 영토로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신라의 영토는 진한 일부와 변한 전체에 미쳤던 까닭에 진변(辰弁)의 부락국가는 신라의 왕국으로 발전했다.
 
진변지방은 기후가 온난(溫暖)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인심이 순박해서 풍부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또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대륙의 한(漢) 나라로부터 침략 지배도 받지 않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비교적 보수적이어서 강력한 국방력과 중앙집권(中央集權)을 필요로 하는 왕국(王國)으로 발달함이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었던 것이다.
 
원시신라(原始新羅)에 있어서는 신라왕국의 모체(母體)인 서라벌이 진한의 일부에 형성되어서 부락협의체(部落協議體)로서 자치(自治)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여섯 개의 마을로 구분되어 있었으므로 육촌(六村)이라 하였고 육부(六部)라고도 했다. 이 마을은 군(郡)보다는 작은 정도의 면적을 가진 단위부락이었으며 그 중심은 오늘의 경주였다.
 
서라벌의 六촌은 지리적 단위였을 뿐 아니라 여섯 가지 성(姓)을 가진 주민으로 배정되어 있는 씨족부락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대인(古代人)에게는 성이 없었는데 같은 성의 주민을 한 부락 한 부락으로 모아서 살게 하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필경 각 부락의 원주민에게 같은 성을 붙여서 불렀던 것이 아닐까.
 
그것도 그 당시라기보다는 후세의 전사설화(傳史說話)가 윤색(潤色)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각 마을에 유력한 어른(首長)의 성을 따라서 그 자손과 일족(一族) 뿐 아니라 그의 낭도(郎徒)까지 한 성(姓)으로 대표해서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육촌을 육성으로 배정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기록은 약간 이해하기 어렵다.
 
서라벌 육촌(육부)의 육성(六姓)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었다.
 
(一). 알천 양산촌(閼川陽山村)은 담암사(曇岩寺)부근의 지역이다. 알평(謁平)이라는 어른이 표암봉(瓢岩峰)에 강하해서 양부(梁部)의 이씨(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양부에는 파체(波替), 동산(東山), 피상(被上), 동촌(東村)의 부락들이 속해 있었다.
 
(二).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어른은 소벌도리(蘇伐都利)로서 형산(兄山)에 강하하여 사량부(沙梁部)의 정씨(鄭氏)의 시조가 되어 나중에는 남산부(南山部)라고 일컬었는데 구량벌(仇良伐),  마등조(馬等鳥),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의 남부 촌락이 이에 속해 있었다.
 
(三).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어른은 구례마(仇禮馬)로서 이산(伊山)에 강하하여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의 손씨(孫氏) 시조가 되었다. 나중에는 장복부(長福部)라고 일컬었는데 박곡산 등 서부의 마을들이 이에 속해 있었다.
 
(四). 취산 진지촌(嘴山 珍支村)의 어른은 화산(花山)에서 강하한 지백호(智伯虎)로서 본피부(本被部) 최씨(崔氏)의 시조가 되었다. 나중에 통선부(通仙部)라고 일컬었는데 시파(柴巴) 등의 동남부의 부락들이 속해 있었다.
 
(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은 명활산(明活山)에서 강하한 지타(祗 )가 어른으로서 다스렸는데 한기부(韓岐部)의 배씨(裵氏)의 시조가 되었다. 나중에 가덕부(加德部)라고 일컬었는 데 상서지내아(上西知乃兒), 하서지내아(下西知乃兒) 등의 마을들이 속해 있었다.
 
(六).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어른은 금강산(金剛山)에서 강하한 호진(虎珍)으로서습비부(習比部)의 설씨(薛氏)의 시조가 되었다. 나중에 임천부(臨川部)라고 일컬었는데 물이촌(勿伊村), 잉구진촌(仍仇珍村), 갈곡(葛谷) 등의 마을이 이에 속해 있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서라벌 여섯 마을을 다스린 어른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덕 높은 인물로서 신격화(神格化)되어 있다. 그리고 이 여섯 마을의 명칭을 육부(六部)로 고치고 육성(六姓)을 명한 것은 서러벌의 후신(後身)인 신라의 삼대왕(三代王)인 유리왕(儒理王) 九년의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중흥부(中興部)를 머리라 했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비라 했고, 임천부(臨川部)를 아들이라 했고, 가덕부(加德部)를 딸이라고 했는데, 그런 말이 왜 생겨났는지 알 수 없다. 신라 왕국에서 또 다른 신화적(神話的)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한 땅의 일부였던 여섯 마을은 무슨 공동적인 문제가 있으면 마을 어른들이 모여서 협의하고 부락사회를 다스렸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점점 진하의 지배에서도 떠나고 마한의 지배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북쪽과 서쪽과 남쪽 나라에서 침략해 오거나 교섭이 있을 때, 이에 대한 대책이 문제였다.
 
또 육촌 가운데서도 서로 이해가 충돌되는 경우도 있었다. 평화와 풍류생활에 지나쳐 민심이 방종해지고 도의가 문란해지는 경향도 있었다.
 
“우리 육촌도 한데 뭉쳐서 나라를 세우고 덕있는 어른을 뽑아서 임금으로 모시자.”
 
드디어 이런 여론이 마을 어른(首長)을 비롯한 유력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갑자기 훌륭한 임금을 어디서 맞아 오겠소. 우리들 가운데서 상의해서 뽑으면 어떻겠소?”
 
마을 어른들은 오랫동안 큰 숙제로 삼고 상의해 왔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있어야지요?”
 
“아냐, 모두 왕의 자격은 있지만 친한 친구 사이가 어찌 군신(君臣)의 상하로 갈리겠소?”
 
“하긴 왕이 되는 사람 하나는 좋을지 모리나 신하되는 사람들은 불평이 있을지 모르겠소?”
 
그러나 말로는 그러면서도 사실은 아무도 왕이 되려는 욕심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가 왕의 자격에는 부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또 친구를 신하로 거느리게 되면 우정에 배반되는 행동이라고 사양할 만큼 그들은 순진하고 예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비밀투표로 여섯 명이 호선(互選)을 해보았다. 그러나 당선된 사람은 굳이 사양하고 왕이 되기를 거절했다. 그들은 여러 번 비밀선거를 했고 여섯 명이 다 한 번씩 왕의 자격을 얻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말았다.
 
“우리들 여섯 명은 결국 왕의 자격이 없는 모양이요?”
 
“운이 없는지도 모르지.”
 
“왕이 될 욕심이 서로 없기 때문에 여섯 마을이나마 평온 무사하게 지낸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한 번씩 왕이 되어본 셈이요. 그러나 우리보다도 훨씬 훌륭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는 이대로 지낼 수밖에 없을 것 같소.”하고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서 왕을 뽑는 것은 단념하고 새로운 인물을 맞아서 왕을 삼고 나라를 세우려는 꿈만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인물은 좀체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건국과 초대왕(初代王) 추대문제를 토의하려고 각각 아들을 데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알천(閼川) 언덕에 모였다. 계절은 삼월 초하루 화창한 보철이었고 연대로는 전한(煎漢) 지절 원년(地節元年)이었다.
 
그들은 시냇가에서 천렵을 하면서 상의했으나 결론은 덕이 높은 분을 모시자는 막연한 방안밖에 없었다.
 
“하늘이 우리에게 좋은 분을 임금으로 보내주실 것이니 높은 산에 올라가서 천기를 봅시다.”
 
그들은 높은 산 위로 올라가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기름진 경주분지(慶州盆地)의 평야에는 보리밭이 푸르고 울창한 숲에도 새로운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마을마다 복사꽃, 오얏꽃이 붉고 희게 핏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오 이 아름다운 강산에 새 나라를 세우려는 우리들에게 하늘께서는 빨리 새로운 왕을 보내 주십시오.”
 
가장 연장자의 마을 어른이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이때 눈 밝은 한 사람이 놀라는 소리로 외쳤다.
 
“앗, 저 남쪽 땅에 오색 안개가 덮이고 번갯불 같이 번쩍이는 것이 보인다.”
 
모두 그 쪽을 내려다보았다.
 
“허어 이상한 서기(瑞氣)다. 저기가 어디쯤 될까?”
 
“양산(楊山) 곁 계림(鷄林) 속 나정(羅井) 근처가 아닐까요?”
 
“음, 나정에서 무지개가 솟다가 그냥 퍼져서 땅을 덮고 있군. 그런데 저 은빛을 내며 움직이는 것이 말일까 사람일까?”
 
“백마가 분명하다. 그런데 앞다리를 꿇고 자꾸 절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상하니 다들 가봅시다.”
 
그들 일행은 무슨 상서로운 징조가 있을까 기대를 가지고 계림의 나정 샘터로 내려갔다. 그들 일행이 나정 샘터 가까이 가자 무엇을 향해서 꾸벅꾸벅 절하고 있던 은빛 백마가 놀란듯이,“오호흥!”한 마리가 크게 울더니 날개를 펴고 하늘로 올라 가 벼렸다.
 
“아마 하늘께서 귀하신 아드님을 천마(天馬)에 태워서 강하(降下)시키신 모양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임금을 보내신 모양이다.”
 
모두들 가슴을 두근거리며 가보자, 계수나무 밑에 커다란 박모양으로 생긴 붉은 알 한 개가 잔디 위에 놓여 있었다.
 
“아마 이 알에 무슨 기적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마을 어른들은 나정물에 손과 발을 씻고 정성껏 그 큰 알을 가르자 속에서 훌륭한 옥동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기뻐하며 옥동자를 곧 신성한 동천(東泉) 물에 목욕시키자 순간, 눈부신 광채가 전신에서 발해서 온 세상이 환해졌다.
 
그와 동시에 봉황(鳳凰)을 비롯한 각종 새들이 공중에 모여서 기쁜 합창을 하듯이 울면서 빙빙 돌았다. 그리고 기린(麒麟)을 비롯한 각종 짐승도 주위에 모여들어 춤추며 돌아다녔다.
 
“이 옥동자는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오. 우리가 원하는 새 나라의 왕으로 보내셨군요.”
 
“우리 왕으로 잘 길러 모십시다. 이름을 무어라고 지어 올릴까?”
 
육촌의 어른들은 왕의 이름을 상의한 끝에 알이 박 모양 같았으므로 성은 박씨(朴氏)로 정하고 광채가 세상을 밝게 했다고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정했다. 그리고 왕의 위호(位號)를 옥동자가 입을 열고 처음 말한 [거서간]을 따서 거서간(居西干)이라고 지었다. 그 후로 신라 초대에는 왕을 거서간이라고 하게 되었다.
 
“하느님 아들이 강하해서 이 나라의 왕이 되셨다.”
 
여섯 마을의 백성들은 모여 와서 경축의 풍악을 올리면서 성대한 하례식을 올렸다.
 
“하느님의 아들 왕께 덕 있는 처녀를 맞아서 왕후를 삼아야겠는데 어떤 복있는 처녀가 뽑힐까?”
 
길쌈 잘하고 노래 잘하는 미소녀들의 가슴은 왕후의 꿈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지상의 인간은 하느님 아들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었다.
 
마침 그날 사량리(沙梁理)의 알영정(閼英井) 샘터에 계룡(鷄龍)이 나타나더니 왼편 옆구리에서 아름다운 소녀가 탄생했다.
 
“같은 날 두 샘터에서 기적같이 생남 생녀를 했으니 천생연분(天生緣分)이다.”
 
경희(驚喜)한 백성들은 이 용녀(龍女)를 박혁거세왕의 왕후로 삼았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흠은 이 아름다운 용녀의 입술이 계룡을 닮아서 닭의 부리와 같이 뾰족하고 딱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흠은 월성 북천(月城北川) 물에 목욕시킨 순간에 곱게 떨어지고 붉고 부드러운 입술로 변해졌다. 그래서 그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러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름은 알영 샘터에서 탄생했으므로 알영이라고 지었다.
 
육촌의 백성들은 초대의 왕과 왕후를 모실 왕도를 현재의 경주에 정하고, 대궐을 남산 서편 기슭의 명당에 웅장하고 호화롭게 지었다. 이 궁전 안에서 박혁거세와 알영을 곱게 봉양한 뒤에 열세살이 되자 대혼식(大婚式)과 함께 왕의 즉위식(卽位式)을 올린 후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하고 정식으로 건국했다(西紀前五十九).
 
종래 육촌의 어른들은 대신이 되어서 어린 박혁거세왕을 보필했다.
 
이렇게 건국된 서라벌 나라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 혹은 계림국(鷄林國)이라고 했다.
 
이 서라벌의 국세(國勢)가 점점 커짐에 따라서 신라(新羅)로 국명을 고치고 변한 전체를 국토로 확장해서 오랫동안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해서 단일민족에 의한 단일국가인 대신라(大新羅)의 통일위업(統一偉業)을 이룩했고 동양에서 으뜸가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빛냈던 것이다.
 
이러한 대신라와 건국시조(建國始祖)인 박혁거세왕은 六十一년 동안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서 태평세월의 복을 누리게 했다. 왕이 승하하자 오체(五體)가 각각 떨어져 버리자 대신들이 송구히 여기고 오체를 모아서 함께 장례지내려 하자, 왕후가 천의(天意)라 하고 탐암사 북쪽 명당에 오체를 따로 따로 묻어서 다섯 개의 능을 일렬로 썼는데 이것을 총칭해서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길게 늘어선 배열이 뱀 모양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