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현대건축

鶴山 徐 仁 2006. 7. 25. 16:52
    
 진주문산성당.jpg (156.8 KB)
 진주 문산성당


진주시에서 차로 15~20분 거리에 있는 문산읍 소문리,
성당이 자리잡은 터는 조선시대 감찰방이 있던 곳이다.

이 성당은 진주지역 최초의 성당이면서 한식과 서양식 성당이 함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지난해  경남등록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다.

진주지역 신앙의 못자리인 문산성당은 마산교구에서 완월동본당(1900년 설립)에 이어
두번째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진주지역에는 교우촌이 성립돼 있었다.

타케 신부가 1899년 처음 진주본당을 설립했을 때 24개 공소 가운데 가장 신자들이 많았던 곳이 소촌공소이다.
이 공소가 1905년 5월 '소촌본당'으로 승격됐는데 현재 문산본당의 전신이다.
초대 주임 줄리앙 신부가 1907년 소문리에 감찰방이 있던 부지 2400여평을 매입했고,
이 터가 지금 성당 자리이다.

본당은 1923년 기와집 성당을 신축했다. 신자들이 늘어나 1937년 서양식 성당을 건립하고,
기와집 성당은 유치원 강당으로 이용했다. 현재 회합실로 사용하는 이 기와집 성당은
80년이 흘렀지만 당시 기와와 나무기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루르드 성모성지를 그대로 본따 만든  성모동굴 벽에는 설립연도인 '1932'가 새겨져 있다.
흐릿한 글씨가 세월의 흐름을 말해준다.  

성모동굴 이후 건립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성당은 건립 당시 1만9000원을 들여
건물 기둥과 벽체 모두를 시멘트 콘크리트로 건축한 서양식 건물.

높이 솟은 십자가 아래 종각의 종은 일제의 시련을 극복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일제가 교회 종까지 공출을 강요했을 때였다. 당시 주임신부는 종을 내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종각에 있던 종을 밤에 몰래 철거, 성모동굴 뒤 언덕에 깊숙이 묻고는 공소에 있던 무쇠종을 대신 헌납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땅속 깊이 잠든 종을 깨워 제자리에 매달 수 있었고, 마을 주민 전체가 함께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1970년대까지 삼종을 쳤으나 지금은 본당신자 선종과 장례미사를 알릴 때만 종을 친다.
등 100주년 준비에 착수한 이창섭 주임 신부는 "100주년은 단순히 과거를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 행사를 통해 우리 공동체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야 한다"면서 "본당사목회 임원 몇몇이 아닌 본당 신자 전체가 다같이 준비하고 참여하는 100주년이 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등록문화재 제35호
  
등 록 일 2002.05.31

소 재 지 경남  진주시  문산읍 소문리 58-1 외 5필지

소 유 자 재단법인 마산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관 리 자 진주시장

ᄋ 본당 조적조, 구 본당 한식와조로 한식 및 양식의 신구 본당이 함께 공존
    우리나라 성당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잘 알 수 있음  


통영 청년단회관, 함양 임업시험장, 남제주 강병대 교회




구 통영청년단 회관 (등록문화재 제36호)

경남  통영시  문화동 236

통영지역의 애국자 및 선각자들이 민족의식 고취와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한 역사적인 장소이며,
과거의 수리에 의해 내부는 다소 변형되었으나 외형은 원형보존이 되어 있다.  



함양 구 임업시험장 하동.함양지장(등록문화재 제37호 )

경남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74

일제 강점기 때 쿄토대학의 연습림을 관리하던 사무소로 정면·측면이 5칸 규모인 일식목조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서양건축과의 접목을 시도한 보기 드문 특징이 보이며, 현재 산림정보관으로 활용.  


남제주 강병대 교회(등록문화재 제38호 )

제주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3846

한국전쟁 이후 제주도 모슬포에 훈련장병의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군공병대에 의해 건설된 교회건축이며
제주도산 현무암을 건축재료로 사용한 것이 특징적.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



2002.05.31일 등록된 국방부 소유의 문화재로 등록문화재 제39호로 지정
제주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1489, 1542 에 위치

태평양전쟁 시 일본공군의 출격기지로 다량의 군사 시설물이 집중되어 있고
주변에는 활주로의 흔적도 일부 남아 있으며, 특히 총20개소의 격납고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하여 일본군이 도민을 동원하여 건설한
비행장, 관제탑, 대공포진지, 격납고 등이 보전되어 있는 곳이다.
비행장, 관제탑, 대공포진지, 격납고 등을 견학할 수 있으며, 인근 4.3유적지 및 송악산
일본군 해안절벽 진지동굴과 함께 일본군 전쟁유적 및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현대사의 유적을 체험할 수 있다.

팻말은 이 구조물의 정체를 비행기 격납고라고 설명한다. 좌우 넓이는 15미터쯤 되고 높이는 5미터 가량되며,
앞뒤 길이는 10미터쯤 된다. 한 대의 소형 비행기가 몸체를 숨길 수 있는 최소의 공간이다.
격납고 머리 위에는 잡풀이 자라고 있어 위에서 보면 밭처럼 보일 것이다.

들판에 왜 격납고가 있을까. 밭일 하던 농부가 “여기가 일제시대 비행장이었다”고 알려준다.
원래 농토였는데 일본군이 강제로 수용해서 비행장으로 만들었고,해방 후 다시 농토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들판의 이름은 일제시대 이후로 ‘알뜨르 비행장’으로 불린다. 들판 중간에 무덤군처럼 자리한 격납고는
현재 농산물 저장고나 농기구 보관소,쓰레기 야적장 등으로 쓰이고 있지만 과거에 이 지역이
비행장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초병이 근무하던 초소,폭격을 맞아 부서진 탄약고들도 남아있다.

전체 면적 62만평에 달하는 알뜨르 비행장은 1930년대 초 20만평 규모의 비행 훈련장으로 조성됐다.
이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태평양전쟁 등을 거치며 훈련장뿐만 아니라 중국 출격기지의 역할도 맡게 됐다.
특히 일제 말기인 1945년 들어서는 일본 본토를 공습하러 오는 미군 전투기에 맞서는 최후 방어기지였다.

제주도는 전쟁의 상처가 깊은 섬이다. 일제 말기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숫자는 7만8000여명.
당시 제주도민 숫자가 25만명 가량이었다고 하니 섬 전체가 일본군 수중에 장악돼 있었던 셈.
패망 직전의 일본은 제주도를 근거지로 삼아 반격을 노렸다.
제주도의 땅과 사람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는 일제에 볼모로 잡힐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모두 강제로 노역에 동원돼 군인들 감시 아래 비행장을 닦고 동굴진지를 만들었다.
알뜨르 비행장이 기대고 있는 송악산에는 십여개의 동굴이 뚫려 있다.
이렇게 구멍 뚫린 산이 제주도에 수십 개나 된다고 한다.
탐라대와 제주도동굴연구소의 합동조사에 따르면 제주도 내에는 모두 113개소의 진지 및 인공동굴이 구축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번동 창녕위궁재사




서울시 강북구 번동 93에 소재해 있다.

높은 장대석 기단위에 세워진 한국 전통건축이다.
일본의 남작작위를 거절한 김석진이 순국자결한 역사적 장소로 남아있다.  

창녕위궁재사는 조선조 제23대 순조의 둘째 따님 복온공주와
부마 김병주 선생의 재사(齎舍)이다.
강북구 관내 드림랜드 입구에 위치한 이 재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와즙 건물로 우측의 사랑채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난 신경진의 별장이었으며,
복온공주의 후손 김석진 선생이 한일합방 때 울분을 참지 못하여서 순국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건물 오른쪽 사랑채는 신경진(1575~1642)의 별장으로 지어져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고가이고 좌측재사는 1800년대에 건축되었으며,
정면 안채는 해방 후 개축되었으나, 6.25전쟁시 폭격으로 재건축된 건물로
역사적 사실 및 건축양식 등이 인정되어 2002.09.13일 등록문화재 40호로 지정되었다.


김석진 [金奭鎭, 1847.1.2~1910.9.8]   조선 후기의 문신, 義烈士

본관 안동(安東), 자 경소(景召), 호 오천(梧泉)이다.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태어났다.
1860년(철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을 지내고
장령(掌令)을 거쳐 사성(司成)·사간(司諫) 등 청요직(淸要職)에 있었다.
한성부(漢城府)의 좌윤 ·우윤을 지냈으며, 형조판서(刑曹判書)·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통어사(統禦使) 등을 지냈다.

1896년(고종 33) 특진관(特進官)이 되었으며, 1901년(광무 5)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항의 상소를 하여 조약에 찬성 날인한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주장하였으며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경진    1575(선조 8)~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 자는 군수(君受). 아버지는 도순변사(都巡邊使) 립(砬)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세운 공으로 선전관이 되었고, 오위도총부도사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했다.
그뒤 태안군수·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가 되었는데, 왜사(倭使)의 접대를 거부하여 체임되었다가
다시 갑산부사·경원부사·벽동군수 등을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고 대북파가 득세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2년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있으면서
김유(金)·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과 반정(反正)을 모의했는데, 사전에 누설되어
인조반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다. 반정 성공 후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웠다 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왕의 특명으로 공조참의·병조참의를 거쳐, 병조참판이 되어 훈련·호위·포도의 3대장을 겸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왕을 호종했는데, 그뒤 반란군이 옹립하고자 한
흥안군 제를 처형함으로써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호종하여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수비하여 왕이 피신할 수 있도록 했다.
전란이 끝나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637년에는 무신으로서 우의정에 올라 훈련도감제조를 겸했다.
이듬해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좌의정이 되었다. 이때 영의정 최명길과 함께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보내어 청나라에 항복한 사실을 변명하도록 했다.
1642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병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곧 죽었다.
인조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




일제강점기에는 부산·경남 지역의 통치를 위한 중심지로,
한국전쟁시에는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된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근대건축물로서
적벽돌의 세련되고 정형화된 모양쌓기는 당시의 관청건축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는 청와대가 아닌 경무대로써 한국전쟁으로 피난기에 머물렀던 임시 수도를 말하며
서구 부민동에 있다.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는 일제강점기에는 경상남도청,
한국전쟁기에는 임시수도정부청사, 휴전협정 후에는 경상남도청,
경남도청 이전 후에는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검찰청 본관 등으로 사용된
우리나라 근대사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건물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미 군정기를 거쳐 한국전쟁으로 인해
1950년 8월 18일 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한 후 9월 28일 서울수복으로
10월 27일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1차 임시수도 시절에 본 건물의 본관은 정부청사로,
상무관은 국회의사당으로, 뒤편 경찰국은 군,경합동작전사령부로 쓰였으며
도지사 관사는 대통령관저로 사용되었다.

1951년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1.4 후퇴로 부산이 다시 임시수도가 된 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환도(8월 15일)할 때까지 1차 임시수도 때와 같이 사용되었다.

당시 정부청사는 동아대학교 에서 사들여 캠퍼스로 조성하는데
정부청사는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여 기념하기 위하여 공사중이다.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항상 무료관람을 할 수 있다.

등록문화재 제41호 2002.09.13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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