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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북진...그 아쉬웠던 역사 [ 3 ]

鶴山 徐 仁 2006. 11. 19. 13:12

august 의 軍史世界

 

북진...그 아쉬웠던 역사  [ 3 ]

 

 

 

400년 전에도 있었던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가 征明假道 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 구로다 나가마사 黑田長政 등의 선봉 3개 군으로 하여금 조선을 유린하였던 것은 너무나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히, 주력인 고니시軍과 가토軍은 충주에서 합류 후 북상하여 서울을 함락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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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왜의 한성 공략도 ]

 

그런데 일본 오사카성에서 전쟁을 총괄 지휘하던 토요토미는 서울 점령 후, 침략군 주력을 둘로 나누어 고니시軍은 평안도지방을 가토軍은 함경도지방으로 나누어 각각 진격시켰습니다.  토요토미는 라이벌인 고니시와 가토의 경쟁심을 이용하여 조선침략을 조기완수 하고자 하였기 때문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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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공략 후 함경도로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 ]

 

이것은 한편으로는 겉으로 떠든 정명가도라는 것이 단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명분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의 기록입니다.  말 그대로 明나라 원정을 위한 길을 얻기 위함이었다면 굳이 주력을 양분하여 조선에서도 외지라 할 수 있는 함경도 지역으로 진출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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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표와 같이 서울 점렴 후 왜는 주력을 양분하여 침략을 재촉 합니다 ]

 

일본이 명으로 진출하려면 당연히 경의축선을 따라 북진하여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고 당시 함경도 북쪽의 만주는 여진족이 실질적으로 관할하던 명의 강역은 아니었기 때문에  침략군을 둘로 쪼개는 것은 일본 스스로 명의 정벌은 단지 명분이고 조선침략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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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토미는 두 가신의 라이벌의식을 이용하여 조선을 빠른 시일 내 정복하고자 하였습니다 ]

 

이렇게 전력이 분산 된 평안도의 왜군은 조명연합군에 의하여 진격이 둔화되었고, 함경도로 진출한 가토군은 비록 왕자를 생포하는 등의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조선민중의 끓임 없는 게릴라식 항전과 이순신 장군이 제해권을 확보하고 보급을 차단시키자 어쩔 수 없이 첩첩산중에 고립되어 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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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왜의 야욕은 구국의 영웅들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

 

서울 수복 후 맥아더는 아군 주력을 8군10군단으로 분산하여 동과 서로 나누어 진격하였습니다.  비록 당시시점으로는 그것이 맞다 하여도 도쿄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맥아더는 400년전의 역사적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듯합니다.  토요토미처럼 전력이 분산된 상태에서 대륙으로부터 새로운 적들이 밀려올 경우 방어가 힘들다는 교훈을 맥아더는 간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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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인지 일본에서 전쟁을 지휘한 맥아더도 400 년전 토요토미와 같은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

 

그것은 서구인으로써 동양의 역사를 제대로 몰랐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전쟁을 빨리 종결 짐으로써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맥아더의 의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맥아더는 1950년 9월말 기준으로 볼 때 북괴를 충분히 제압 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전력을 둘로 나누었고 그 중 충실한 부하였던 워커알몬드로 하여금 북진 경쟁을 유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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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서부전선의 북진을 독려하기 위해 8군을 방문한 맥아더와 8군 사령관 워커 ]

 

맥아더의 두 장군이 서로를 견제하고 질투를 하였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8군과 10군단은 엄청난 속도의 북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400년 전 토요토미의 가신이었던 고니시와 가토가 경쟁하였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내용은 400년 전의 진격은 조선침략이었지만 두 맹장의 북진은 통일을 위한 것이어서 사뭇 달랐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