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儒林(1)-제1부 王道 제1장 天人無間

鶴山 徐 仁 2006. 10. 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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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王道

제1장 天人無間

너릿재 터널을 지나자 흐린 하늘에서 희끗희끗한 벌레 같은 물건들이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이 깊은 가을에 웬 하루살이 같은 날벌레들인가 하고 눈여겨보았더니 가늘디가는 세설이었다.

광주를 출발할 때부터 잔뜩 하늘이 찌푸려 있어 비라도 뿌릴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가랑눈은 뜻밖이었다.찾아가는 길이 초행길이라 눈이 계속 내리면 난처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가랑눈은 차창에 맺힌 순간 곧 녹아 버릴 정도의 분설(粉雪)이었다.

터널을 지나자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이 펼쳐졌다.들판은 텅 비어 있었고,죽은 허수아비들이 방치된 채 드문드문 서 있었다.탈곡하여 낟알들을 털어낸 볏단들도 빈 들판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11월 중순이라 깊은 가을이라기보다는 초겨울의 느낌이 드는 황량한 들판에는 이따금 일부러 불을 태워 검게 그슬린 흔적들이 늙은 노인의 얼굴위에 피어난 검버섯처럼 점점이 박혀 있었다.

평일이 되어서 그런지 다행스럽게도 국도에는 오가는 차량들이 드물었다.그래서 비교적 차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화순읍 네거리에서 미리 광주에서 사전 준비해 둔 대로 J병원 앞까지는 무사히 도착하였지만 병원 앞 사거리에서 나는 차를 멈췄다.사거리에서 우회전해야 하는지 좌회전해야 하는지 순간적으로 헷갈려 정확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길을 안내해준 P형도 내게 이렇게 말을 했었다.

“길이 좀 복잡해서 몇 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좀 귀찮더라도 모르는 초행길은 현지 주민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차에서 내려 눈에 띄는 약방 안으로 들어갔다.약방 주인은 TV 화면을 쳐다보고 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맞았다.

“길 좀 묻겠습니다.적려유허비를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약방 주인은 얼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하였다.

“그러면 능주로 가는 방향은 어느 쪽입니까.”

“능주라면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세요.29호 국도를 따라 가다 보면 능주가 금방 나올 겁니다.”

능주로 가는 방향을 알았으므로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다시 차에 올라타서 주인이 가르쳐 준 대로 오른쪽으로 우회전을 하자 과연 능주로 가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

내가 약방 주인에게 물었던 것은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곳인 적려유허비인 것이다.‘적려’라 함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가는 곳을 말하는 것으로 ‘적려유허비’는 문자 그대로 능주로 귀양 가서 죽었던 사람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는 곳인 것이다.

적려유허비의 원 이름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 적려유허비’.그러므로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곳은 조광조란 역사적 인물이 귀양 와서 비참하게 죽은 바로 그 장소인 곳이다.

조광조.

1519년(중종 14년) 11월.이곳 능주로 유배되어 귀양 온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치가.이곳으로 유배되어 온 지 불과 한 달 만인 12월5일 조광조는 바로 이곳에서 사약을 먹고 죽는다.

그러므로 거의 500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약방 주인이 자기 손바닥 안의 고장에 있는 유적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고 해서 그의 무관심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아니다.어찌 약방 주인만을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미친 광기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우리들 모두는 이미 조광조뿐 아니라 역사 그 자체를 잃어버린 이방인이 아닐 것인가.

기사일자 : 2004-01-05    0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