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전건축

鶴山 徐 仁 2006. 7. 2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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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지사



석굴암



석굴암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서기 7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로 칭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다. 석굴암의 입구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신장을 두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 석주를 세웠고 이곳을 지나면 평면원형의 주실로
본존은 중심에서 약간 뒤로 안치되어 있으며 입구 좌우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로 주벽을 채우고 본존 정후면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

조각에 있어서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내의 보살들의 유연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있는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 것이다.

특히, 주실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그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에 이름이 높다.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공간에도 본존불을 중심으로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은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졌다.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궁륭(Dome)천정으로 짜여진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주실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대불이 있고,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범천상(梵天像)과 제석천상(帝釋天像), 보현(普賢)·문수(文殊)보살상,
그리고 십대제자상(十代弟子像)이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돼 있다.

일찍이 당나라의 현장(A.D602~664)이 17년간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한후 지은
풍물지리지 성격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바로 그 자리에
대각사(大覺寺)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정각을 이룬 모습의 불상이 발을 괴어 오른발 위에 얹고,
왼손은 샅 위에 뉘었으며 오른손을 늘어뜨리고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대좌의 높이는 당척 4척2촌이고 넓이는 1장2척5촌이며 상의 높이는 1장1척5촌,
양 무릎폭이 8척8촌, 어깨폭이 6척2촌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 크기와
이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데, 현장이 보았던 대각사의 그 불상은 현존하지 않고 있어
석굴암에 역사적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 이르면 한가운데에 높이 350cm의 석가모니 대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으로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成道像)이라고 한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代項面) 황악산(黃嶽山)에 있는 사찰.

고구려의 아도(阿道)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 사적비(寺蹟碑)가 허물어져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418년(눌지왕 2)에 묵호자(墨胡子)가 경북 구미시에 있는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이, 930년(경순왕 4)에는 천묵(天默)이 중수하고,
936년(태조 19)에 능여(能如)가 고려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거의 타버려 1610년(광해군 2)에 복구에 들어가 60여 년 후 작업을 끝맺었다.

직지사라는 절 이름은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학조(學祖)가 주지로 있었고, 유정(惟政)이 여기서 승려가 되었다.

경내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319), 대웅전 앞 3층석탑(보물 606),
비로전 앞 3층석탑(보물 607), 대웅전 삼존불 탱화 3폭(보물 670),
청풍료(淸風寮) 앞 3층석탑(보물 1186) 등의 문화재가 있다.



남 대 문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국보 1호인 남대문
  
남대문은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성문 건축물이다.
장중하고 내부구조가 튼튼하여 수도의 성문으로 당당한 면모를 지닌
전형적인 다포양식의 건물로 견실한 목조건축물의 수법을 보이고 있는
조선초기의 대표적 건축이라 할 수 있다.

한양의 성문 중 가장 대표적인 문으로 가장 먼저 계획된 문으로
태조<太祖> 5년(1396) 1월[상량문에 "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六日"이라 한 바
축조년이 추정]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에 준공해서 세종<世宗> 30년(1448)에 재건하였고
성종<成宗> 10년(1479)에도 중수<重修>되었다. 이 후 6.25와
교통량 증가로 인한 매연과 진동으로 1961년부터 3년간 완전해체 보수되었다.

  중층 우진각 지붕의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문은 강화석 홍예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기단 위에
층루로  , 기둥은 굵직한 둥근 기둥이며 기둥머리에는 키가 큰 창방을 걸고 그 위에
큰 치수의 평방 돌린 다포식<多包式>의 공포를 배치하였는데 공포수법은 하층은 내외 2출목이고
상층은 외 3출목, 내 2출목이다. 공포 형태는 전형적인 초기형식을 따르지만
쇠서의 형태가 다소 위로 호형을 이룬 곡선이다. 천장에는 가구된 것이 없으며
지붕은 위아래층 모두 겹처마로 되어 있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동대문은 보물로 지정되고 남대문이 국보로 지정된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출입문으로 대문(大門) 4개와 소문(小門) 4개가  세워졌다.
대문으로 동쪽은 흥인지문(興人之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숙청문(肅淸門)을 두었으며, 소문으로는 동북쪽에 혜화문(惠化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수구문(水口門),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을 두었다.

  이러한 많은 문 중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동대문과 남대문뿐이다.
특히 남대문은 1395년에 세워졌고, 동대문은 1396년에 완성되어
남대문이 동대문보다 1년 먼저 앞섰다. 또 한양을 둘러싼 동·서·남·북 대문 가운데에서도
남대문은 정문(正門)으로서 동대문보다 그 중요성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숭례문이라고 쓴 편액의 필자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에는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문의 편액이 가로쓰임인데 반해 숭례문이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은
숭례의 두 글자가 불꽃(炎)을 의미하여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화산(火山)에 대하여
화기를 누르기 위함이라는 설과 숭례문을 지을 당시 문밖 좌측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는 남대문이 정남을 향하고 있으므로 이위화<離爲火>라 해서 화기를 띠고 있으므로
그것을 누르기 위하여 문밖에 연못을 파고 문명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

사적 제154호,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1574년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體仁廟),
화합·토론 등 서원 내의 여러 행사 때 사용하는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실(祭器室),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학문을 닦는 곳인
민구재(敏求齋)·은수재(誾修齋),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
이언적의 신도비(神道碑)를 모신 신도비각(神道碑閣), 내사전적(內賜典籍)과
이언적의 문집 및 판본을 보관하던 경각(經閣)·판각(板閣) 등이 있다.

구인당의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의 편액(扁額)은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이언적의 수필고본이 보물 제586호로,
김부식(金富軾) 원저 〈삼국사기〉 완본 9책이 보물 제525호로,
정덕계유사마방목 正德癸酉司馬榜目〉이 보물 제524호로,
해동명적 海東名蹟〉 2책이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언적이 퇴거하여 수도(修道)하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는데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숙정문'(肅靖門)




서울의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이 일반에 공개된다.
문화재청은 그 동안 보안상의 이유로 폐쇄돼 있던 숙정문을 내년 4월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숙정문(혹은 숙청문<肅淸門>)은 사적 제10호인 서울성곽 중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북대문으로
청와대 뒤쪽 북한산 동쪽 산마루의 성북구 성북동 계곡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
이번에 개방되는 구간은 숙정문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약 0.5km의 성곽과
숙정문에서 삼청터널 북편까지의 진입로 약 0.6km 구간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6년 서울의 도성을 축조할 때 정남에 숭례문(남대문),
정북에 숙정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동대문), 정서에 돈의문을 세웠다.

그러나 숙정문은 건립된 지 18년 뒤인 태종 13년(1413년)에 풍수지리학자 최양 선 (崔楊善)이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청문을 통행하는 것 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이 두 문을 폐쇄했다.

그 후 1504년(연산군 10년)에 조정은 숙정문을 동쪽으로 옮겨 지었는데,
그 때 는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것을,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肅靖門)이란 편액을 걸었다.

그 동안 숙정문은 군부대 바깥 쪽에 있어 보안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 제된 채 잠겨 있었다.
노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유홍준 문화재청장, 조연환 산림청장과 함께 북악산을 등반하면서
숙정문 일대를 일반에 개방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던 것.

이에 따라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국방부,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은 현지 답사 등을 통해
숙정문 개방 세부방안을 협의해 왔으며 군 보안 등을 고려해 개방안을 확정했다.

이로써 1968년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인 '1.21 사태' 이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일반인의 발길이 차단돼 있던 숙정문이 37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문화재청은 내년 4월 개방을 위해 관람을 위한 탐방로 정비, 주차장 설치 등 정비사업과
주변 식생에 대한 조사 등을 실시하고 개방의 구체적인 운영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일제가 무너뜨린 돈의문 등의 성문과 성벽 복원을 추진, 복합문화재인 '사적 및 명승'으로 승격지정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역사도시'(Historical City)로 등록하는 것도 함께 추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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