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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북진...그 아쉬웠던 역사 [ 5 ]

鶴山 徐 仁 2006. 11. 19. 13:15

august 의 軍史世界

 

북진...그 아쉬웠던 역사  [ 5 ]

 

 

 

처참했던 결과

 

북괴가 남침하여 낙동강까지 UN군을 밀어붙였을 때, 한 가지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쪽으로 전진 하면 할수록 전선을 계속 축소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하여 부대간의 단절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조밀한 북괴의 진격은 UN군의 돌파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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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방어선의 조밀한 대치는 피아 모두에게 돌파가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

 

제공권과 제해권이 박탈당하였음에도 북괴가 장기간 공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북괴의 압박을 풀게 된 것은 UN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배후를 절단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후 아직까지도 세계전사에 이를 능가할 상륙작전이 없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정도의 거대한 작전을 통하여서만 북괴의 압박을 겨우 제거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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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작전을 통해서 북괴군의 압박을 풀어 버립니다 ]

 

그것은 결국 낙동강 교두보에서 공격을 가한 북괴군이 틈이 없을 정도로 조밀하게 연결되어 공격을 가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물론 인천 상륙이 없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압도적인 보급을 바탕으로 전력을 정비한 UN군이 결국 낙동강교두보를 박차고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많은 시간과 희생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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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장으로 살펴 본 북진상황입니다.

조급한 북진과 이로인한 급격한 전선의 이동으로 간격이 확대 되었습니다 ]    

 

반면 북진을 개시한 UN군은 북진하면 할수록 전선이 넓어졌고 부대간의 단절은 필연적으로 발생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주력을 양분하여 북진경쟁을 유도하였다는 것은 횡적연결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종으로만 부대가 앞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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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변한 저항 한번 받지 않고 UN 군은 종으로 북을 향해 달려 나갑니다

( 38선을 최초로 돌파하여 북진의 선봉에 섰던 국군 제3사단 ) ]

 

결국 부대간의 간격과 앞전에서 설명한 보급의 제한은 UN군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간격은 참전을 결심한 중공군에게 훌륭한 침투로를 제공하여 주었고 공간을 유효적절이 이용한 중공군의 대 포위가 완성 되었을 무렵 처참하게 UN군 부대들은 각개격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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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어진 부대간 간격 사이로 대규모의 중공군이 출몰합니다

(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 ' 의 스틸 컷 ) ]

 

최근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모택동 자신도 참전을 망설이고 있었고 참전 바로 전날 결단을 내렸던 것처럼 참전초기의 중공군은 1951년 봄에 연이어 있었던 춘계 대공세 당시처럼 대규모 압박능력을 갖추었던 중공군과는 달리 급속한 참전 결정으로 전투력이나 보급능력 등의 총체적 역량이 사실 모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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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모택동 자신도 참전 직전까지 상당한 망설임을 하였고

그 만큼 초기에 한국에 투입 된 중공군의 역량 또한 부족하였습니다 ] 

 

하지만 신나게 북진을 하던 UN 군은 부대간의 간극을 통해 침투한 역량이 아직까지는 부족하였던 중공군에게 각개부대별로 포위를 당하여 처참한 패배를 당하였고 북진과 맞먹는 쾌속 (?) 의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중공군이 대단하였기 보다는 잘못된 진격방법을 택하였던 UN군 지휘부의 판단착오 때문에 발생한 측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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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급하게 참전한 중공군에게 UN군은 처참히 각개격파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잘못 된 북진방법을 택한 UN군 자신이었습니다 ]

 

너무나 아쉽지만 결국 무제한 경쟁적인 북진은 실패한 것으로 막을 내려야만 하였습니다.  스스로의 보급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고 부대간의 단절과 경쟁만 유도하였던 북진은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만 갔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이러한 성급한 북진이 실패 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교훈삼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