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간혹 영화에서 도망치는 주인공이 마술이나 주술의 힘에 휩쓸려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도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도 산을 오를 때나 넓은 고원 등에서 이렇게 방향 감각을 잃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링반데롱’이라고 한다.
안개나 눈보라를 만나거나 등반자가 피로한 상황일 때 주로 나타난다. 분명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일한 장소에서 원을 그리며 돌고 있게 되는 것이다. 장마비에 오른 소요산(587m)은 비록 링반데롱까지는 아니었지만 방향 감각을 상실해 목표했던 곳과는 다른 엉뚱한 곳으로 하산하는 경험을 안겨 줬다.
소요산은 서화담(서경덕)·양봉래(양사언)·매월당(김시습)이 자주 소요(逍遙)하였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워서 경기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한 탓에 그 진면목을 볼 수는 없었다.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비구름이 마치 속살을 내비칠 수 없다는 듯 산의 깊은 곳을 다 가려 버렸다.
반대로 물소리만은 힘차 등산로 초입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마주치는 원효폭포는 그 기세가 하늘에 닿을 듯했다. 힘차게 내뿜는 물기둥이 마치 소방 호스에서 뿜어나오는 물줄기를 닮았다. 잠시 비오는 것도 잊은 채 지켜보다 자재암으로 올라선다. 10분여 발걸음을 옮기니 목탁소리가 청정하게 들려온다. 거세지는 빗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말 그대로 도량답다. 옆으로는 옥류폭포가 암자를 삼키려는 듯 쏟아진다. 폭포는 하나였을 테지만 빗줄기에 어느새 사방이 폭포로 둔갑하고 있다.
하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경사가 급하다. 돌로 된 길로 물이 넘쳐 흐르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물먹은 솜뭉치처럼 바짓가락이 축 처지고. 납덩이를 단 듯 발걸음은 무겁다. 평상시보다 2배 이상 힘든 것 같은 오르막길을 가쁜 숨을 쉬며 오른다.
잠시 주춤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산속의 비는 소리부터 먼저 온다. 나뭇잎에 듣는 빗소리 후 한참 만에 몸을 두들긴다. 그 두들김이 노곤한 몸을 안마하는 듯하여 기분은 묘하게도 좋다.
하백운대부터 중백운대까지는 400m 능선 길이다. 팍팍하던 다리에 힘이 다시 솟는다. 물먹은 소나무가 비구름을 배경으로 맵시를 뽐낸다. 공기는 온통 하얀 입자로 가득 차 10m 앞이 겨우 보일 정도다.
중백운대서 상백운대로 가는 길. 산악회 사람들이 20여 명 지나간다. 오직 비와 더불어 걷던 길에 사람들을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스레 지나 갈림길에 다다른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고 단순히 갈림길이라고만 쓰여 있다. 오른쪽 길은 바로 하산할 듯하여 왼쪽 길을 택했다. 평온한 능선에 마음도 점차 차분해진다.
그런데 30여 분을 걸었는데도 더 이상 이정표가 눈에 띄지 않는다. 중백운대서 상백운대까지는 500m. 진작 지나쳤을 법도 하건만 조금 이상한 느낌이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길은 뚜렷하고. 리본까지 걸려 있다. 의심을 떨쳐 버리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급하게 내려앉는 길을 따라 걷기를 다시 30여 분. 큼직큼직한 돌들로 이루어진 널따란 길이 나타난다. 하산 길을 택하자니 아직 시간·체력적으로 여유가 있고. 목표로 세웠던 나한대·의상대를 보지 못해 욕심을 내 오르막 쪽을 택했다.
하지만 이내 길은 자취를 감췄다. 계곡 사이 흐르는 물의 높이도 점차 높아져 급히 하산을 결정했다. 복숭아뼈까지 차오른 길을 서둘러 내려서니 ‘아뿔싸’ 포천이었다. 출발점으로 되돌아왔을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깨버리고 산의 뒤편인 열두개울 쪽으로 내려선 것이다. 비구름·안개뿐만이 아니라 욕심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번 산행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비록 정상에 오르진 못했다 할지라도 진짜 소요를 즐겼으니 말이다. 우중소요(雨中逍遙)!
■등산로
1. 관리사무소→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선녀탕→자재암→관리사무소(5.7㎞·1시간 30분)
2. 관리사무소→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선녀탕→자재암→관리사무소(6.2㎞·2시간 30분)
3. 관리사무소→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나한대→자재암→관리사무소(6.9㎞·3시간)
4. 관리사무소→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나한대→의상대→구절터→일주문→관리사무소(7㎞·3시간 30분)
5. 관리사무소→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나한대→의상대→공주봉→구절터→일주문→관리사무소(8.2㎞·4시간)
■가는 길
▲대중교통: 기차로는 의정부역에서 신탄리 방향 경원선을 타고 소요산역에서 하차(매시 20분에 출발. 소요산에서 의정부로 돌아오는 것은 매시 42분). 버스는 수유역·쌍문역·도봉역·의정부북부역·동두천 등을 경유하는 36번·136번·139번을 이용하면 된다.
▲자가용: 서울→의정부→3번 국도를 타고 동두천으로→전곡 방향 3번 국도→소요산사거리서 우회전.
동두천=글·사진 이방현 기자
간혹 영화에서 도망치는 주인공이 마술이나 주술의 힘에 휩쓸려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도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도 산을 오를 때나 넓은 고원 등에서 이렇게 방향 감각을 잃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링반데롱’이라고 한다.
안개나 눈보라를 만나거나 등반자가 피로한 상황일 때 주로 나타난다. 분명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일한 장소에서 원을 그리며 돌고 있게 되는 것이다. 장마비에 오른 소요산(587m)은 비록 링반데롱까지는 아니었지만 방향 감각을 상실해 목표했던 곳과는 다른 엉뚱한 곳으로 하산하는 경험을 안겨 줬다.
소요산은 서화담(서경덕)·양봉래(양사언)·매월당(김시습)이 자주 소요(逍遙)하였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워서 경기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한 탓에 그 진면목을 볼 수는 없었다.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비구름이 마치 속살을 내비칠 수 없다는 듯 산의 깊은 곳을 다 가려 버렸다.
반대로 물소리만은 힘차 등산로 초입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마주치는 원효폭포는 그 기세가 하늘에 닿을 듯했다. 힘차게 내뿜는 물기둥이 마치 소방 호스에서 뿜어나오는 물줄기를 닮았다. 잠시 비오는 것도 잊은 채 지켜보다 자재암으로 올라선다. 10분여 발걸음을 옮기니 목탁소리가 청정하게 들려온다. 거세지는 빗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말 그대로 도량답다. 옆으로는 옥류폭포가 암자를 삼키려는 듯 쏟아진다. 폭포는 하나였을 테지만 빗줄기에 어느새 사방이 폭포로 둔갑하고 있다.
하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경사가 급하다. 돌로 된 길로 물이 넘쳐 흐르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물먹은 솜뭉치처럼 바짓가락이 축 처지고. 납덩이를 단 듯 발걸음은 무겁다. 평상시보다 2배 이상 힘든 것 같은 오르막길을 가쁜 숨을 쉬며 오른다.
잠시 주춤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산속의 비는 소리부터 먼저 온다. 나뭇잎에 듣는 빗소리 후 한참 만에 몸을 두들긴다. 그 두들김이 노곤한 몸을 안마하는 듯하여 기분은 묘하게도 좋다.
하백운대부터 중백운대까지는 400m 능선 길이다. 팍팍하던 다리에 힘이 다시 솟는다. 물먹은 소나무가 비구름을 배경으로 맵시를 뽐낸다. 공기는 온통 하얀 입자로 가득 차 10m 앞이 겨우 보일 정도다.
중백운대서 상백운대로 가는 길. 산악회 사람들이 20여 명 지나간다. 오직 비와 더불어 걷던 길에 사람들을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스레 지나 갈림길에 다다른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고 단순히 갈림길이라고만 쓰여 있다. 오른쪽 길은 바로 하산할 듯하여 왼쪽 길을 택했다. 평온한 능선에 마음도 점차 차분해진다.
그런데 30여 분을 걸었는데도 더 이상 이정표가 눈에 띄지 않는다. 중백운대서 상백운대까지는 500m. 진작 지나쳤을 법도 하건만 조금 이상한 느낌이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길은 뚜렷하고. 리본까지 걸려 있다. 의심을 떨쳐 버리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급하게 내려앉는 길을 따라 걷기를 다시 30여 분. 큼직큼직한 돌들로 이루어진 널따란 길이 나타난다. 하산 길을 택하자니 아직 시간·체력적으로 여유가 있고. 목표로 세웠던 나한대·의상대를 보지 못해 욕심을 내 오르막 쪽을 택했다.
하지만 이내 길은 자취를 감췄다. 계곡 사이 흐르는 물의 높이도 점차 높아져 급히 하산을 결정했다. 복숭아뼈까지 차오른 길을 서둘러 내려서니 ‘아뿔싸’ 포천이었다. 출발점으로 되돌아왔을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깨버리고 산의 뒤편인 열두개울 쪽으로 내려선 것이다. 비구름·안개뿐만이 아니라 욕심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번 산행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비록 정상에 오르진 못했다 할지라도 진짜 소요를 즐겼으니 말이다. 우중소요(雨中逍遙)!
■등산로
1. 관리사무소→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선녀탕→자재암→관리사무소(5.7㎞·1시간 30분)
2. 관리사무소→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선녀탕→자재암→관리사무소(6.2㎞·2시간 30분)
3. 관리사무소→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나한대→자재암→관리사무소(6.9㎞·3시간)
4. 관리사무소→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나한대→의상대→구절터→일주문→관리사무소(7㎞·3시간 30분)
5. 관리사무소→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나한대→의상대→공주봉→구절터→일주문→관리사무소(8.2㎞·4시간)
■가는 길
▲대중교통: 기차로는 의정부역에서 신탄리 방향 경원선을 타고 소요산역에서 하차(매시 20분에 출발. 소요산에서 의정부로 돌아오는 것은 매시 42분). 버스는 수유역·쌍문역·도봉역·의정부북부역·동두천 등을 경유하는 36번·136번·139번을 이용하면 된다.
▲자가용: 서울→의정부→3번 국도를 타고 동두천으로→전곡 방향 3번 국도→소요산사거리서 우회전.
동두천=글·사진 이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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