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신라 궁중비사] 5. 智證王과 巨大女

鶴山 徐 仁 2007. 2. 21. 21:45
첨성대제二十二대의 지증왕(智證王)까지를 신라의 고대사(古代史)로 한다.
 
이 고대사 마지막인 지증왕 때에 와서 서서히 발전해 오던 신라는 모든 국가제도가 정돈되고, 국토도 안정되었으며, 문화도 불교의 번영으로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왕의 뒤를 이은 二十三대의 법흥왕(法興王)과 二十四대의 진흥왕(眞興王) 삼대(三代)에 걸쳐서 눈부신 발전을 보았다. 그러니까 고대사에서 중고사(中古史)로 넘어오는 시대에 신라는 중흥기(中興期)를 맞은 셈이다.
 
지증왕은 청년 시절까지도 보통 왕족으로서 지냈다. 태자(太子)책봉을 받기 전에는 유명한 거인(巨人)이로서 퍽 고민을 했다. 그는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習寶)의 아들이었다. 그는 왕이 될 때까지의 이름은 지도로(知度路)라고 불리웠다. 부모는 아들 지도로가 수십척 장신의 거인이라 나이 三十이 되도록 결혼시킬 처녀를 구하지 못해서 큰 걱정으로 지냈다.
 
그 이유는 보통 여자로서는 거인 지도로리 배필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키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보통 의미가 아니고 더 심각한 생리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로 장사의 음경(陰莖)이 한자 다섯치나 되니 보통 여자는 첫날밤에 죽어버릴 거다. 적어도 八척 장신의 여장부라야 그의 아내로서 부부생활을 감당할 거야.
 
사람들은 동정 겸 호기심으로 수군거렸다. 부모는 왕족의 위신을 내리더라도, 거인 아들의 배필이 될 만한 거인 여자만 있으면 귀족가문의 딸이 아니고 평민의 딸이라도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여장부도 구하지 못해서 아들을 노총각으로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 거인 노총각 지도로가 장가들 운이 생겼다.
 
어느날 사냥꾼이 무량부(牟梁部)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떤 시냇가에 이르렀다. 그는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시내로 내려갔다가 빨래터에서 큰 자루와 같은 것을 발견했다.
 
“누가 빨래를 잊어버리고 갔군”하며 집어서 펴본 즉 그것은 자루가 아니고 굉장히 큰 여자의 속옷(下內衣)이었다.
 
“허어, 어떤 여자가 이렇게 큰 속옷을 입을까? 보통 여자 둘은 충분히 들어가겠다.”
 
사냥꾼은 호기심을 느끼고, 그 속옷을 들고 주인을 찾았다. 마침 어떤 소녀가 빨래를 하려고 왔으므로 물었다.
 
“색시, 이 빨래터에서 누가 빨래했는지 모르겠소?”
 
“모르겠는데요.”
 
“실은 이렇게 큰 속옷을 주웠는데 하도 이상도 하고 해서!”
 
“아, 그럼 저 건너 마을 상공댁(尙公宅) 아가씨 옷이군요.”
 
“상공댁 아가씨라고? 아니, 그 아가씨가 그렇게 몸이 큰가?”
 
“그럼요, 키가 八척이나 되는 여장사인데요.”
 
사냥꾼은 그 여장사 아가씨를 만나보고 싶었다.
 
‘오늘 사냥에 큰 수확이 될지 모른다.’
 
이런 생각으로 그는 건너 마을로 상공댁을 찾아갔다. 그가 대문에서 안을 들여다본즉 과연 八척 장신의 큰 처녀가 빨래 줄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높은 장대로 중간을 고여 놓은 빨래줄이 처녀의 턱에 닿을 정도로 키가 켰다. 키만 큰 것이 아니고 손이 짚신만 하고 코가 주먹만 하고 입이 송아지 입만이나 했다. 그는 그 여자의 입이 큰 것을 보고 번득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입이 저만큼 크면 딴 곳도 상당할 것이다. 지도로의 음경이 한자 닷치라지만 저 처녀면 아내 구실을 할 것이다.”
 
사냥꾼은 빨래터에서 생각한 오늘 수확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지도로에게 알맞는 처녀를 중매해 주면 큰 사례를 받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집 지체가 상공을 지낸 집안이라면 왕족과 혼인하는 데도 알맞을 지체다.’
 
사냥꾼은 처녀의 선을 몰래 본 뒤에 들고 왔던 그 처녀의 속옷을 대문 턱에 얹어 놓고 돌아섰다.  처녀의 속옷을 주어 왔다고 알리고 주기는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그길로 지도로의 부친 습보를 찾아갔다.
 
“소인은 모량부 시골에 사는 사냥꾼입니다. 댁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아, 무슨 일로 왔나. 어려워 할 것 없이 말해보게.”
 
“실은 오늘 사냥을 다니다가 우연히 댁의 도련님께 알맞을 좋은 규수를 발견했습니다.”
 
지도로의 부친은 듣던 중 반가운 말이라 귀가 번쩍 띄었다.
 
“그래, 대관절 키가 얼마나 되던가?”
 
“팔척 낭자라는데 제 눈으로 재어 보아도 여덟자 키는 충분합니다. 풍문에 듣기에는 댁의 도련님은 십척 장신이라는데 정말입니까?”
 
“그쯤 될 거야. 그래서 지금까지 배필을 못 구하고 있었네. 그런데 그렇게 몸 큰 처녀가 어디 있나.”

“네, 이야말로 천생 배필입니다. 몸 크기로나 지체로나 댁과는 아주 좋은 혼처입니다.”
 
“그 말은 알았으니 어서 규수집을 알려 주게.”
 
지도로의 부친은 그런 규수집이 궁금해서 재촉했다.
 
“제가 사는 무량부 땅의 박상공댁 규수입니다.”
 
“정말이겠지?”
 
주인 습보는 또 다짐해 물었다.
 
“제가 감히 왕가(王家)댁을 속이겠습니까?”
 
“됐네, 곧 왕께 아뢰고 그 집 규수와 혼인할 것을 허락 받겠네. 자네에겐 좋은 중매를 해주었으니, 비단 한필과 술값을 주겠네. 혼인 때는 와서 그 규수댁에 가서 잘 일을 봐드려야 하네.”

“네, 폐백짐은 제가 꼭 져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습보는 중매한 사냥꾼을 보낸 뒤에 곧 궁중으로 들어가서 소지왕(炤知王)에게 자기 아들의 혼인 허락을 청했다.
 
“상감, 신의 자식이 몸이 너무 커서 배필을 구하지 못해서 三十이 넘도록 성혼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왕손으로서 이런 일은 일찍이 없어서 황공하옵던 차에 마침 알맞은 배필감을 발견했습니다.”
 
“어오, 그것 참 경사요. 그래 그 규수는 어떤 가문의 딸이오?”
 
“박상공 집이라, 그럼 내가 알아서 그 집에도 분부하겠으니 혼인 준비를 하도록 하오”하고 왕도 기뻐하면서 예물을 하사했다. 그리고 소지왕은 특지(特旨)를 박상공에게 내려서 그의 딸과 지도로의 성혼을 성립시켰다. 소지왕은 지도로의 장사힘과 슬기를 특히 사랑했으므로 이 혼인에는 매우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소지왕은 마침 아들이 없었으므로 지도로를 태자로 맞아 들였다. 그러나 소지왕이 장수하고 승하했으므로 六十세에 제二十二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리하여 거인으로 왕이 된 지도로는 만년에 왕이 되었는데 지증왕이라 일컬었고 그전 이름대로 지도로왕이라고 불렀다.
 
거인의 아내다운 거인 왕후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라고 했는데 생리적으로 왕의 총애를 독점하였고 금실도 좋았으며 왕업(王業)의 내조(內助)도 많았다.
 
지증왕은 평생을 거의 평민으로 시정에서 생활했으므로 백성들의 실제 생활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이 부패한 관리들을 원망하는 사실도 잘 알았으므로 관기를 속청하고 반성을 하며 선왕(先王)시대까지 있던 순장법(殉葬法)을 폐지해서 시신들의 억울한 죽음을 구제했다. 종전에는 왕이 승하하면 죽어서도 충성껏 모신다는 취지에서 시신들이 왕을 따라서 죽었던 것이다.
 
<인명에는 귀천과 군신(君臣)의 차별이 없다. 임금이 죽었다고 신하가 따라서 산 목숨을 끊는 것은 첫째 천도(天道)에 어긋난다. 그리고 신하를 사랑하는 어진 임금의 뜻에도 어긋난다. 이런 폐습은 지나친 형식적 충성에 지나지 않으니 일종의 위선이다.>
 
이런 교서가 내리자 신하들과 백성들이 지증왕의 처사에 탄성을 올렸다.
 
“대왕은 옥체가 거대해서 힘만 세신 줄 알았더니 역시 큰 그릇에 관용(寬容)의 덕이 담겨계시다.”

시신들과 비복(婢僕) 계급의 천민(賤民)들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추앙했다. 양반을 상전으로 모신 남녀 종들은 상전이 죽으면 순장법에 따라서 생매장되었던 것이다. 이 순장법의 폐지는 노예에게까지도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는 인도적인 영단이었다.
 
이렇게 지증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이 잘 살수 있는 국법(國法)과 제도(制度)를 새로 만들었다. 백성들은 왕의 이러한 인정(仁政)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애군애국(愛君愛國)의 충성을 다했으므로 완만하던 신라사회의 발전이 급속도로 중흥(中興)의 기운을 발휘하고 모든 부면이 활기를 띠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은 종래의 농사짓는 법을 개량하고 소를 이용해서 논밭 가는 방법을 발명 장려해서 농부의 노력을 덜어 주고 경작 면적을 확장해서 양곡생산을 증가시켰으므로 백성의 생활이 넉넉해지고 나라 전체가 부해졌다. 그리고 제도상에 큰 변화는 재위 四년에 종래의 서라벌이라고 부르던 국호(國號)를 비로소 정식으로 신라(新羅)라고 개칭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六년에는 이사부(異斯夫)를 변방 주군(州君)의 지방장관으로 정하고 군사권까지 이양(移讓)해서 자주적(自主的)으로 외적의 침입에 대한 국방력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문화정책의 일대 전진으로는 신라에서 비로소 중국 북위(北魏)에 학자를 문화사절로 보내서 한문화(漢文化)를 수입했다. 그리고 국토확장 면에서도 특기 할 것은 十三년에 동해에 고립해 있던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을 싸우지 않고 지혜와 덕망으로 합병했다.
 
지증왕은 재위 十四년 동안에 많은 치적(治績)을 쌓아서 중흥의 기초를 놓은 뒤에 七十四세로 승하하고 연제부인 소생의 세자가 법흥왕(法興王)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