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현대건축

鶴山 徐 仁 2006. 7. 26. 13:16
    
 강경_북옥감리교회.jpg (317.2 KB)
 충남 논산 북옥감리교회



유일하게 현존하는 개신교 한옥교회이며, 교회기능에 충실한 장방형 평면과 내부형태,
가구기법은 근대화에 따른 기술적 변화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선교역사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선교과정에서의 토착화 현상에 의해 초기 기독교 건축의 형태는 한옥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신부·목사가 대부분 서양인이였으므로 한옥에 불편함을 갖게 되고,
또 서양식 건물을 동경하는 일부 신도들로 인해 점차 양식(洋式) 예배당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초기 한옥교회가 대부분 소멸되거나, 개축 또는 새로이 신축되어
현존사례가 극히 드문 상황에서 강경 북옥감리교회는 그 희소적 가치가 높다
정방형 평면을 취함에 따라 건물의 조형성이 전통 적인 비례를 벗어나 있지만,
기능에 따른 평면 구성과 상부의 가구구조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 나타난
한옥교회의 건축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가구는 9량 구조로서 고주에 결구되어 있는 대들보 위에 중보가 얹히고,
그 상부에 종보가 얹히는 구조이다. 서까래는 추녀에 뿌리를 결구시킨
말굽서까래 배열을 하고 있어 일제 시대 한옥의 절충적인 배열기법을 보여주며,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또한, 내부의 벽돌조 위의 회반죽 마감과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킨 연등 천장은
단순한 목조건축의 구조미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목재의 치목 수법과 가구기법은
전통적 기법에서 근대화에 따른 기술적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지붕이 심하게 부식돼대대적인 지붕교체작업이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설 계 : 이인법 목사
건물용도 : 종교시설
대지면적 : 90 평/건축면적 : 36 평/ 규 모 : 지상1층/ 주요구조 : 목조 / 준공연도 : 1923년

근대문화유산 42호로 2002.09.13 등록.


목포 구 청년회관


등록문화재 제43호   등 록 일 2002.09.13  소 재 지 전라남도 목포시 남교동 80-1

현재 임마누엘 목포제일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외형적인 면에서 볼때
석조 단층의 단순한 구조이며 표면 또한 거칠게 마감되어 크게 눈에 뜨이는 면이 없다.
이 건물의 가치는 외형적인 면보다 역사적인 면과 목포의 정신적인 면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 들어서 전국적으로 지역의 청년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목포에서는 5월9일 목포청년회가 시작되어 체계적인 청년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중심이 시작된 곳이다. 1927년 신간회의 목포지부 창립과
각종 쟁의의 안식처로 활용되고 민족운동의 보금자리로 운용되었다.
목포인들의 모금운동을 통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주고있다.

현 신안군청에서 우측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왼편으로 난 골목길 사이로
임마누엘 제일교회라고 하는 작은 교회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이 바로 옛 목포청년회관(목포시 남교동 80-1) 건물이다.
예전에 원진극장건물이 있었던 곳 바로 옆인데, 당시 1920년대 목포청년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목포청년회에서 숙원사업으로 1924년 4월부터 회관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통해
남교동 땅 1백평을 대지로 사들였고, 건평 57평의 석조건물을 9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1925년 3월 낙성식을 가졌는데 다행히도 이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시기 목포청년회관은 일개인의 집이 아닌 목포청년들의 지덕함양과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192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목포지부 창립식이 1927년에 이곳 청년회관에서 이루어졌으며,
당시 각종 소작쟁의 운동을 해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피난처이자 안식처로 활용되는 등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보금자리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목포청년회는 주로 계몽적인 강연회를 열었고, 노동야학회를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활동사진대라는 것을 조직하여 동경고학생들을 돕기 위한 전국 각지 순회를 하기도 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독청년회, 천도교청년회, 목포수양회, 목포여자수양회 등이 결성되었으며,
이들 청년단체들도 주로 강연회, 토론회, 운동회 등을 통하여 계몽활동을 펼쳤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청년운동에 대한 반성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1924년 9월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무산청년회(無産靑年會)가 목포에도 조직되었는데,
기존의 청년회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성격의 청년회가 또 하나 조직된 것으로
그 주요구성원이 강석봉, 배치문 등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진보적 인물들이
적극 참여 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부터 목포의 청년운동은 중산청년층의 목포청년회와
신진청년층의 무산청년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양자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양립해서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1927년부터는 각계 각층을 통일한 대중적 청년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하에
단일 단체인 목포청년동맹이 결성되면서 목포청년운동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이러한 청년운동의 사랑방 역할을 목포청년회관 건물이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청년연맹이 해체되고, 사회운동의 침체적 시기를 맞아
이 청년회관은 주인 잃은 건물로 한동안 방치되게 된다.
소설가 박화성 선생은 헐어진 청년회관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해서
당시의 안타까운 상황을 묘사하기도 했다.




나주 노안 천주교회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 양천리 750번지에 위치한 노안 성당은
2002.09.13 등록 문화재 44호로 지정되었다.

1926년 박재수 신부가 부임하여 까다르 신부가 신축했던 벽돌 사제관을
1927년에 확장 신축하여 세운 서구식 성당으로, 외관은 적벽돌로 마감되었으나
정면 중앙의 탑신부 1층은 거친 화강석쌓기로 마감된다.  

이 교회는 나주지역 최초의 천주교회로 단층의 붉은벽돌의 단층건물이다.
1894년 서울에서 피신온 정락(요안)이 나산에서 약방을 운영하면서
노안면 양천리 이민숙(바오로), 이진서(토마스), 이학서(바오로)에게 전도하여
1900년 무안에서 요양중이던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계량공소가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 1903년 목포 산정동본당의 두뇌(한국명 전학준)신부가 노안면을 왕래하면서
신도수가 1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런데 1900년 나주부근을 중심으로 한 인근에
본당을 설립하여 이주할 것을 결심하고 드애신부와 뚜르뇌 신부와 현지를 답사하고
여러가지 조건이 맞는 노안 용산리 남산마을에 성당터를 잡았다.
그리하여 1906년 8월 남산에 1.5헥타르 땅을 350냥에 매입하고
1907년 6월 뚜르뇌 신부의 주거지를 사내에서 남산으로 옮기었다.

그러나 토지 전소유주가 묘를 이장할려고 땅을 파보니 시신이 그대로 있어
교회와의 매매계약을 파기하였다. 또한 마을사람들도 크게 반대하여
할 수 없이 다시 계량으로 계획을 바꾸어 "계량천주교회"하는 본당을 건립하였다.
까다르 신부가 1909년 5월 부임하여 1910년 1월 6일자 서울의 뮈텔주교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31명의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까다르 신부는
성당부지 3,000평을 매입하여 십자형의 40평 규모의 초가성당을 마련하고
손수 벽돌을 찍어 2층 양옥의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군입대하자 5년간 목포 산정동본당의 도움을 받았다.

1926년 박재수 신부가 부임하여 까다르 신부가 신축했던 벽돌 사제관을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 신축하여 1927년 준공하였다.
이후 1936년 김창현 신부는 논밭 수천평을 매입하여 학교 건물 2동을 건축하여
"신성학술강습원"이라는 4녀제 보통학교를 신설 수백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 학교는 해방이후 노안초등학교의 설립 등으로 자연스럽게 폐교되었다.

1957년에는 밀려드는 신도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십자모양으로 성당을 확장 증축하고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또한 성모중학원을 설립하여 중등교육을 실시했으며
1961년 "성 골롬반 중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아 노안 문평 광산 삼도 등지의 학생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었다. 이 학교는 1984년 2월 29일 폐교되었다.


연천역 급수탑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차탄2리에 소재
등록문화재 제45호. 등 록 일 2003.01.28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로 원통형과 상자형으로 된 2기의 급수탑으로,
상자형 급수탑은 콘크리트조로 외관에 줄눈을 그려 조적조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으며,
외형은 기단, 몸통, 처마의 기본요소를 구성하고 있다.  

높이 20m, 용량 100m/t인 이 취수탑은 1914년 경원선 개통과 함께 일제가 축조하였다.
6.25 때 무수한 포탄을 맞고도 사용에 이상이 없어 67년까지 운행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이 지금까지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취수탑의 역활은 기관차에 뜨거운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저장하는 장치로
도착한 증기 기관차에 이미 데워 놓은 공급하면 석탄사용량도 줄일 수 있고
냉수를 채워 서는 속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취수탑 옆 건물은 항상 뜨거운 물이 공급되어 근처의 주민들이 목욕을 하는데 사용했다한다.
디젤기관차의 운행으로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도계역 급수탑과 추풍령역 급수탑



도계역 급수탑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전두리 123

1940년에 설치된 강원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철도차량 급수탑으로서 당시의 전형적인 급수탑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높이가 8m로 용량이 26톤으로 다른 급수탑에 비해 상당히 낮은 것은
철로변 보다   4m가 높은곳에 설치하여 지형을 고려하여
적정 수압을 얻어 낼 수  있도록 그 높이를 조절한 것이 독특하다.
등록문화재 제46호로 2003.01.28 지정.

추풍령역 급수탑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 336-1 )

경부선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표준화된 급수탑의 유형이 정해지기 이전의
1939년 건축된 과도기적 급수탑으로 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계실 안에 당시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워싱턴 펌프와
급수에 필요한 물을 끌어들인 연못 및 배관시설 등
급수시설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상태이며,
6.25동란시 총탄흔적이 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2003.01.28일 등록문화재 제47호로 지정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와 관련이 있다.
1899년 경인선의 개통과 함께 증기기관차가 운행하면서
증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기관차에 더운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설치했다.

보통 3개의 역을 사이에 두고 설치되었다.
오늘날의 주유소와 같이 증기로 없어진 물보충의 역할을 이 급수탑이 맡았다.
현재 약, 19개의 급수탑이 남아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歷史. 文化參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해군일기> 해제  (0) 2006.07.26
문화의 힘과 한류(韓流) ②  (0) 2006.07.26
고전건축  (0) 2006.07.26
반출문화재 국민 힘으로 되찾다  (0) 2006.07.26
현대건축  (0) 2006.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