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번동 93에 소재해 있다.
높은 장대석 기단위에 세워진 한국 전통건축이다.
일본의 남작작위를 거절한 김석진이 순국자결한 역사적 장소로 남아있다.
창녕위궁재사는 조선조 제23대
순조의 둘째 따님 복온공주와 부마 김병주 선생의 재사(齎舍)이다. 강북구 관내 드림랜드 입구에 위치한 이 재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와즙 건물로 우측의 사랑채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난 신경진의 별장이었으며, 복온공주의 후손 김석진
선생이 한일합방 때 울분을 참지 못하여서 순국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건물 오른쪽 사랑채는 신경진(1575~1642)의 별장으로
지어져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고가이고 좌측재사는 1800년대에 건축되었으며, 정면 안채는 해방 후 개축되었으나, 6.25전쟁시
폭격으로 재건축된 건물로 역사적 사실 및 건축양식 등이 인정되어 2002.09.13일 등록문화재 40호로 지정되었다.
김석진 [金奭鎭, 1847.1.2~1910.9.8] 조선 후기의 문신, 義烈士
본관
안동(安東), 자 경소(景召), 호 오천(梧泉)이다.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태어났다. 1860년(철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을 지내고 장령(掌令)을 거쳐 사성(司成)·사간(司諫) 등 청요직(淸要職)에 있었다. 한성부(漢城府)의 좌윤
·우윤을 지냈으며, 형조판서(刑曹判書)·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통어사(統禦使) 등을 지냈다.
1896년(고종 33)
특진관(特進官)이 되었으며, 1901년(광무 5)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항의
상소를 하여 조약에 찬성 날인한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주장하였으며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경진 1575(선조 8)~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 자는 군수(君受). 아버지는 도순변사(都巡邊使) 립(砬)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세운 공으로 선전관이 되었고, 오위도총부도사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했다. 그뒤 태안군수·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가 되었는데, 왜사(倭使)의 접대를 거부하여 체임되었다가 다시 갑산부사·경원부사·벽동군수 등을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고 대북파가 득세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2년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있으면서
김유(金)·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과 반정(反正)을 모의했는데, 사전에 누설되어 인조반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다. 반정
성공 후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웠다 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왕의 특명으로
공조참의·병조참의를 거쳐, 병조참판이 되어 훈련·호위·포도의 3대장을 겸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왕을
호종했는데, 그뒤 반란군이 옹립하고자 한 흥안군 제를 처형함으로써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호종하여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수비하여 왕이 피신할 수 있도록 했다. 전란이 끝나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637년에는 무신으로서 우의정에 올라 훈련도감제조를 겸했다. 이듬해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좌의정이 되었다.
이때 영의정 최명길과 함께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보내어 청나라에 항복한 사실을 변명하도록 했다. 1642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병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곧 죽었다. 인조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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