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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북진...그 아쉬웠던 역사 [ 끝 ]

鶴山 徐 仁 2006. 11. 19. 13:17

august 의 軍史世界

 

북진...그 아쉬웠던 역사  [ 끝 ]

 

 

 

청천강에 대한 미련

 

흔히 북진통일의 가장 큰 실패원인으로 중공군의 참전을 손꼽습니다.  august 또한 이러한 의견에 반론할 만큼의 또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듭니다.  하지만 아쉬웠던 것은 중공군의 참전이 충분히 예견되었던 당시 상황을 UN군 지휘부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였던 것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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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론의 여지없이 중공군의 참전은 북진 실패의 제1 원인입니다 ]

 

아니 중공군의 참전이 설령 분명해 보였다하더라도 그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고 이를 축소하여 애써 무시하려 하였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흔히 중공군을 무지막지한 인해전술을 앞세운 후진국군대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단지 쪽수가 아닌 고도의 심리전과 비정규전을 혼합한 참전경험이 풍부한 군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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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은 심리전과 비정규전을 혼합한 참전경험이 풍부하였습니다 ] 

 

오히려 북진을 지휘하던 UN군 지휘부 스스로 중공군이 이러한 전술 구사를 쉽게 할 수 있었던 여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부대간의 연결이 허술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아군의 후방을 적에게 열어두었다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마치 UN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북괴군의 배후를 절단한 것처럼 중공군은 이러한 간극을 최대한 이용하여 UN군의 배후를 차단하여 버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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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극을 최대한 이용한 중공군의 우회침투로 UN군은 부대별로 배후가 절단되어 갔습니다 ]

 

사실 UN군은 청천강-원산 이북으로 진군 할 때 다른 전략을 구사하여야 했습니다.  우선 이곳을 넘어 전진하면 누누이 설명한 것처럼 전선이 급격히 넓어지는데 당시 UN군 병력으로 전선을 3배 이상 확장하기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청천강-원산에 강력한 교두보를 먼저 설치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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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적 방어선인 청천강의 의미를 UN군은 간과하였습니다

( 최근 청천강의 모습 ) ]

 

대규모의 적 반격이 있을 경우 청천강-원산선만큼 적의 공세를 차단할 수 있을 만한 전략적 자연방어선이 북한지형에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물러나게 되면 다음에 방어선을 구축할 지점은 평택-삼척선인데 이것은 결국 북한 전체는 물론 서울까지 포기 할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청천강 교두보를 구축하지 못한 실기로 인해 역사는 최악의 상태로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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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진의 속도를 늦추더라도 위 선에 강력한 교두보를 먼저 설치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 

 

중공군 참전부터 종전까지 UN군은 화력에서 중공군을 항상 압도하였습니다.  특히 제공권과 제해권은 UN군이 거의 무주공산상태에서 운용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비록 병력에서 중공군에 밀렸다하더라도 화력을 앞세워 청천강교두보를 사수하였다면 충분히 공세를 막아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UN군 지휘부는 이런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한만국경에 도달하려는 노력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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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UN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만국경만을 쳐다보며 달려 나갔습니다.

( 혜산진의 압록강변을 점령한 미 7사단 ) ]

 

사실 청천강교두보를 완벽하게 확보한 후 주력을 8군과 10군단으로 분리하지 않고 먼저 평안북도 지역으로 UN군을 진격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동절기에는 결빙으로 가능하기는 하지만 압록강 하구지역은 강폭이 넓기 때문에 중공군의 대규모 도강이나 증원이 어려운 지역입니다.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중공군의 압박은 쉽게 억제하면서 제압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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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두보를 확보한 후 한만국경을 견제하면서 주력을 분리하지 말고

대우회전하여 전선을 축소시키면서 함경도 방향으로 진출하여야 했습니다 ]

 

이후 압록강연안을 계속적으로 견제해가면서 주력을 대 우회전 시켜 함경도방향으로 진출시켜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선면을 최대한 축소시킬 수가 있었고 만주지역을 통한 중공군의 침투로를 차단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하였겠지만 통일은 가능하였을지 모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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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10일 발행 된 기념우표입니다.  그 만큼 들떠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천혜의 방어선인 청천강 - 원산선의 방어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던 아군은 오히려 부대 간 간격을 넓혀가면서 북으로 달려갔고 결국 뒤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대책으로 북진만 하였던 당시 상황이 너무 원망스럽고 통일을 눈앞에 두고도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두고두고 아쉬울 뿐입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