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天人無間
능주로 가는 29번 국도로 접어들자 다시 세설이 흩날리기 시작하였다.터널을 지날 때보다 조금 더 알이 굵어진 가랑눈이었다.나는 윈도브러시를 작동시킨 후 히터를 틀었다.
문득 내 머릿속으로 불과 1개월간 머물고 있던 바로 이곳 능주에서 지은 조광조의 시 한 수가 기억되어 떠올랐다.이곳 능주를 가리키는 옛 이름,‘능성(綾城)에서 유배 중에 지은시’라는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이곳에 유배되어 온 자신을 ‘말 잃은 마부(失馬翁)’와 같아 ‘독 안에 들어있어 빠져 나오기 어렵다(難出覆盆中)’고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조광조.
그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유배를 와서 아까운 나이 37세의 젊은 나이에 왕 중종으로부터 역적의 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죽게 되었는가.
화순에서 능주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능주에서 나는 다시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유허비의 위치를 물어보았다.경운기에 무엇인가를 잔뜩 싣고 가는 노인 하나가 잘 알고 있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이제 거의 다 온 모양이었다.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주유소를 끼고 좁은 길로 들어서 500m쯤 나아가자 키 낮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몇 채의 초라한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작은 주차장까지 마련되어 있어 그곳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정문 옆에는 적려유허비를 설명하는 안내문이 철판으로 만들어 세워져 있었는데,영문과 더불어 한글로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소재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이 비는 조광조(1482~1519) 선생이 이곳에서 사사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중종 반정 이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다가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중종 14년(1519년) 이곳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1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그 후 현종 8년(1667년) 당시 능주 목사인 민여로(閔如老)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글을 받아 이 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되새기게 하였다.”
매우 간단한 설명문이었다.비록 37세의 짧은 인생을 살고 갔지만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던 조광조의 일생을 요약하여 안내판에 축소시킨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던 것일까.
나는 천천히 활짝 문이 열려져 있는 정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이 유허비가 있었던 곳은 능성현의 북문이 있었던 곳으로 원래는 비신과 이를 보호하는 비각일원뿐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조광조가 유배하고 있던 초가집을 복원하고 영정을 모신 사당과 강당을 증축하여 이와 같은 건물군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정문을 들어서자 기념관이 보였다.아마도 이 기념관의 소유자가 조광조의 후손인 한양 조씨의 문중으로 보면 누군가가 이 사당을 지키고 관리하고 있을 법도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대청마루 입구에 방명록이 펼쳐진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나는 방명록에 쓰여진 사람들의 이름을 훑어보았다.가장 최근에 가까운 중학교에서 단체로 이곳을 찾아와 견학했는지 개인의 이름이 아닌 학교의 이름이 맨 나중에 쓰여져 있었다.
나는 고무줄로 묶어놓은 볼펜을 들어 빈 칸에 내 이름을 썼다.
최상욱(崔相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