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전건축

鶴山 徐 仁 2006. 7. 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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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남관.jpg (249.2 KB)
 진남관(鎭南館) 조선시대의 군용건물(軍用建物)


  
여수의는 해안선은 굴곡이 많고 앞쪽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
군사시설이나 군선(軍船)을 가려주는 유리한 지세이므로 이곳에 전라좌수영을 설치하고
이 방면의 수군을 조련, 통제하였던 곳이다.

여기에 세워진 진남관(鎭南館)은 조선시대의 군용건물로서 현존하는 단일 목조건물 중에서
그 평면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진남관의 전신인 진해루(鎭海樓)때에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곳에서 거북선을 창안하여
왜군을 격파했던 군사요새의 본부이었다.

진남관은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327의 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당초에는 여수항만이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으나 현재는 부근에 주택과 상점이 많이 들어서면서
앞을 가로 막고 있어 전망이 좋지 않게 되어 버렸다.

진남관은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32년(1599년) 3월에 군사상 필요에 의하여
좌수사겸 3도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이 건립한 것으로서 그 후 숙종42년(1716년) 9월에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1대 수사 이재민이 중건하였다.
그 후 수차에 걸쳐 보수한 바 있었고 5.16후 1966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행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종래 국보480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324호로 재지정되었다.

전면도로에서 높직한 층계를 한참 올라가면 널따란 앞마당에 이른다.
진남관은 마당 뒤쪽으로 당겨서 나지막한 석조기단 위에 자좌오향으로 앉히었다.
기단의 중앙과 좌우 및 동측 면에서 각각 석계를 놓았다.
원래는 주위에 집이 있었는데 현재는 경내 동측에 교육청건물과 서측후면에 관리인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평면은 전면 15간(54.25m), 측면 5간(13.08m), 면적 748.65m2(227평)의 큰 건물이다.
각 주간치수는 정면정간 4.65m, 제1,2협간 4m, 제3협간 3.55m, 제4협간 3.1m, 제5협간 3.65m, 제6협간 3.9m, 제7협간 2.5m로 된 좌우 대칭주간으로 되어 있다.
측면은 정간 3.5m, 제1협간 2.65m, 제2협간 2.5m씩으로 역시 좌우 대칭주간을 이루고 있다.
높이는 기단 상에서 중앙부 용마루 상단까지 13.05m이다.

진남관은 단층 팔작 기와지붕 주심포계의 조선중기양식이다.
공포는 외부2출목의 3포작이다. 기둥은 윗몸이 가늘고 밑둥이 굵은 민흘림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주두를 놓고 외부로 뻗어 나온 초공은 중간에 연화판을 조각하였고,
정면 정간의 좌우 기둥머리 및 좌우 귀기둥 머리에는 용머리를 내밀어서 초공을 받도록 하였다.
주간의 창방위에서 연화판을 조각한 화반을 하나씩 받쳐 놓았다.
처마는 4면에 부연을 단 겹처마집으로 되어 있다.

기둥은 원형주좌의 자연석 초석위에 세운 평주와 고주로 구성되어있다.
평주와 고주사이는 툇간으로 되어있고, 건물의 네 둘레를 모두 툇간으로 돌리었다.
좌우 제5협간에는 고주 안쪽에 내고 주를 두 개씩 세워서 건물의 양단부를 보강하였다.
네귀의 귀기둥은 일반 평기둥보다 훨씬 굵은 기둥을 사용하고 네귀의 추녀 끝에는 할주(硈柱, 活柱)를 세워서 건물의 귀부분을 보강하였다.
평주의 기둥머리에 창방을 짜 돌리고 주두를 얹고 공포를 짰으며 주간창방위에는 화반을 놓고 반침장혀와 주심도리를 받았다.
공포의 외부초공은 쇠서(牛舌)와 수서(垂舌)로 되고, 내부는 양봉(樑奉,보아지)으로 되어 퇴량(退樑)과 홍량(虹樑, 中尾樑)을 받았다.
가구는 고주와 고주사이에는 기둥머리에 주두를 얹고 대량을 걸고 중도리를 받쳤고, 양단은 양봉으로 받쳤다.
고주와 평주는 곧은보의 퇴량으로 연결하고 퇴량의 한쪽은 주심도리를 받았다.
외목도리는 그 출목위에 소로를 놓고 받침장혀와 함께 받았다. 대량위에 동자주를 세워 주두를 얹고 종량을 걸어 중도리를 받았다.
종량위에 파련대공을 놓고 받침장혀와 종심도리를 받았다.

건물의 양단부는 내고주가 높이 뻗어 직접 종량을 받았고, 퇴량은 한쪽을 내고 주몸에 장부를 지르고 다른 한쪽은 고주를 지나 평주 위에서 주심도리를 받았다.
또, 대량의 한쪽을 내고주 몸에 장부로 지르고 한쪽은 편주 위에서 주심도리를 받도록 한 것이 있다.
충량(衝樑)은 안쪽을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로 만들었고, 밖의 안쪽은 종심도리와 중도리에 단연을 걸고, 중도리와 외목도리에 장연을 걸어서 가구를 완성하였다.
바닥은 귀틀마루로 되어 있고 반자는 연등천장으로 되어 가구 밑을 들어내었다.

처마앙곡(추녀허리) 및 처마곡(처마안허리)은 각각 0.75m씩이다.
용마루곡은 0.15m이다.
물매는 단연1척물매, 장연5치물매이다.

진남관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되어 있다.

여수는 옛날 전라좌수영으로서 이 방면 수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국방상 중요한 고장이었다.
진남관은 임진왜란 직후에 군용건물로 지은 것으로 역대 수사(사령관)가 군무를 보던 곳이다.
그 규모가 특별나게 클 뿐 아니라 굵은 목재를 사용하여 지었으므로 가구가 견실하고 외관이 군용건물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당당한 건축물이다.
같은 군용건물로 세운 통영(충무) 세병관(洗兵館)과 함께 조선중기의 국방상 중요한 건물인 점에서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국보 304호인 진남관은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移柱)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수군들의훈련장으로 사용되었던 마당에는 이순신장군이 의인전술의 일환으로 만든 7구중
1구인 석인상(전남유형문화재33호)과 석주화대(수군들의 야간훈련시 횃불을 올려 놓던 돌기둥)이 있다.

순종 5년(1911) 여수보통공립학교를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여수중학교와 야간 상업 중학교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진남관 정면에 있는 2층 누각인 망해루는 일제시대에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 중건한 것이다.
진남관 부대시설로 유물 전시관이 있다.
주변에는 자산공원, 오동도, 돌산대교, 충민사, 만성리해수욕장 등이 있다.


해미읍성[海美邑城]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소재한 조선시대의 읍성. 
 사적 제116호.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도 덕산(德山)으로부터 충청도병마절도사영(忠淸道兵馬節度使營)이 옮겨온 곳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한 1651년(효종 2)까지 군사적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어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3,172척, 높이가 15척, 성 안에는 3개의 유물과 군창이 설치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6,630척으로 보(步)로 계산하면 2,219보가 되고 
높이는 13척, 치성(雉城)은 382첩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에 문이 있다고 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볼 때 해미읍성의 규모가 훨씬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에 이 성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의 표본으로 삼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수공사를 하는 한편, 성 안팎에 무질서하게 자리잡은 민가를 철거·이전시키고 
종합적인 보존계획을 세웠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으며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관아 터가 확인되었다.
해미읍성

위    치 :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개    요 :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읍성이란 읍을 둘러싸고 세운 평지성으로 해미읍성 외에 고창읍성, 낙안읍성 등이 유명
           하다. 
           해미읍성은 조선 성종 22년, 1491년에 완성한 석성이다. 
           둘레는 약 1.8km, 높이5m, 총 면적 6만여평의 거대한 성으로 동,남,서의 세 문루가 있다.
           최근 복원 및 정화사업을 벌여 옛 모습을 되찾아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조선말 천
           주교도들의 순교 성지로도 유명하다. 
           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 많은 신자들이 잡혀
           와 고문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박해때에는 1천여명이 이 곳에서 처형됐다고
           한다. 성내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와 나뭇가
           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서 있다. 
           바로 성문밖 도로변에는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신도들을 돌 
           위에 태질해 살해했던 자리개돌이 있어 천주교도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성벽 주위에는 탱자나무를 심어 적병을 막는데 이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체험정보  : *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
              옛 모습을 재현하기 위하여 매년 봄에 개최하는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는 다양한 프로
              그램과 함께 관광객과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체험축제로 학생들에게 교육적 효과가 
              높아 가족단위의 관광객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2004년에는 5월 1일 부터 2일 사이에 축제가 열린다.
현지교통 : 서산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 및 시내버스 수시 운행, 해미읍에서 하차
           - 시외버스 06:40-20:50까지 약 10분 간격 운행
           - 시내버스 06:25-20:00까지 약 15분 간격 운행
           - 서산 공용버스터미널 : 041-665-4808
도로안내 : 1) 서해안고속도로 - 해미IC - 해미읍 - 해미읍성
           2) 경부고속도로 천안나들목 -> 아산시 -> 21번 국도 -> 예산읍 -> 45번 국도 -> 삽교 
              -> 해미고개 -> 한서대학교 입구 -> 산수저수지 -> 해미읍성

주변명소 : 수덕사, 덕산도립공원, 가야산, 덕산온천, 개심사, 서산축협목장 벚꽃길, 천수만방조제, 간월도, 부석사, 서산마애삼존불


마곡사-불교건축 (사찰) 신라(643년 추정)




보물 - 제 801,802 호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서기 643년 신라 자장 율사가 당나라에 수학 중 태종으로부터 '국통(國統)'의 칭호를 받고
귀국하여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치 않다.

'마곡사'라고 한 것에는 2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하나는 보철 화상(寶撤和尙)이 전도득법한 후에 그 율법을 배우고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워 그 모습이 전도득법한 후에
그 율법을 배우고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워
그 모습이 흡사 '麻'와 같다는 데서 연유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산조 보조 선사가 당에 갔을 때 마곡사 보철 선사에게 수법한 인연으로
마곡사라 칭했다고도 한다.

신라 문성왕 9년(847)에 범일 국사와 헌강왕 3년(877)에 도선 국사가 각각 중수 확장하였다.
그 후 신라말부터 퇴락된 것을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크게 중창하였다.
가람 배치는 내(川)를 가운데 두고 남북구역으로 구분된다.
북쪽 구역에는 대웅보전, 대광보전, 응진전, 심검당, 대향각이 있고,
남쪽 구역에는 해탈문, 천왕문, 영산전, 흥성루, 매화당, 수선사,
그리고 조금 떨어져 명부전과 국사당이 있다.

가람의 배치구조는 다르게 해석된다.
남쪽 구역에 있는 천왕문과 해탈문은 가람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과정의 시설물로 본다.
이 두 건물이 계곡 남측에 세웠다는 것은 계곡을 경계로 속계와 불계로 구분하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남쪽 가람 지역은 특별히 대지를 돋우어 가람을 배치하였다.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새로운 대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

마곡사는 단순한 가람으로 볼 수 없고 종합사찰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마곡사는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밀교적 요소가 남아 있다.
5층석탑의 상륜부에 올려진 라마탑과 탑신부의 사면불(四面佛)조각,
그리고 흥성루 내부에 붙어 있는 '우황궁(雨花宮)'이라는 현판은
라마교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추정.  



운현궁 雲峴宮


▒ 지정번호 : 사적 제257호 
 ▒ 지정연월일 : 1977년 11월 22일 
 ▒ 시 대 : 고종 즉위년∼10년(1863∼1873), 1996년 중수 
 ▒ 규모·양식 : 2,487.5평, 단층 팔작지붕 
 ▒ 재 료 : 석조 기단, 목조 
 ▒ 소 유 자 : 서울특별시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98-50 
운현궁은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생부(生父)인 흥선군(興善君)이하응(李昰應)의 저택으로, 
고종이 탄생하여 즉위하기 전 12살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이기도 하다. 
원래 조선시대 일반 상류주택이었던 이 건물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영역이 크게 넓혀지고 건물들도 새로 더 들어서며 흥선대원군이 
10여년간 집정하며 정치를 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실제로 고종이 살았던 집은 운현궁 동북쪽 뒤에 있었는데, 
1966년 헐리고 그 자리에 중앙문화센터가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대원군이 섭정을 행하던 1863∼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노락당과 노안당은 1964년 9월, 이로당은 1870년 준공되었다. 
'운현궁' 이름은 서운관(書雲觀, 관상감의 별칭)이 있는 앞의 고개라 하여 '운현(雲峴)'이라 불렸다.
원래 운현궁은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양관(洋館), 
일본문화원, 중앙문화센터, 운현초등학교 일대까지 포함된 넓은 지역이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지금은 1996년 새로 중수하여 개방한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의 
세 건물과 부속 행랑채를 운현궁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운현궁 터는 복원하면서 대지를 동서로 크게 양분하여, 동편에는 세 건물들이 들어섰고, 
서편은 빈 마당으로 남겨 도로와 접하고 있다. 동편에 있는 세 건물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원군의 사랑채였던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그리고 별당인 이로당(二老堂) 순서로 자리잡고 있다. 
노안당 남쪽에 원래 아재당(我在堂)이 있었으나 없어졌고, 
이로당 북쪽에 있던 영로당(永老堂)도 원래 운현궁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개인 소유의 건물(김승현 가옥,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9호)로 되어 
운형궁 경역과는 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노안당은 전체적으로 정(丁)자형의 건물로 대원군이 국정을 의논하던 곳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몸채 동쪽 끝에 7칸이 덧붙었다. 몸채부는 동쪽 2칸 사랑방을 제외하고 모두 
우물마루로 되었으며, 동쪽 끝에서 남으로 돌출한 2칸은 누마루로 구성되었는데, 
영화루(迎和樓)라고 한다. 누마루의 하부에는 판장벽을 막고 홍예문을 만드는 등, 
실용적이며 장식적인 의장을 선보였다. 지붕 박공 부분 중 뒷면 두 군데에 회벽을 쌓고 
중앙에 복(福)을 상징하는 박쥐를 그려 넣은 것이 시선을 끈다. 
노안당의 '老安'은 《논어》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오는 "노인들을 편안하게 하여준다(老者安之)"에서 따왔으며, 
영화루는 대원군이 손님을 맞아 접대하던 곳이다. 
몸채는 장대석의 세벌대이고, 영화루는 장대석 두벌대로 되어있다. 
기둥은 평주, 고주 모두 사각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으며, 
쌍사모를 한 기둥을 세워 기둥머리에는 초익공을 결구하였다. 
가구(架構)는 2고주 5량이고, 뒤쪽으로 내민 부분은 1고주 5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마에는 송판으로 만든 차양(遮陽)을 달았는데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단 차양은 고전적 수법이다.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자 모양을 취하고 있으며, 정면 3칸은 앞퇴를 개방했고, 
좌협간 2칸 중에서 한 칸 부분이 개방되어 좌측 날개 부분의 통로 역할을 한다. 
좌우 각 2칸은 온돌, 중앙 3칸은 대청이다. 좌우측의 날개 부분 즉 안채의 몸채에서 직각으로 꺾여 있는 부분은 돌출부가 각 2칸이며 부엌과 창고로 쓰였다. 
노락당은 초익공 7량 건물로 사대부가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는 기법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 문양이 남아있다. 
노락당 남쪽의 남행각은 자 모양의 평면을 하여 자 모양의 평면을 한 노락당과 함께 
자 모양의 안마당을 형성하였다. 이곳은 명성황후 민씨가 삼간택을 마친 후 왕비수업을 받았던 곳이고, 고종 3년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가례가 있었던 곳이다.
별당인 이로당은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지극히 폐쇄적인 口자형 건물이다.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오로지 안채에서만 드나들 수 있었던 비밀스럽고 은밀한 건물이었다. 
이로당은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가 거처하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정방형주초(正方形柱礎)이고 
기둥은 평주, 고주 모두 사각기둥으로 약간의 민흘림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나 툇마루는 장마루이고 가구는 입구자형 평면에서 남쪽은 1고주 5량, 
서쪽과 북쪽은 1고주 3량, 동쪽은 평4량(平四樑)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인 서북쪽 모서리를 제외하고 모두 팔작지붕이다. 
정면 앞마당 서쪽으로는 석함, 동쪽으로는 요거석이 있고, 동쪽 마당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운현궁의 건물들은 격식이나 규모로 보아 궁실의 내전 건물에 가깝다. 
평면에 보이는 특징으로 각 채들의 동측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월랑(月廊)으로 연결시킨 점을 들 수 있다. 
창덕궁에서 고종이 손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경근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또 대원군 전용문인 공근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용궁향교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에 있는 조선시대 향교.

지정번호  경북유형문화재 제210호
지정연도  1985년 10월 15일
소장  경북 향교재단
소재지  경북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266
시대  조선시대
분류  향교

옛 용궁현의 교육기관으로서 조선 태조 7년(1398)에 건립되었다.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향교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옛 용궁현(龍宮縣)의 치지인 구읍에 있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이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100m 지점에 처음 세워졌다.
이 향교에서 담당한 구역은 용궁면·풍양면·지보면·개포면 일부, 문경군 영순면 일부이다.

정종 2년(1400)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중종 7년(1512)에 이곳에 복원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그 후 선조 36년(1603)에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을,
인조 14년(1636)에 세심루(洗心樓)를 새로 지었다.

1863년 7월 하순에는 명륜당만을 중수하였고, 1873년 10월에 대성전을,
그해 11월 서재를 중수하였다. 그 후 동·서재는 허물어져 없던 것을,
동재만 근대에 와서 원상복구하였다. 1893년 8월에 다시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1917년에 향교 건물 전반에 걸쳐 중수하였다. 1967년 6월에 보수하여
어느 정도의 면목을 새로이 했으나, 단청은 다시 칠하지 않았다.
1978년 8월에 국비로 대성전, 명륜당 등 건물 보수를 하였다.

건물 배치는 전형적인 전당후묘(前堂後廟)의 형식을 따라 산허리에
외삼문과 세심루·명륜당·대성전의 순으로 일직산상에 배치하였다.
주위는 담장을 두르고, 동쪽으로 ㅁ자형의 주사(廚舍)가 있다.
향교 입구에 있는 2층 누마루식의 세심루(건평 21평)는 홑처마 맞배지붕 굴도리집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이고, 동재(건평 12평)는 맞배지붕,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서재는 파괴되어 그 터만 있다.

명륜당(건평 18평)은 2중의 기단 위에 운두가 높은 초석을 놓고 세운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갈모산방을 높게 하여 처마를 과도하게 올렸다.
대성전(건평 20평)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홑처마집이다.
어칸에는 쌍여닫이 궁널띠살문을 두고 좌우 협칸에는 외여닫이 궁널띠살문을 안쪽 기둥에 붙여 달았다. 주춧돌 윗면에 지름 0.45m 내외의 원이 새겨져 있다. 향교 앞 도로변에는 하마비가 있다.

명륜당 내에는 또 여러 매의 판목이 걸려 있다. 즉 명륜당에 관한 판목으로는 명륜당수선기·강학청이 있으며,
대성전에 관한 판목으로는 대성전중수기·향교 중수기·교궁중수기 2매가 있다.
그외 태조 5월 24일 건원릉부터 효종 5월 4일 영릉까지의'국기'가 기재되어 있는 판목과
향교구토사정기·향교절목이 있어 용궁향교의 연혁을 알려 주고 있다.

이 향교에는 공문5성위(孔門五聖位)를 비롯하여 송조4현(宋朝四賢) 및 국내 18현 등
27위의 성현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예천향교보다 2위가 더 많은데 그 2위는 주돈이·정이이다.
매년 봄·가을에 석전(釋奠)를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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