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안으로 화목해서 육부의 중심을 문화의 화원으로 만들고 덕화(德化)를 사모하고 귀화하는 인접 나라의 백성을 포섭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북쪽의 고구려와 서쪽의 백제가 가끔 국경을 침범하고 불의의 습격을 가해 왔다. 그때마다 왕실과 군신(君臣)과 백성들은 혼연일체(渾然一體)로 단결해서 아름다운 나라를 지켰다. 인심이 순박한 신라인들은 비록 나라로는 갈렸으나 동족(同族)끼리 피를 흘리고 살육하는 전쟁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배를 조종하는 일본의 해적단과 군대가 동해안과 남해안을 침범하면 외적에 대한 민족적인 분개를 금하지 못했다. 그러나 항상 외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급급할 뿐 수군(水軍)을 동원해서 그들의 본거지를 공격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왔다. 공격해 온 일본군을 결사적으로 싸워서 물리쳤으나 그럴 때마다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막심했다. 그래서 일본과는 항상 전투가 아니면 화평교섭이 그치지 않았다.
제十七대 내물왕(奈勿王) 三十七년 일본의 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신라를 속이려는 간계였다.
<귀국과 우리 일본은 비록 바다로 격해 있으나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입니다. 과군(寡君)은 대왕의 성명(聲明)하심을 듣고 항상 흠모하여 마지않습니다. 과거에는 피차의 오해로 불미한 사건이 양국 사이에 있었지만 앞으로는 서로 이해(理解)를 증진시키고 국교를 두텁게 하며 문화의 교류를 시켜서 피차 은혜를 입고자 하오니 과군의 성의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건대 귀국과도 적대관계에 있는 백제야 말로 과국(寡國)과 공동의 적이오며 앞으로는 백제에 대한 대책도 공동으로 세우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즉 백제에 대한 군사동맹 등을 협력할겸 사절로서 대왕의 왕자 한분을 과국으로 파견해 주시면 얼마나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내물왕은 일본왕의 이러한 평화제의와 공동의 적국인 백제에 대한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면 신라로서는 매우 좋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일본왕의 요청대로 셋째 왕자 미해(美海)를 사절로 일본에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왕자를 보내라는 것은 형식상의 예의를 갖추기 위한 데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미해왕자는 나이가 열 살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어린 왕자를 보호하고 가게 된 부사(副使)인 내신 박사람(朴娑覽)이 실질적인 외교를 담당했던 것이다.
내물왕이 일본과 화친하고 백제에 대한 군사동맹까지 맺을 희망으로 왕자까지 보냈지만 결과는 일본의 모략에 속은 데 지나지 않았다.
일본은 속여서 끌어간 미해왕자를 돌려보내지 않고 인질(人質)로 잡아 두었다. 만일 신라가 일본에 대해서 불리한 행동을 취하면 미해왕자를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공포감을 주기 위한 간악한 술책이었다.
왕자를 인질로 빼앗긴 내물왕은 일본의 배신에 분노했으나 할 수 없이 여러 번 왕자를 돌려 보내라고 요구하면서 일본의 반성만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요구는 번번이 무시된 채 세월은 三十년이나 흘러 버렸다. 열 살 때 일본에 간 미해왕자는 四十이 되도록 이역(異域)에서 고독한 인질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十八대 눌지왕(訥祗王) 때에도 미해 왕자의 경우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의 상대는 일본이 아니라 고구려였다. 눌지왕 三년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사신을 보내서 두 나라의 친선관계를 도모하자고 꾀었다.
장수왕이 보낸 국서(國書)에는 다음과 같은 왕제(王弟) 초청이 겸해 있었다.
<귀국과 과국(寡國)은 옛날부터 가장 친한이웃나라로서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 왔습니다. 간혹 주위의 사정이나 오해로 사소한 분쟁도 있었지만 그것은 우리 두 나라의 본의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분쟁의 원인도 모두 우리 양국의 공동의 적인 백제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과군(寡君)은 앞으로 귀국과 뜻과 힘을 합해서 백제를 견제하려 합니다. 듣잡건대 대왕의 왕제 보해공(寶海公)이 매우 영특하다 하오니 대왕의 대리로 과국에 보내 주시면 두 나라의 친선문제를 의논하고자 하오니 과인의 청을 허용하여 주십시오.>
눌지왕은 고구려와 화친해서 북방의 근심을 덜게 되면 다행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우 보해공을 정사(正使)로 내신(內臣) 김무일을 부사(副使)로 하는 사절단을 고구려로 보냈다.
"비록 친선이라고 하지만 외교에는 복잡 미묘한 이해문제에 따르는 흥정이 있으니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우리나라에 이롭도록 잘 교섭하고 오라. 외교는 칼 대신 입의 전쟁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상대국의 위협에 굽히지 말고 감언이설에 속지도 말라."
눌지왕은 아우 보해공에게 잘 일러서 보냈다. 그러나 보해공이 고구려에 가서 속기 전에 보해를 고구려에 보내는 자체가 속는 일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친선 사절단으로 간 보해를 인질로 잡아 두고 신라에 돌려보내지 않았다.
"아차, 장수왕의 간악한 술책에 속아서 아우를 적국의 포로로 보냈구나!"
눌지왕은 후회하고 곧 돌려보내도록 요구했으나 요구나 보낸 사신도 잡아 두고 아무 회답도 않는 무례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 문제로 곧 전쟁을 할 사정도 못되었다.
신라의 국시(國是)인 국제평화는 또 한 번 고배(苦盃)를 마셨다. 제十七대 내물왕 때에는 왕자 미해를 일본에 속아서 인질로 빼앗겼고 이번에는 고구려에 왕제 보해를 빼앗겼다. 이처럼 거듭되는 왕족의 수난은 신라의 국제관계가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가를 증명하는 불행한 서건이었다.
미해를 일본에 속아서 보낸 것은 부왕(父王) 내물왕이었으나, 눌지왕으로서는 두 명의 아우를 일본과 고구려에 각각 인질로 잡혀 두고 있었으므로 골육과 우애로서 나라의 체면으로서도 참을 수 없는 치욕이요, 고민이었다.
눌지왕은 아우 보해를 고구려에서 돌려 보내기만 기다리는 중에 어느덧 七년의 세월이 흘렀다. 눌지왕 十년에 마침 왕실에 경사가 있어서 큰 연희가 열려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군신동락(君臣同樂)의 술잔이 돌며 풍악이 화락하였다.
"성수무강을 빕니다. 성수 만세! 신라 만세!"
신하들은 왕과 나라를 축복했다. 그러나 그런 신하들의 축하를 받던 눌지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상감, 이 경사스러운 날에 왜 그리 슬퍼하십니까?"
기쁜 마음으로 술과 풍악을 즐기던 백관이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간신히 상감에게 여쭈었다.
"경들은 나의 두 아우가 적국에 사로잡혀서 고생하는 사실을 알지 않소? 전에 성고(聖考=父王)께서는 백성을 아드님같이 사랑하시는 뜻에서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고 아드님을 일본에 보내신 채 귀국을 못 보시고 돌아가셨소. 그리고 내가 왕위에 오른지도 어언 十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으로 전쟁이 되풀이 되어서 백성이 고생해 왔구료. 七년 전에 다행히 고구려가 화친을 청해 왔으므로 나는 백성을 전쟁의 고통에서 구해 주려고 아우 보해를 사신으로 보냈다가 속아서 인질로 제공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지금 내가 본국의 궁전에서 경들과 함께 이런 잔치를 베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아우들은 각각 적국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구출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서 견딜수 없소. 이 어찌 인륜의 정의 뿐이요? 나라의 위신에도 큰 치욕이라 나의 무력함을 슬퍼할 뿐이요."
"그런 불행도 당시의 국운(國運)이오니 멀지 않아서 국운이 돌면 두 아우님을 반갑게 맞게 될 것입니다." 어떤 대신은 왕을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을 했다.
"아아, 언제까지나 운수가 돌 때만 기다리란 말이냐. 미해가 일본에 간 뒤에 四十년이나 기다렸고 보해가 고구려로 간 뒤로 七년이나 기다리지 않았느냐. 내 신하 문무백관은 나라의 운수가 저절로 돌기만 기다리고 나라의 어려운 운수를 충성으로 돌려 볼 용사는 없단 말이냐!"
눌지왕은 비장한 이 말에 신하들은 큰 책망을 당한 꼴이 되었으므로 모두 머리를 숙이고 침묵 할 뿐이었다. "이제 만일 어떤 용사가 나와서 두 아우를 적국에서 구해 오면 선왕(先王) 영전에 사죄하고 백성에게 맹세코 그 공에 보답하겠소. 그러나 지금은 역시 전쟁을 일으킬 사정이 못되니 어떤 꾀로서 탄환해야 할 것이요."
신하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특별 회의를 열고 심중한 토의를 한 끝에 그 결론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지금까지 왕제(王弟) 두 분을 일본과 고구려에서 구해 오지 못한 것을 신들은 모구 황송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매우 어려운즉 이 어려운 일을 감당할 사람으로는 비상한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하겠는데 다행히 삽라군 태수(揷羅郡太守)로 있는 박제상(三國遺事는 金堤上으로 되어 있다)이 있사오니, 그로 하여금 일을 시키면 성공할까 하옵니다."
왕은 신하들이 추천하는 박제상을 불러서 보기 전에 추천하는 신하들에게 먼저 다짐했다. 그 일은 보통 인물로서는 어렵다는 것을 왕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 아직 일군(一郡)의 태수 정도인 박제상이라는 자가 어찌 그만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을 것이다.
"금수의 야욕을 가진 완강한 적국의 왕들과 교섭해서 성공하려면 외교적인 지혜와 용맹과 위변이 필요하고 이에 앞서서 나라를 위해서 백골을 적국 땅에 묻을 각오와 충성이 있어야 한다. 태수 박제상이 과연 그만 실력이 있느냐? 자신 없는 사람을 적국에 보내는 것은 삼가야 한다. 또 한명의 신하를 희생시키는데 그치면 이것 또한 나의 잘못이 된다."
"저희들 인선으로는 박제상이 제일 적당한 인물에 올랐사오니, 직접 인견(引見)하시고 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박제상이 그만 인물로, 국난에 몸을 바치겠다면 얼마나 좋을까?'
눌지왕은 그런 기대로 박제상을 불렀다.
박제상은 파사왕(婆娑王)의 오대손으로서 조부는 아도(阿道)요, 파진찬(波珍湌) 물품(物品)의 아들이었다. 박제상은 이미 왕이 부른 이유를 알고 왔으므로 감격한 말로 자기의 각오를 왕에게 아뢰었다.
"두 왕제님이 적국에 인질로 억류되어 계신 것은 나라의 큰 불행이요, 치욕입니다. 이런 근심을 임금께 하시도록 함은 신하된 저희들의 도리가 아닌 줄로 압니다. 임금과 나라에 대해서 쉬운 일에는 공을 다투고 어려운 일에는 목숨을 아끼는 것은 결코 충신이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용기가 없는 비겁한 행동입니다. 소신이 비록 재주가 부족하고 어리석으나 이러한 의로운 일에 목숨을 걸고 전심전력을 다해서 국은(國恩)의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할까 하옵니다."
왕은 박제상의 굳은 각오와 뜨거운 충성을 기뻐하고 친히 술잔을 권하며 손을 잡고 중대한 임무를 분부했다.
박제상은 곧 변복을 한 후 단신으로 동해안으로 가서 배를 타고 북상(北上)하여 고구려로 갔다. 이미 집을 나설 때에 사랑하는 아내에게 비장한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 것이었다.
"이번에 적국 고구려에 밀행해서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다행히 보해왕제(寶海王弟)를 구하는데 성공하면 돌아와서 또 만날 것이요, 불행히 실패하면 적국의 땅에 뼈를 버리게 될 것이요. 내가 죽더라도 충신의 아내로서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슬픔을 이겨 나가야 하오."
"당신의 그 용기와 충성으로 꼭 성공하실 텐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라에 바치신 몸이니 집안 걱정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부인도 충신의 아내답게 남편의 장도(壯途)를 빌면서 이별의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박제상은 고구려 땅에 들어가면서부터 신라의 밀정 혐의를 받을까 염려해서 고구려의 행인처럼 변장을 하고 고구려의 서울 왕검성까지 갔다. 그는 왕검성에서야 비로소 예복을 갖추어 입고 신라의 사신으로서 고구려왕을 만나고 신라 눌지왕의 친서를 올렸다. 그리고 눌지왕의 아우를 돌려달라고 간청했다.
"황송한 말씀이오나 이웃나라끼리는 서로 신의와 신의로써 친선을 도모하여야 할 줄 믿으며 대왕께서도 그러한 뜻으로 계실 줄 아옵니다. 소신이 본국을 떠날 때까지도 우리 왕의 아우 보해공을 감금하여 두지나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왕의 허가를 얻기 전이라 아직 만나 보지는 못하였습니다마는 보해공을 국빈으로 대우하시고 자유롭게 궁중출입을 시키면서 애호해 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대왕의 인후하신 덕에 감격하고 있습니다."하고 우선 외교적인 칭찬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보해공도 본국에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기뻐하며 살면 고향이라고 하면서 나와 좋은 이야기 벗이 되어 있으니 안심하시기 바라오."
"감사하옵니다. 그러나 형왕(兄王)께서 오래 만나지 못하셔서 오매불망으로 아우님 환국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대왕께서는 보해공을 잘 대우해 주셔서 보해공의 심중에는 가족과 고국을 그리워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대왕께서 신라의 왕제를 인질로 十년 동안이나 잡아 두고 있다는 오해를 할 것입니다."
박제상은 고구려왕이 노하지 않을 정도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인질이라니?"
고구려 왕은 기분이 나쁜 듯이 반문했다.
"옛날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다섯 나라의 패자(覇者)들이 권모술수로 인질정책을 쓴 사실이 있었는데 실로 말세의 불미한 일이었습니다. 관후하신 대왕께서는 인륜의 본연지정(本然之情)을 이해하시고 소신이 안동하고 귀국하도록 만반의 편의를 보아 주십시오."
"허허허, 나의 호의를 인질이라고 오해하는 모양이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옛날의 예를 들어서 그런 오해가 있을까 두려워했을 뿐입니다."
박제상은 은근히 고구려왕의 양심을 자꾸 건드렸다. 고구려왕은 보해를 못 돌려 보낸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므로 적당히 넘기려고 했다. "잘 생각해 보겠으니 경은 조급히 생각하지 말고 모처럼 온김에 우리나라 명승지나 구경하면서 기다리시오."
"네, 수일내로 귀국하게 하여 주십시오." 박제상은 그날은 그냥 대궐에서 물러나왔으나 일이 틀렸다는 것을 눈치 채었다. 그는 그길로 보해공을 찾아보고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
"이번에 모시러 왔으나 고구려왕의 눈치가 수상합니다."
"음, 역시 돌려주지 않을 거요. 자칫하면 박공(朴公)도 인질로 잡히거나 암살당할지 모르니 내 걱정은 말고 유람 도중에 국경을 넘어 가시오."
보해는 자기 환국은 단념하고 박제상의 신변 위험을 염려했다.
"안 될 말씀입니다. 제가 이번에는 꼭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바보처럼 왕을 안심시키고 있을 테니 저하고 탈출할 준비를 하십시오."
보해도 박제상의 충성에 감격하고 탈출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박제상은 명승지를 유람하고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으나 왕과 관리들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유산(遊山)과 주흥(酒興)으로 며칠을 보냈다. 제상은 왕이 자기를 경계하지 않게 한 뒤에 보해에게 탈출 계획을 말했다.
"제가 유람 핑계로 먼저 떠나서 고성(高城)에 가 있다가 성문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보해공께서 변장을 하고 五월 十五일에 그 곳까지 몰래 오십시오. 거기서는 국경이 가까우니 제가 잘 모시고 국경을 넘어 귀국하겠습니다."
"음, 그럽시다."
"그럼, 그날 다시 뵙겠습니다."
제상은 굳게 비밀 약속을 하고 먼저 왕검성을 떠났다. 제상은 이번에는 버젓이 왕의 허락을 받은 유람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왕은 국빈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신하 두 명을 감시차 붙여 보냈다. 제상은 뜻하지 않은 방해라고 생각했으나 사양하지 않았다. 사양해도 들어 줄 것이 아니요, 도리어 의심만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상은 그 두 명을 잘 대우해서 만일의 경우에는 매수할 계획을 세웠다.
五월 十五일에 제상은 고성에 이르러서 성문 밖의 경치를 구경하는 척하고 보해가 탈출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허술한 행상인 차림의 보해가 왔다. 제상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나 보해가 먼저 알아보고 제상 옆으로 다가왔다.
"아, 잘 오셨습니다. 하늘이 도와주셨으니 이제 반성공(半成功)을 했습니다."
“모두 박공의 덕이요. 무사히 귀국하면 왕께 아뢰어서 박공의 생명의 은혜를 후하게 갚겠소.”
“저에게 두 명의 감시원이 따라다녔으나 약속한 오늘 해질 시각에 저 혼자 오려고 술값을 후하게 주어서 방심시키고 여관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들이 저를 찾기 전에 어서 도망치십시다.” 그들은 남쪽 국경을 향해서 빨리 걸었다. 그러나 보해가 왕검성에서 자취를 감춘 것을 알게 된 고구려왕은 곧 활 잘 쏘는 포리 열명으로 추격하게 하였다. 보해는 그들이 벌서부터 변복을 하고 앞뒤로 포위하면서 따라온 것도 몰랐다. 그들은 왕의 명령대로 어디서든지 박제상과 만나서 신라로 탈출할 것이니 두 명을 함께 잡으려고 따라왔던 것이다. 고구려왕의 추측대로 추격하던 포리들은 고성 성 밖에서 보해가 박제상과 만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보름날 밤을 택한 것은 밝은 달밤을 이용해서 국경을 넘을 생각에서 정한 날짜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추격대가 뒤에서 따르고 있었다.
“앗, 우리를 발견한 포리가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빨리 저쪽 숲 속으로 숨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숲은 멀었고 추격대의 걸음은 빨랐다. 보해는 갖고 오던 돈 자루 세 개를 길에 떨어뜨리면서 도망쳤다. 추격대는 그 돈 자루를 세 번 줍는 사이에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나 포리의 두목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 놈들을 생포하려다가는 놓칠지도 모른다. 사정 없이 활로 쏘아 죽여라.”
대장의 명령에 열명이 쏘는 화살은 탈출하는 두 명의 앞뒤에 떨어졌다. 그러나 포리들은 보해의 인덕을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국경이 목전에 있는 그들을 무사히 귀국시켜 주려는 동정심에서 활촉을 뽑고 댓살만 쏘아 보냈다. 그리고 두목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쏘는 시늉만 했다.
“앗…”
박제상이 등에 화살을 맞았다. 그러나 약간 아프기만 하고 화살이 툭 떨어졌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화살을 집어 보니, 촉이 빠진 댓살이었다. 다른 화살도 줏어 보았더니 모두 촉이 없었다.
“보해공, 안심하십시오. 적병도 보해공의 인덕에 감복해서 이런 화살로 쏘는 시늉만 합니다. 빨리 저 숲까지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은 포리들의 호의로 사경을 면하고 요행히 국경을 탈출해서 이튿날 새벽에는 그리운 신라 땅에 도착했다. 안전한 고국 땅을 밟은 순간 그들은 긴장이 풀려서 길가에 주저앉아 벼렸다. 보해는 十년 만에 보는 본국의 흙냄새가 마치 어머니 가슴에서 풍겨 나오는 젖향기 같이 흐뭇하고 반가웠다.
“이번 탈출 성공은 보해공 평소의 덕행 때문입니다. 사람은 적국이나 지옥에서도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적국의 군대까지도 보해공의 인덕에 감화해 있었기 때문에 촉 뺀 화살만 쏘고 빨리 추격도 않고 보내 드렸으니까요.”
“十년 동안이나 적국의 억압에 복종해 있던 내게 무슨 덕이 있었다는 말이요. 나는 경의 용기와 지략이 아니면 죽을 때까지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을 비겁한 위인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괴로운 억압을 오랫동안 참고 자유의 날을 기다리신 것도 역시 인내의 덕입니다.”
보해와 박제상은 서로 탈출의 공을 사양했다. 그들이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자 백성들의 환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눌지왕도 박제상을 고구려로 보낸 뒤에 그가 무사히 아우 보해를 데리고 귀국할 지 어떨지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그립던 아우를 만나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을 못했다. 왕은 박제상의 큰 공을 높이 표창하고 궁중에서 성대한 환영잔치를 베풀었다. “제가 고구려 땅에서 죽을 줄만 알았더니 형님의 구원으로 다시 오늘의 자유를 맞았으니 감개무량(感慨無量)합니다.”
그러나 기쁜 축배를 몇 잔을 마신 눌지왕은 또 다시 새로운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다. “오늘, 고구려에 잡혀 있던 아우 보해를 十년만에 만나니 기쁨이 한량없다. 그러나 이 기쁜 반면에 四十년 가깝게 일본에 잡혀 있는 아우 미해 생각이 나서 새삼 슬프구나!”
“저보다 미해 형님이 먼저 귀국해야 할 것을 그랬습니다. 고구려는 적국이지만 말이라도 통하는 같은 민족인데 말도 다른 이민족의 나라에서 고생하는 미해 형님을 생각하니 죄송합니다.”
보해도 이제는 어렸을 때에 본 미해형님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왕과 함께 탄식했다. “두 아우 중에서 아직도 한명을 만나지 못하니 마치 팔 하나를 잃은 듯하고 눈 하나를 잃은 듯하다.”
눌지왕 형제는 아직도 일본에 인질로 잡혀 있는 미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박제상은 옆에서 왕 형제의 골육에 사무치는 한탄을 듣고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이윽고 결심한 바를 아뢰었다. “소신도 할 일을 아직 절반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남은 절반의 일을 일본에 가서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눌지왕 형제는 박제상의 용기와 충성에 감격했다.” “오오, 경이 또 미해를 구하러 일본까지 가주겠는가?”
“예,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제 목숨이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왕은 박제상에게 일본 갈 모든 준비를 상의하려고 했으나 박제상은 왕 형제에게 간단한 하직인사를 하고 말을 타고 단신 항구를 향해서 달렸다.
박제상은 아직 자기 집에도 들리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기도 어려운 먼 일본으로 또 떠났다.
박제상의 아내는 기뻐하던 순간에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놀라면 슬퍼했다. 그러나 태연한 얼굴로 남편의 일이 성공하기만 빌었다. “나라에 바친 몸이 어찌 사사로운 집안일에 사로잡힐 수 있겠어요.”
박제상의 아내는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대답을 했다.
그러나 처자를 만나서 이별인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급한 경우도 아닌가. 이 의문을 아내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로서도 남편을 만나서 또 일본까지 단신으로 가겠다면 응당 말려 보고 싶었고, 적어도 눈물은 흘렸을 것이다. 그래서 박제상은 자기를 만나지 않고 떠나 갔으리라고 짐작되었다. 그리고 보면 자기로서도 만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장도에 오르는 남편을 위해서 좋았으리라고도 생각되었다.
‘그러나 다시 못 볼지도 모를 그이를 한 번 보고 눈물 아닌 격려의 말이라도 해주자.’
박제상의 아내는 아내의 도리를 차리려 말을 타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아내가 해변에 이르자 남편은 이미 율포(栗浦)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 순간이었다.
“여보세요!”
아내는 큰 소리로 배에 오른 남편을 불렀다. 그러나 박제상은 손을 흔들어 이별을 고하고는 배를 저어 떠나버리고 말았다. 만리 길을 떠나는 남편을 멀리서 손만 흔들어서 이별한 율포 해변의 백사장은 이때부터 원하도 긴 모래밭이라는 의미에서 장사(長沙) 해변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일본에 도착한 박제상은 여러 가지 방면으로 일본 정계의 정보를 염탐해 보고 외교로는 도저히 미해를 구출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여기서도 계략을 꾸미고 미리 일본 조정에 나아가서 자기가 신라에서 일본으로 오게 된 사실을 거짓으로 얘기 했다.
“나는 신라의 하급관리로 있었던 사람인데 폭정에 견디지 못해서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귀국에 망명해 왔습니다. 부모가 죄도 없이 관헌에 잡혀서 죽었고 나도 잡혀 죽을 직전에 탈출해 왔습니다. 앞으로 일본이 신라와 전쟁이라도 하게 되면 일본군에 종군해서 부모의 원수를 갚겠으니 보호해 주시오.”
일본에서는 박제상의 거짓말을 믿고 의식주의 편의까지 제공하면서 잘 대우했다. 그리고 그는 글을 잘했기 때문에 궁중시회(宮中詩會)에도 초청을 받고 자주 궁중출입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궁중에 연금상태(軟禁狀態)로 있는 미해공과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박제상은 이 정도로 행동할 수 있음을 반성공 功)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계획에 더욱 자신을 가졌다.
그러나 미해공이 어릴 때 일본에 와서, 인질의 몸이라고는 하나 四十년 동안 일본왕의 회유정책(懷柔政策)에 넘어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의심도 해본 박제상은 처음에는 자기가 일본에 온 비밀을 숨겼다. 여러 번 만나서 서로 친해지고 믿게 되자 미해공이 먼저 신라왕실의 친척들을 그리워하면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억울한 신세를 한탄하게 되었다.
박제상은 비로소 미해공을 구출하려고 일본에 와서 지금 기회를 노린다는 비밀을 알렸다.
이에 감격한 미해공은 “고맙소. 나도 고구려에 잡혀 있던 보해 형처럼 고국으로 데려가 주시오.”하고 박제상에게 간청했다.
“제가 일본까지 온 목적이 그것이니 미해공께서도 다소의 모험을 각오하고 기회를 기다려 주십시오.”
“그럼 언제든지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도록 경이 나 있는 집에 와서 동거 하시오.” “외국의 일개 민간인인 나를 궁중에 계시는 미해공 거처에 있도록 일본왕이 허락하겠습니까?”
박제상은 그 가능성을 의심하고 반문했다. “지금 일본 조정에서는 경을 신라를 저주하고 망명한 사람으로 믿고 있고 나도 의심은 하지 않으니 내가 글벗으로 함께 있고 싶다면 허락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편리하니 왕에게 잘 말해 주십시오.”
이런 상의 끝에 미해공이 일본 왕에게 청해서 마침내 박제상은 궁중에 있는 미해공의 저택에서 동거하게 되었다. 모든 계획이 그들의 뜻대로 진행되었으므로 점점 희망이 커졌다.
그러나 미해공과 박제상이 함께 궁중에서 빠져 나가기는 어려웠다. 미해공이 외출할 때는 언제나 보호와 감시를 겸한 수행원이 따라 다녔다. 그리고 이미 얼굴이 상당히 알려진 박제상이 미해공과 함께 탈출하면 그들에게 들킬 위험성도 컸던 것이다. 그래서 박제상은 다른 동지 한 명을 구했다.
“당신이 내 대신 미해공을 모시고 일본을 탈출해서 신라로 돌아가시오. 성공하면 큰 상을 받고 상당한 벼슬도 할 수 있을 것이오.”하고 신라 사람인 강구려(康仇麗)에게 부탁했다.
강구려는 자기에게 그런 중대한 임무를 위임해 주는데 감격하여 죽음으로 맹세했다. 어느날 밤 드디어 짙은 안개가 끼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이 되자 박제상은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는 미해공에게 탈출을 권했다. “오늘밤에 탈출을 하십시오. 궁문 밖에서 강구려가 일본인으로 변복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도중에서 잘못해서 잡히면 죽을 각오를 했소. 그러나 박공 혼자 남아 있다가는 나를 탈출시킨 혐의로 잡혀 죽을 것이 아니오. 어찌 나만 귀국하려고 박공을 이국에서 죽게 하겠소. 귀국을 같이 못하면 함께 죽더라도 혼자는 갈 수 없소.” “저는 처음부터 죽을 각오로 온 몸입니다. 오직 걱정되는 것은 제가 죽고도 미해공을 귀국시켜 드리지 못할까 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저와 다름없는 동포 강구려를 동지로 구했으니, 이 안개 낀 밤에 탈출하십시오.”
“박공은?” “저는 이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해공께서 탈출한 것을 숨길 수 있고 결국 발각되겠지만 수도 근방에서 멀리 가실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탈출하겠지만, 발각 될 때까지 박공이 이 집에 있다가…”
“물론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므로 달게 죽겠습니다. 인명은 재천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하고 미해공이 안심하고 떠나도록 재촉했다.
“그러나 박공을 죽게 하고서 나만 떠날 수는 없소.”
미해공도 단독 탈출을 끝까지 거부 했다.
“그러시다면 계획을 바꾸겠습니다.”
“어떤 계획이오?”
“내일 공께서 사냥을 나가셨다가 혼자 짐승을 쫓는 척하고 말을 달려서 해안으로 가서 배를 타십시오. 제가 강구려를 시켜 내일 저녁때쯤 그 곳에 배로 대기하도록 준비시켜 주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모레 아침에 그 곳으로 가겠습니다. 저와 함께 행동하면 위험하니까요.”
“음, 그럼 모레 아침까지 배에서 기다리겠소.” “네 꼭 저도 가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제가 탈출하다가 무슨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제가 모레 아침까지 배에 도달하지 못하면 공께서는 강구려의 인도로 빨리 귀국하십시오.”
그런 약속으로, 혼자는 안 가겠다는 미해공의 탈출을 승낙 시켰다.
이튿날 미해공은 사냥을 나가서 예정대로 지정한 해안으로 말을 달려갔다. 시각을 맞추어서 강구려가 대기하고 있던 배에 올랐다.
그날 발에 돌아온 사냥 수행원들은 미해공의 행방을 잃고 돌아와서 겁을 집어 먹고 왕에게는 보고하지 못하고 박제상에게 와서 그 사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상의했다.
“왕이 알면 당신들이 큰 벌을 받을 것이니 그냥 있으시오. 내 추측으로는 울적을 풀기 위해서 어떤 요정에 들르셨다가 취중에 밤이 늦어서 그냥 주무시고 오실 모양이니 내일 하루만 기다렸다가 나와 함께 찾기로 합시다.”
이런 임기응변으로 수행원들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 왕의 부하가 문안차 찾아왔다.
“어제 늦도록 사냥을 하고 돌아오셔서 피곤하시기 때문에 아직 주무시고 있소.”
박제상은 그런 말로 속여 보냈다. 왕의 사신은 오정 때 또 미해공을 찾아왔다. 왕이 부른다는 전갈이었다.
“아까 잠깐 기침을 하셨으나 사냥 여독으로 몸살이 나서 또 자리에 누셨습니다. 약도 써야겠으니 그리 여쭈어 주시오.”
거짓말로 또 돌려 보냈으나 저녁 때 와서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해공이 병이라면 문병하겠다고 방으로 들어왔다.
“실은 미해공은 이미 신라로 돌아갔습니다.”
그제야 제상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왕의 신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있다가 소리쳤다.
“이놈 네가 신라에서 온 첩자였구나. 미해공을 탈출시켜 놓고 우리를 속였구나. 이 대담 무례한 놈!”
이미 죽을 각오를 한 박제상은 아무런 변명도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가 미해공에게 오늘 아침에 자기도 탈출해서 미해공이 미리 타고 기다릴 배로 가겠다고 약속한 것은 미해공을 혼자 탈출시키기 위한 핑계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떠나지 않고 집에 있었던 것도 자기마저 나가면 우선 사냥 수행원부터가 의심할 것이요, 하룻동안 추격을 연기시키지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배가 서투른 강구려가 해안에서 벌리 가지 못했을 때에 배에는 귀신같은 일본의 수병(水兵)에게 추격당하면 곧 잡힐 것이다. 그래서 박제상은 하루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의 길로 자신을 몰아넣었다.
목적을 달성한 이 순간에 박제상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가벼운 마음으로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고 곧 죽어도 좋다는 태도로 자기의 계획을 당당히 밝혔다.
“나를 어서 죽이시오. 그러나 신라에는 나라와 임금을 위해서 나 같이 죽음을 달게 받는 충신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라를 넘보지 마시오. 그리고 신라에서는 비록 적국의 충신이라도 예로서 죽이고 예로서 장사 지내는 미풍이 있으니 나를 욕된 방법으로 처형하지나 말아 주시오.”
박제상은 일본 왕 앞에 끌려가서도 이렇게 당당히 말을 했다.
“장한 각오다. 신라에 너같은 충신이 있다는 사실은 나로서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네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내 죄명이 신라의 충신이매 달게 사형을 받겠소. 이미 죽으려고 목욕재계했으니 어서 내 목을 베이시오.”
제상의 이와 같은 충사(忠死)로 말미암아 미해공은 四十년의 적국 인질에서 해방되어서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왔다. 박제상이 죽음으로 미해공을 귀국시켰다.
이 소문이 퍼지자 왕실을 비롯한 온 나라 백성은 크게 감격했다. 그러나 박제상의 귀국을 기다리던 그의 처자식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제상의 아내는 먼 눈으로 남편이 떠나는 배만 전송한 그날로부터 딸 三형제를 데리고 바닷가 내려다보이는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외국에서 충사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단정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종용(從容)히 독약을 마시고 순사(殉死)해서 남편의 뒤를 따랐다.
‘과연 충신의 아내다운 열녀다!’
세상 사람들은 치술령에 사당을 짓고 박제상 아내의 영혼을 치술신모(鵄述神母)로 모신 뒤에 춘추로 제향을 지내고 그 거룩한 덕을 길이 추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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