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
북진...그 아쉬웠던 역사 [ 1 ]
韓滿국경을 향하여
1950년 10월 1일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선두로 하여 38선을 돌파한 UN군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진군을 개시합니다. 그런데 38선 이북의 한반도 지형은 마치 모래시계처럼 황해도 돌출부로 인하여 갑자기 전선이 넓어졌다가 청천강 하류인 서한만과 원산부근의 동한만 사이의 좁은 지역이 나타나게 되고 이 이상을 북진하게 되면 전선이 갑자기 3배 이상 벌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 38선 이북은 청천강-원산을 기준으로 넓어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하는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
맥아더가 지휘하던 UN군 수뇌부는 일관 된 전선을 구축하기 불리한 이러한 지형적인 여건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낙관적으로 내다보았습니다. 남침하였다가 후퇴하지 못한 북괴의 주력은 이미 퇴로를 차단당하여 지리산과 같은 첩첩산중으로 숨어들어 천천히 소탕하면 되는 상황이었고, 38선 이북의 북괴군은 더 이상 UN군을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괴멸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서울 탈환 후 UN군은 국군 3사단, 수도사단을 필두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합니다 ]
거기에다가 공산종주국 소련도 겉으로는 직접적인 개입을 꺼리는 눈치였고 국경을 마주한 중공정부는 외교성명이나 제3국의 외교라인을 통하여 UN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 할 경우 개입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었지만, 장기간의 대일항전과 내전을 간신히 끝내고 나라를 건국한지 1년도 되지 않는 신생후진국이 대규모로 참전 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 한국전 미스테리 중 하나가 소련이 초기에 보여 준 행동이었습니다
안보리회의에서 거부권을 행사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불참하여 기권을 하였습니다
이런 여러 이유로 미국은 소련이 한국전에 소극적인 개입만 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
UN군 지휘부는 이와 같은 전황분석에 의거하여 최단 시간 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군에 대해 빠른 북진을 재촉합니다. 물론 적의 수도인 평양이 우선의 목표이기는 하였지만 평양점령 후 급격히 넓어지는 전선으로 부대를 산개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대책이 사실 UN군 지휘부에게는 없었습니다.
[ 1950년 가을의 북진은 한마디로 대책없는 무한 레이스 였습니다 ]
앞에서 설명 한 것처럼 청천강 - 원산 이북으로 올라가면 전선이 급격히 넓어지는 지형적인 여건은 각 예하 부대들이 북진하면 할수록 그 간격이 점점 멀어지고, 결국 전선이 단절된체 각개전투 형태로 한만국경에 다가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생각하였던 지휘부는 북진속도를 재촉하기 위해서 오히려 엉뚱한 작전을 수립하였습니다.
[ 횡적 연결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한만국경을 향하여 종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
청천강 - 원산 이북의 한반도는 험준한 산악지대이며 특히 함경도와 평안도를 예전에는 낭림산맥으로 불린 백두대간이 나누고 있습니다. 이러한 백두대간으로 인하여 사실 부대간의 연결이 원활할 수는 없지만 이를 빌미로 하여 굳이 부대간의 작전을 구분하여 별도의 지휘라인을 만들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 더구나 맥아더는 전선을 둘로 나누어 버리는 전략상의 실수를 저지릅니다 ]
그런데 UN군 지휘부는 조우가 충분히 예상되는 중공의 위협을 과소평가하여 지휘부를 둘로 나누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UN군 지휘부는 평안도 지역인 서부전선은 낙동강으로부터 북진을 하여온 미8군이 지휘권을 행사하여 미1군단, 미9군단, 국군2군단을 지휘하도록 하였고, 함경도의 동부전선은 미10군단으로 하여금 국군1군단을 함께 지휘하는 형태로 8군과 분리된 별도의 작전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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