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신라 궁중비사] 2. 龍卵에서 脫解된 四代王

鶴山 徐 仁 2007. 2. 21. 21:40
첨성대초대 임금 박혁거세가 승하한 뒤에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 임금이 제二대 남해왕(南解王)이다.
 
이 왕은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이라고도 했지만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차차웅은 신라의 말로 큰 어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신라왕 가운데서 차차웅이라고 불리운 것은 남해왕 뿐이다.
 
왕비는 운제산(雲帝山) 성모(聖母)의 딸로 운제부인(雲帝夫人) 또는 운제(雲梯)부인이라고 했다. 운제산은 영일(迎日) 땅에 있었는데 그 산에 사는 운제성모는 비를 다스리는 덕이 있어서, 날이 가물 때 농민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비를 내려서 풍년을 들게 했다.
 
남해왕 때 신라로서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낙랑(樂浪)의 군대가 쳐들어 와서 서울인 금성(金城)까지 한 때 점령당하는 국난(國難)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신라 육부의 백성들은 남녀노소가 모두 나서서 민병으로 무장하고 용감히 싸웠다.
 
“낙랑의 군대는 비록 한민족(韓民族)의 피를 받았다는 탈을 썼으나 이족(異族) 한(漢)나라의 종노릇 하는 놈들이다. 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외적의 종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 육부의 백성이 전부 죽을 때까지 용감하게 싸우자.”
 
이런 각오와 단결로 싸워서 마침내 남침해 온 낙랑군을 물리쳐서 신라의 국위를 인접 나라에 떨쳤다. 일본의 해적단도 연해지방을 노략질했으나 모두 물리쳤다.
 
신라의 이러한 위엄과 덕치(德治)에 감동한 고구려의 비속(裨屬) 일곱 개 소국(小國)이 천봉(天鳳) 五년에 스스로 귀순해 왔다. 그 이유는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는 것보다 신라에 신부(新附)하는 것이 잘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나 낙랑은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강탈하려고 하지만 우리 신라는 덕치(德治)의 인정(仁政)이 그리워서 스스로 오는 타국의 백성을 받아서 애호한다.”하고 남해왕과 그 밑의 대신들이 자랑할 만큼 국내 질서가 잡히고 여유 있게 되었다.
 
남해왕이 二十一년 동안 부왕(父王)이 세운 국기(國基)를 튼튼히 다져 놓고 승하하자 다음 임금의 자리에 오를 태자 노례(努禮)는 자기보다도 매부 탈해가 덕이 더 많다고 그에게 왕위를 양도하려고 했다.
 
“매부가 나보다 덕이 많아서 나라를 잘 다스리겠으니, 왕이 되어 주게.”
 
“아닐세. 자네는 정통(正統)의 태자인데 나보다 덕이 높으니 으레 자네가 왕통(王統)을 이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면 누가 덕이 더 있는가 시험해 보세.”
 
“덕을 무엇으로 잴 수 있는가?”
 
“덕 있는 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하니, 이빨수효를 비교해 보세.”
 
왕위를 서로 사양하던 처남과 매부는 흰떡을 물어서 잇자죽 수효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태자의 이빨 수효가 많았으므로 왕이 되었는데 이가 三代 유리왕(儒理王)이다.
 
“약속대로 내가 먼저 왕이 되네마는 내 다음에는 자네가 되어야 하네.”
 
“유리왕은 탈해와 이렇게 약속을 했다.”
 
그런데 이 약속대로 제 四대의 왕이 된 탈해의 신분과 경력이 실로 기이했다. 그는 남해왕의 공주와 결혼한 행운아로서 유리왕과 우애가 지극히 좋은 처남 매부의 사이였다.
 
남해(南解)의 용성국(龍城國)은 용왕(龍王)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 나라의 다파나왕(多婆奈王)은 여자만 사는 적녀국(積女國)의 공주를 맞아서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첫아이를 갖고 七년만에야 비로소 산기(産氣)가 있었다. 대신들은 속으로는 해괴한 일이라 걱정했으나 왕을 안심시키려고 위로의 말을 했다.
 
“자고로 큰 인물은 어머님 태내에 오래 있는 법이니, 이번에 귀한 왕자를 얻으실 것입니다. 훌륭한 태자를 얻으시면 나라의 큰 경사올시다.”
 
그러면서도 그런 축하의 말이 빈말에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해산을 하고 나자 궁중의 모든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어머나, 왕비께서 七년만에 아기가 아니고 큰 알을 낳으셨다니!”
 
궁중에서는 쉬쉬하고 해괴한 해산을 숨기려고 했으나 궁녀들의 속삼임은 곧 대신들의 귀에 들어갔고 이내 모든 백성들까지 알게 되었다.
 
“이게 무슨 망칭한 일이냐!”
 
다파나왕은 창피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아들 운수의 반 책임은 자기에게 있었으므로 산모만을 책망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왕은 대신들에게 명령했다.
 
“해괴한 알을 빨리 바다에 던져버려라!”
 
그러나 왕비의 슬픔은 여간 크지 않았다. 비록 해괴한 알을 낳았지만 七년 동안이나 배에서 키워온 혈육(?)이라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비록 알이라도 생명이 있는 것을 어찌 바다에 던져서 죽일 수가 있으랴. 혹시 알에서 자녀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궁녀들과 상의했다. 그러나 그 알에서 왕자가 탄생할 것이라고 그냥 궁중에 두자 할 용기도 염치도 없었다. 왕비는 왕도 모르게 큰 궤짝을 짜서 그 알을 넣고 일곱 가지 보물과 비단과 양식까지 담아 배에 싣고 두 명의 시녀까지 따라가게 했다.
 
“너희들은 이 알을 잘 모시고 어딘지 모를 나라로 가거라. 필경 이 알에서 훌륭한 왕자가 탄생할 것이니 궤 속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나거든 너희들이 잘 길러 모시거라.”
 
“네.”
 
시녀들은 왕비의 명령대로 궤짝을 안고 바닷쪽으로 향했다. 왕비는 궤짝을 붙들고 이별을 슬퍼하면서“내 아들아, 네가 알을 깨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먼 나라로 배에 실어 보내는 이 어미의 딱한 사정을 용서해라. 어떤 좋은 나라에 가서 사람으로 화한 뒤에 훌륭한 인물이 되어 다오. 나는 네가 인간으로 훌륭한 성공을 하도록 바다 신령과 하느님께 빌겠다.”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이것도 모두 운명입니다.’
 
왕비는 궤속 알이 이런 대답을 하는 것만 같았다. 왕비는 산후의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바닷가까지 나가서 알을 떠나보내며 섭섭한 전송을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분명히 말소리가 들려왔다.
 
“왕후님,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제가 용왕님 분부를 받았습니다. 복 받을 나라로 가서 뒤에 그 나라의 임금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왕비는 그런 말을 듣고 반신반의 했으나 마음이 좀 놓였다. 이윽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배는 동북쪽을 향해서 점점 해변에서 멀어갔다.
 
바람 부는 방향과 다르므로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본즉, 뱃가에 붉은 용(赤龍)이 헤엄치면서 배를 끌고 가고 있었다. 왕비는 두손을 모아 용왕님께 빌었다.
 
“용왕님 감사하옵니다. 제 혈육이 또한 용왕님의 외손주이니 부디 좋은 나라로 가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왕자 구실을 하게 해주십시오.”
 
신비한 알을 실은 고운 배가 가락국(駕洛國)의 해변(金海地方)을 지날 때, 마침 그곳에 행차했던 수로왕(首露王)이 발견하고 신하들에게 명했다.
 
“저렇게 곱게 단장한 배는 처음 보았다. 필경 귀한 인물이 탔거나, 귀중한 보물이 실려 있을 것이니 딴 나라로 가기 전에 빨리 영접선을 타고 가서 우리나라로 맞아 오거라. 실례가 되지 않게 국빈으로 정중하게 모셔라. 내 간곡한 초청 인사를 하고….”
 
신하들은 곧 영접선을 타고 환영의 북을 쳐서 배가 머물도록 신호를 하며 그 배를 향해서 갔다. 그러나 그 배는 가락국 해안을 그냥 지나서 신라의 해안으로 빨리 가고 있었다. 수로왕의 영접선은 기를 쓰고 쫓아갔으나 붉은 용이 인도하는 배를 따를 수가 없었다.
 
“허어, 내 덕이 부족해서 귀한 손님이 그냥 가버렸구나!”
 
가락국의 수로왕은 그 배를 맞아들이지 못한 것을 매우 섭섭히 여겼다. 알을 실은 배는 서라벌 동해안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오늘의 영일만)에 도달했다.
 
이때 동해를 파수 보고 있던 해척지모(海尺之母)의 아진의선(阿珍義善) 노파가 그 기묘한 배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외국의 침략선(侵略船)이 아니면 해적선(海賊船)만 경계해 오던 아진의선 노파도 이렇게 곱게 단장한 꽃배는 본 일이 없었다. 필경 이 나라에 귀한 손님이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배는 점점 해안으로 가깝게 왔으나 배 앞뒤에는 뱃사공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고운 배는 해안으로 오고 있었다. 마침 아침해가 동쪽 수평선에 솟아올라 황금빛 잔잔한 물결에 떠오는 배는 그림같이 아름다왔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바다에는 없는 까치떼가 배 위를 빙빙 돌면서 깍깍 울었다.
 
“난데없는 아침 까치떼가 환영하는 저 배는 분명히 귀한 손님이 타고 오시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한 노파는 어촌 사람들을 데리고 배를 끌어다가 해안에 매었다. 그리고 배안에 들어가 본즉 화려한 선실 안에는 궤짝 속에 어린 귀공자가 있고 좌우에 한명씩 시녀가 옹위하고 있었다.
 
“어디서 오신 귀한 손님이십니까?”
 
해척지모의 노파가 공손히 물었다.
 
“용성국의 왕자입니다.”
 
“사공도 없이 어떻게 모시고 왔소?”
 
“붉은 용이 이 나라로 인도해 왔습니다.”
 
노파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시녀의 말에 놀랐다. 어린 왕자는 물론 항해 줄에 알 껍질을 깨뜨리고 탄생한 용성국 다파나왕의 왕자였다. 아무 말없이 미소를 짓고 있던, 알에서 탄생한 왕자는 선실에서 나와 성큼성큼 걸어서 육지로 올라갔다. 그리고 노파에게 물었다.
 
“이 나라가 서라벌인가요?”
 
“도련님, 이 나라가 분명히 서라벌입니다. 처음부터 서라벌을 찾아오셨습니까?”
 
“용왕께서 서라벌이 복된 나라니 그 나라에 가라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늠름한 소년의 모습은 범하기 어려운 왕자의 기상이 있었으나 모르는 나라에 온 손님답게 노파에게도 공손한 말씨로 대했다.
 
“용성국은 어디 있는 나라입니까?”
 
노파는 시녀에게 들은 귀공자의 본국을 물었다.
 
“용성국은 용왕이 다스리는 해국(海國)으로 일본 나라 동북쪽 천리밖에 있는 큰 섬나라입니다. 사람으로 환생한 二十八명의 용왕이 있습니다. 우리 용성국의 왕자는 五,六세만 되면 완전한 어른이 되어서 왕위에 오릅니다. 나는 이 서라벌에 올 운명이었기 때문에 七년 동안 왕후인 어머님 뱃속에서 자라서 이 서라벌 나라로 오게 되었습니다.”
 
“어머님께서 七년만에 낳으신 아드님을 먼 나라로 보내셨어요?”
 
노파가 또 놀랐다.
 
소년은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알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왕이 추방한 것을 어 머니의 정성과 붉은 용의 인도로 인연의 땅 - 이 서라벌까지 왔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말했다. 항해 중에 알에서 탄생했다는 소년의 말에 사람들은 경이(驚異)의 귀를 기울였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상륙시켜 준 은혜는 훗일에 갚겠습니다.”
 
소년은 인사를 한 뒤에 시녀 두 명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
 
“도련님, 누추하지만 우리 집에 가서 기다리시지요. 임금께 알려 드리면 서울로 모셔갈 것입니다.”
 
“아니올시다. 내가 이 나라에 아직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는데 어찌 왕의 호의를 받겠습니까?”하고 두 명의 시녀를 데리고 어디로인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소년은 시녀들의 앞장을 서서 사방 지세(地勢)를 살피며 가다가 어떤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소년의 비범한 용모를 보고서 귀공자로 짐작하고 물었다.
 
“도련님은 어디서 온 누구로서 어디로 가오?”
 
소년은 자기의 내력을 사실대로 말했다.
 
“허어, 참 기이한 도련님이군. 이름은 무어라 하오?”
 
소년은 비로소 자기의 이름이 없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름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느낀 그는 조금 생각한 뒤에, 스스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대답했다. 얼핏 생각해서 알에서 까 나왔다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는 곳은 아직 정처가 없었으므로 이 나라에 처음 왔으므로 우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두루 구경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탈해는 노인과 헤어진 뒤에 시녀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살 집을 마련해야겠는데 우선 집 지을 명당자리를 잡기로 하자.”
 
탈해는 멀리 바라보다가 높은 산을 보고 방향을 점쳤다.
 
“저 산을 넘어야 서라벌 서울로 가겠으니 저리로 가자.”
 
“네.”
 
시녀들은 탈해를 따라서 토함산(吐含山)으로 올라갔다. 토함산에 올라간 탈해는 자기가 항해해 온 동해를 내려다보고 서라벌 평야를 굽어보았다.
 
“이 산이 명산이다. 이 산중에서 좋은 집터를 잡자.”하고 七일 동안이나 나무 밑과 동굴 속에서 자면서 낮이면 복받을 집터를 찾아 다녔다.
 
그러다 초승달같이 묘한 모양의 산봉우리가 있고 그 밑에 좋은 집터가 있을 듯한 것을 발견했다.
 
“저 산봉우리 밑이 명당 같다.”
 
탈해는 시녀들을 데리고 그 장소로 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경치가 좋고 양지 바른 평지가 있었다.
 
“저 곳에 왕기(王氣)가 돌고 있다. 저 곳에 집을 짓고 살면 나도 장차 서라벌의 왕이 될 것이다.”
 
시녀들은 고생 끝에 주인 소년의 그런 말을 들었으므로 여간 기쁘지 않았다. 왕이 될 집터가 아니라도 어서 정착하여 집을 짓고 편히 살고 싶었던 것이다.
 
“왕자님, 그럼 어서 가서 집을 짓도록 하세요.”

이런 희망으로 무거운 다리에서 피로가 풀려 산비탈을 올라갔다. 그러나 그 곳에 가본즉, 그 좋은 집터에는 이미 절간 같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아차, 내가 늦었구나!”
 
탈해는 낙망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이집을 빼앗아 살 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산 밑으로 내려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산봉우리 밑에 있는 절간 같은 집에 누가 살고 있나요?”
 
“호공(瓠公)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지.”
 
“호공이라, 그가 그 집에 살면 장차 서라벌의 왕이 될 인물이구나. 무슨 방법으로든지 그 집에 내가 살아야 하겠다.”
 
탈해는 달밤에 대장간에서 쓰고 버린 쇠똥과 숯부스러기를 한 부대 메고 가서, 그 집 뒷마당을 판 후 묻어두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자 그는 그 집을 찾아가서 엉뚱한 요구를 했다.
 
“이 집터는 우리 조상 때 소유지요. 내가 그 집문서와 증거를 갖고 왔으니 당장 집터를 내 놓으시오. 집을 팔기 싫으면 집을 뜯어다 다른 터에 지으시오.”
 
“아니, 어디서 온 어린 놈이 내 집터를 빼앗으려고 엉뚱한 거짓말을 하느냐. 어디 집문서를 보여라.”
 
탈해는 가지고 온 거짓 집문서를 보였다.
 
“이 따위 종이 문서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믿을 수 없으니 못 내놓겠다.”
 
“그럼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오면 내놓겠죠?”
 
“무슨 증거냐?”
 
“우리 조상이 이 터에서 대장간을 내고 대대로 업을 삼아 왔소.”
 
“그 증거가 있느냐?”
 
“증거가 나오면 집터를 내놓아야 하오. 당신도 글을 읽는 선비로서 신의가 있어 보이니까 약속은 지킬 것 같은데 어떻소?”
 
탈해는 은근히 호공의 도의심을 추켜올렸다. 호공도 도학을 닦는 인물이라 소년의 사리 밝은 말에 꿀리고 싶지 않았다.
 
“좋다. 내가 어찌 남의 집터를 탐내서 안 주겠다 하겠느냐? 만일 이 집터가 네 조상들의 대장간 터였다는 증거만 나오면 선뜻 내놓겠다.”
 
“좋습니다. 그럼 이 집 뒷마당을 파봅시다.”
 
탈해 소년은 집주인 호공을 입회시키고 괭이로 뒷마당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공은 코웃음을 치면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아, 이 쇠똥과 숯부스러기를 보시오. 이래도 대장간 터가 아니라고 우겨대겠소?”
 
탈해 소년이 파낸 증거품을 본 호공은 비로소 놀랐다.
 
“음, 나도 청렴한 선비, 신의를 아는 선비다. 네 말대로 네 조상 때 집터이니 내가 이사 하겠다.”하고 선뜻 약속을 지켰다.
 
탈해는 자기의 꾀가 성공한 것을 기뻐했으나 속인 자기보다도 속는 호공의 태도가 훌륭한 현사(賢士)의 도량이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조상의 유산을 찾으려는 나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이 집은 후한 값으로 사겠습니다. 다른데 가서 터를 사고 이보다 나은 집을 지으시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벗이 되면 어떻습니까?”
 
“허허허, 동생 같은 네가 이렇게 영리하고 사리에 밝아, 집을 쫓겨나는 분한 생각도 없다. 나도 다른 집을 장만해야겠으니, 후한 값은 필요 없고 이만 정도의 집을 지을 경비나 내라.”
 
“고맙습니다.”
 
탈해는 자기의 전신(前身)인 알과 함께 뱃속에 싣고 왔던 보물로 호공에게 후한 집값을 주고 그날로 그 집에서 살았다. 이때가 서라벌 초대 임금 박혁거세 재위(在位) 三十九년 되는 해였다.
 
탈해가 이 집에서 살게 되자 그는 밤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낮에는 농사와 사냥과 고기잡이를 부지런히 했는데 뜰 앞의 죽순(竹筍)처럼 빨리 자라서 키가 구척장신(九尺長身)에 이르렀다. 힘센 장수, 지혜로운 학자, 덕 있는 현사로서 그의 이름은 서라벌에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서라벌의 풍속에는 이름 뿐 아니라 성(姓)도 있어야 행세했는데 탈해는 이름만 자기가 지었지 성은 아직 짓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의 고국 용성국에는 성이 없었으므로 조상에게서 물려받을 수도 없었다. 역시 스스로 정하는 것이 좋으나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참안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옳지 내가 처음 서라벌 해안에 이르렀을 때, 아침 까치떼가 배 위를 날으면서 환영했다. 까치는 경사스러운 새니까 까치 성으로 하자. 그러나 사람의 성이 까치작(鵲)으로 하면 좀 이상하니 새조(鳥)자를 떼고 옛석(昔)자로 성을 삼자.”
 
그리해서 그의 성명 三자가 완성되었으므로 석탈해(昔脫解)라고 했다. 신라 왕조의 박·석·김(朴·昔·金) 삼성은 초대의 혁거세왕이 박씨였고 四대의 탈해왕이 석씨였으며 十三대의 미추왕(未鄒王)이 김씨였기 때문이다.
 
석탈해는 점점 성년이 됨에 따라서 학문과 도술을 연구했으므로 천문 지리와 각종 술법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이 뜻대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때 그는 동악(東岳)에 사냥 갔다가 목이 몹시 말라 데리고 다니는 하인 백의(白衣)에게“너 물 좀 얻어 오너라” 하고 명했다.
 
백의는 주인의 명을 받고 산골짜기 밑에 있는 샘물로 내려가서 그릇에 물을 떠가지고 오다가 목이 말라서 주인 모르게 한 입 훔쳐 먹었다. 그러자 주인 먹을 물을 먼저 마신 벌로 물그릇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인 백의는 주인에게 발각 될 것이 두려워서 물그릇을 입에서 떼려고 아무리 잡아 당겨도 떨어지지 않았다.
 
‘주인이 벌써 알고 이런 벌을 주신 것일까, 하늘에서 내리신 벌일까.’
 
백의는 주인의 한 때 꾸중은 용서 받겠지만 입에서 그릇이 붙은 채 떨어지지 않으면 평생 두고 해괴한 병신이 되어야 할 것이 큰 고민이었다.
 
“산신령님, 제가 주인 잡수실 물그릇에 먼저 입을 댄 죄를 용서하십시오. 물은 다시 정한 물을 떠다 드리겠습니다.”
 
백의는 겁이 나서 다시 골짜기로 내려가서 다른 그릇에 물을 떠가지고 주인 석탈해 앞으로 갔다. 석탈해는 입에 물그릇을 혹으로 달고 온 꼴이 우스웠으나 억지로 참고“사람은 정직하고 제 분수를 지켜야 한다. 네 입을 보니 나를 속이려다가 벌을 받았구나.”
 
“도련님, 금후로는 도련님이 보시는 곳에서나 안 보시는 곳에서나 결코 속이는 행동을 않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맹세하오니 이번만 용서하시고 도련님 도술로 입에 붙은 그릇을 떼어 주십시오.”
 
석탈해는 하인이 알아듣도록 잘 타일렀다.
 
“자기 주인을 성심성의로 속임없이 섬기는 것이 충복(忠僕)이다. 그리고 임금에게 성심성의로 모든 것을 바쳐 섬기는 것인 충신(忠臣)이다. 그러므로 충신과 충복의 도리는 같다. 사사로운 주인의 충복이 나라에 봉사하면 충신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직하고 맡은 직책에 신의 있는 덕행이 바로 충복과 충신의 길이다.”
 
“앞으로 그런 말씀을 명심하고 실행하겠으니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석탈해는 하인의 맹세를 받은 뒤에 주문을 외워 입에 붙은 그릇을 떼어 주었다. 이때 백의가 물을 떠온 샘은 먼 곳에 있었다 해서 원내정(遠乃井)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고 석탈해가 산명당 집터는 초승달 같은 산봉우리 모양이었기 때문에 월성산(月城山)리라고 불려졌다.
 
석탈해의 덕행과 도술이 유명해지자 서라벌 二대왕 남해왕(南解王)은 재위 五년 되는 해에 그를 아효공주(阿孝公主)와 결혼시켜서 부마를 삼았다. 부마가 된 석탈해는 남해왕 七년에는 대보(大輔), 즉 총리대신이 되어서 나라를 잘 다스렸다. 남해왕의 태자요, 석탈해의 처남인 노례(弩禮)는 왕위를 매부 석탈해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그것을 사양한 것은 이미 앞에서 소개하였다.
 
처남인 유리왕 밑에서 보필한 석탈해는 문학을 장려해서 신라가악(新羅歌樂)의 시초인 도솔가[兜率歌]를 창작하게 했고 농공을 장려해서 보습과 호미 등의 농구(農具)를 발명했으며, 수레(車)와 빙고(氷庫)까지도 제작해서 신라 초창기의 문화건설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군비도 강화해서 고구려의 침입을 물리쳤고, 서쪽 마한(馬韓)의 일국(一國)인 이서국(伊西國)을 합병했는데, 이것이 서라벌로서는 최초의 전쟁에 의한 국토 확장이었다.
 
유리왕이 승하하자 석탈해는 유리왕과의 약속에 따라서, 전한(前韓) 광호제(光虎帝) 중원(中元) 二년 六월에 나이 七十二세로 四대왕에 등극했는데, 그전에 집터를 양도 받은 호공을 재상으로 등용했다. 그는 시조 박혁거세 이후의 제 二의 명군(明君)으로서 재위 二十三년 동안에 정치와 산업과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가 九十二세의 천수(天壽)를 마치고 승하한 뒤에 하늘에서는 그의 영혼의 분부가 있었다. 이것을 신조(神詔)라고 했는데 ‘내 뼈를 땅 속에 묻지 말라’는 이상한 분부였다. 국상을 준비하던 대신들이 당황했다.
 
“성골(聖骨)을 묻지 말라는 분부이시다. 그러면 성육(聖肉)은 어찌 하오리까?”
 
대신들은 탈해왕 유해 앞에 제사 지내면서 제문(祭文)으로 물었다. 그러자 구척 장신의 유해 전체가 백골로 화해서 또다시 대신들을 놀라게 했다. 뼈의 굵기는 석자 두치(三尺二寸)요, 길이가 아홉자 일곱치(九尺 七寸)나 되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 장사뼈를 어떻게 모셔야 좋을지 몰랐다. 땅에 묻지 말라는 영혼의 분부는 알았으나, 어떻게 둘지가 문제였다.  그래서 유명한 도술가에게 물었다.
 
“거룩한 뼈에 대왕의 생전 모습을 조각해서 대궐 안에 안치하십시오. 그러면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수호상(守護像)이 되실 것입니다.“
 
왕실에서는 이 도술가의 점괘에 따라서 등신대(等身大)의 골상(骨像)을 만들었다. 미망인 아효왕후는 매달 기일(忌日)에 이 골상에 제사 지내서 부왕(夫王)의 영을 위로했다. 그러다가 미망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 골상이 또 신조로 분부했다.
 
“이제 내 뼈를 동악(東岳)의 아효능 옆에 묻어라.”
 
대신들은 이 분부에 따라서 왕비 옆에 쌍능(雙陵)으로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