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신라 궁중비사] 3. 朴氏·昔氏 뒤의 金氏 王室

鶴山 徐 仁 2007. 2. 21. 21:41
첨성대신라 초창기에 왕실은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이 계승(繼承)했는데, 이것은 혈통직계가 아님을 뜻한다.
 
그러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의한 왕권쟁탈의 유혈극을 벌린 결과도 아니었다. 신라의 역사는 고대 신화적인 유덕자위왕(有德者爲王)의 미담(美談)으로 이루어진 역사였다.
 
서라벌 시조의 혁거세왕부터가 신화적 인물로서 성이 박씨였고 제 四대 왕인 탈해왕도 신화적 인물로서 성이 석씨였다. 그리고 제 五대의 왕태자(王太子) 알지도 신화적 인물로서 성이 김씨였던 것이다. 왕태자 김알지는 태자였지만 왕의를 사양하고 그의 六대손 김미추(金未鄒)가 제十三대 왕으로 등극해서 경주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탈해왕 시대는 왕 자신부터가 명군인데다가 애보(大輔) 호공(瓠公)이 명신이라 태평성세(太平聖世)를 구가(謳歌)했다.
 
전한(前韓) 영평(永平) 三년 八월 四일에 호공은 월성 서리(月星西里)의 계림(鷄林) 숲 옆을 지나고 있었다. 가을 바람에 단풍이 들기 시작한 계림의 경치가 곱고도 맑았다.
 
이때 계림에 갑자기 밝은 빛이 눈부시게 발산 하면서 오색 구름이 모여들었다. 이상하게 여긴 호공이 숲으로 가까이 가본즉 계수나무 가지에 황금 궤가 걸려 있었는데 눈부신 광채는 그 궤에서 발하고 그 나무 밑에서 흰닭(白鷄)이 울고 있었다.
 
“이것은 나라의 큰 경사올시다. 곧 거동하여 친히 보십시오.”
 
호공은 곧 왕에게 아뢰었다. 탈해왕이 예복을 갖추고 계림으로 거동한 뒤에 나무 위의 황금 궤를 내려서 열어 보자 그 궤 안에는 옥동자가 벙실벙실 웃고 있었다.
 
“상감, 이 옥동자는 하늘이 보내신 귀인입니다. 시조 박혁거세왕께서도 큰 박 같은 알 속에 이 모양으로 강림(降臨)하셨습니다”하고 호공은 왕에게 잘 양육할 것을 아뢰었다.
 
알지(閼智)
 
금 궤 속의 옥동자는 울음 대신에 이런 첫말을 했는데 알지는 서라벌의 말로 아기라는 뜻이었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김씨(金氏)라고 정했다. 그리고 길일을 택해서 이 김알지를 태자로 봉했다. 그러나 탈해왕이 승하한 뒤에 왕권(王權)을 유리왕의 아들에게 사양하니 이가 五대 파사왕(婆娑王)이다.
 
“저는 신하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더 큰 일을 하겠으니 지존(至尊)의 보좌(寶座)는 삼가 사양하겠습니다.”하고 겸양(謙讓)의 미덕을 발휘하고 동시에 권력 암투에 대한 교훈을 천추 후세에 남겼던 것이다.
 
그 김알지는 二백살이나 살면서 다섯 임금 밑에서 가장 높은 벼슬로 충성을 다했다. 그러다가 제十二대 이해왕(解王)이 승하한 뒤에 김알지의 六대손 김미추(金未鄒)가 즉위했는데 이 미추왕이 비로소 신라왕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왕비는 제十一대 조분왕(助賁王)의 공조 광명랑(光明娘)이었고 광명랑은 이름 그대로 달같이 얼굴이 곱고 마을이 명랑한 공주였다.
 
그리하여 신라 초기에는 박, 석, 김 삼씨는 혈연(血緣)으로도 왕권(王權)으로도 왕연일체의 가족적 왕실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추의 능은 처음에는 조당(祖當)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김씨로서 처음 된 임금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추왕 이후에는 김씨의 자손이 세습(世襲)으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제二十九대 태종(太宗) 무열왕(武列王) 김춘추(金春秋)가 처음으로 삼국통일의 대위업(大偉業)을 이루고 통일신라(統一新羅)를 이룩했다.
 
그리고 제五十六대 경순왕(敬順王)이 신흥고려(新興高麗) 태조 왕씨(王氏)에게 나라를 내어 줄 때까지 김씨가 왕실을 이어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