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편찬에 참가한 찬수관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摠裁官):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도청
당상(都廳堂上): 김석주(金錫胄), 오시수(吳始壽), 민점(閔點), 홍우원(洪宇遠), 이관징(李觀徵), 이당규(李堂揆) 도청 낭청(都廳郞廳):
유명현(柳命賢), 강석빈(姜碩賓), 이항(李沆), 유하익(兪夏益), 권유(權愈), 육창명(陸昌明), 육임유(陸林儒), 이담명(李聃命),
오시대(吳始大), 최석정(崔錫鼎) 일방 당상(一房堂上): 오정위(吳挺緯), 이홍연(李弘淵), 홍처대(洪處大), 윤심(尹深) 일방
낭청(一房郞廳): 이수만(李壽曼), 이하진(李夏鎭), 권해, 유명천(柳命天), 윤지선(尹趾善) 이방 당상(二房堂上): 민희(閔熙),
김우형(金宇亨), 목내선(睦來善), 정석(鄭晳) 이방 낭청(二房郞廳): 오정창(吳挺昌), 곽제화(郭齊華), 이덕주(李德周), 이일정(李日井),
권환 삼방 당상(三房堂上): 김휘(金徽), 이무, 이우정(李宇鼎) 삼방 낭청(三房郞廳): 조사기(趙嗣基), 임상원(任相元), 김환(金奐),
이수경(李壽慶), 오시복(吳始復), 이유(李濡) 등록 낭청(謄錄郞廳): 유성삼(柳星三), 유정휘(柳挺輝), 김두명(金斗明), 이국화(李國華),
이후정(李后定), 유하겸(兪夏謙), 박진규(朴鎭圭), 심벌, 이명은(李命殷), 이정만(李挺晩), 김원섭(金元燮), 정환(鄭煥),
성석신(成碩藎), 권규(權珪), 박경후(朴慶後), 안여악(安如岳), 이태귀(李泰龜), 강선(姜銑), 이세익(李世益), 유수방(柳壽芳)
2.《현종실록》의 내용
현종(顯宗: 1641~1674)의 이름은
연(鮟), 자는 경직(景直)이며,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맏아들이다. 효종이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청나라의
심양(瀋陽)에 인질로 있을 때 심관(瀋館)에서 탄생하였다.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효종이 즉위하자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현종은 즉위하자 바로 복제(服制) 문제에 직면하였다. 효종의
상(喪)에 입을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의 복제가 《국조오례의》에 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시열(宋時烈) 등은 효종이 인조의 차자라
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고, 윤휴(尹鑴)는 효종이 대통을 계승하여 군림하였다는 이유로 3년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조정으로 장자와 차자를 구별하지 않은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익년 2월에 허목(許穆)이 《의례》의 주소(註疏)를 근거로 다시 장자 3년설을 주장하여 격심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서인과 남인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서인들의 주장이 우세하여 기년복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1674년
2월에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대두하였다. 《경국대전》에 아들에 대한 복제는 장자와 차자를 구별하지
않았지만, 자부에 대한 복제는 장자부 기년, 중자부(衆子婦) 대공(大功)으로 구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예송은 남인이 촉발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서인과 국왕 사이에 전개되었다. 현종이 남인들의 예설에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년설이 채택되었고, 서인들이 문책을 받아 실세하자
1675년에는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때문에 《현종실록》에는 복제 예송에 관한 기사가 대단히 많이 수록되어 있다. 현종 대에는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1662년(현종 3)에는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시행하였고, 양역변통(良役變通)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자연재해가 심하여 민생의 고통이 심하였다. 1666년에는 난파인 하멜(Hamel,H.) 등이 일본으로 탈출하였고,
1668년에는 동철활자(銅鐵活字) 10여 만자를 주조하였으며, 혼천의 (渾天儀)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曆法) 연구에 사용하였다.
1669년(현종 10)에는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설치해 급료병을 축소시켜 재정을 절약하고자 하였다. 1682년 정초청 (精抄廳)과 합쳐
금위영(禁衛營)이 되었다. 현종 대 15년 간에는 송시열·송준길(宋浚吉)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중심이 된 산당(山黨) 계통의 서인들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김육(金堉) 일가를 중심으로 한 한당(漢黨)과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현종은 처음에는 송시열·송준길 등을 존중하여
예우하였으나 말년에는 싫증을 내어, 남인 허적(許積)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인척이었던 동복오씨(同福吳氏) 그리고 김석주(金錫冑)를 비롯한 청풍김씨(淸風金氏) 외척 세력을 중용하였다. 이들은 1674년의 제2차 예송에서 기년설을 지지하여
서인정권을 축출하는데 기여하였다. 현종은 제2차 예송이 귀결된 직후 병으로 훙서하였다. 존호는 소휴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昭休純文肅武敬仁彰孝),
묘호는 현종(顯宗), 능호는 숭릉(崇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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