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일본 국보 1호' 도 한국의 작품.

鶴山 徐 仁 2006. 8. 23. 19:31
 
         
한국 (백제 혹은 신라)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현재 한국 국보)  
 

            
<일본 국보 1호> 일본<고류사> (절)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이 불상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선물로 보내다.
 
시간이 없어서 나무로 만들어 보내다. 
 

 
  
코벨 박사가 본 일본 '고류사(광륭사=廣隆寺) 불상'
 

서양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일본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고
 
20여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했던
 
존 카터 코벨은 '고류사' 미륵불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안치된 <고류사>는
 
603년 한국에서 이주해 온 직물기술자 진하승(秦何勝)이 건립한 절이다.
 
그는 한국계 혈통을 지닌 '쇼토쿠 태자'와 절친한 사이였다.
 
쇼토쿠 태자가 48세에 홍역으로 급사하자
 
하타노는 자신이 세운 절인 고류사에 자신이 존경했던 쇼토쿠 태자를 기리려는
 
미륵보살상을 신라에 요청했다.
 
신라의 장인은 시일이 촉박하여 청동으로 주조하는 대신 적송 통나무 하나에서 걸작 미륵보살상을 깎아내고
 
그 위에 금을 입혔고, 그 불상이 '목조미륵반가사유상' 이다.
 
봄에 서거한 태자를 기린 금부처가 7월(623년)에 도착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
 
불상의 일본 도착 시기도 알 수 있다.”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광륭사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며,
 
출가 이전의 이러한 태자 모습은 중생 제도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실존철학자인 독일의 야스퍼스(1883-1969)는 이 불상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그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예술미의 극치이다."
  
이 불상이 신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초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고대 기록에 전해지는 동시에 현대의 일본 고대사학자들이나, 미술사가들이 한결같이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일부 학자가 이 불상이 "신라"에서 온 것이 아니고,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불상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 90Cm)"이
 
바로 고류사의 목조 신라불상과 똑같은 형태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가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어 현재는 삼국 시대의 것으로만 되어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륭사의 이 신라 목조 불상이 일본 고대 다른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적송(赤松)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나무이다.
 
즉 적송으로 조각한 것은 한국의 목조 불상의 특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