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우리나라 畵壇

[스크랩] 박수근_아이보는 소녀

鶴山 徐 仁 2006. 7. 15. 10:02
박수근, 1953,  하드보드에 유채, 32.0 × 18.0cm
배경을 생략하고 대상을 평면화하는 작업에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획득했으며, 이 작품처럼 초기작에서는 선묘가 굵고 강했다
 


박수근, 1953, 하드보드에 유채, 32.0 × 18.0cm
단발머리를 한 이 소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차라리 화강암에 새겨진 이 시대의 마애불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유홍준)
 
[박수근 유화] 5억원에 낙찰… 경매최고가  
서양화가 박수근(1914~1965)의 그림이 한국 현대미술품 경매 사상 처음으로 5억원을 넘는 낙찰가를 기록하며 또 다시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박수근 유화작품 ‘아이 업은 소녀’( 사진 ·17×38㎝)는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옥션하우스에서 열린 ㈜서울경매 주최 경매에서 한 전화응찰자에게 5억 500만원에 팔렸다. 지금까지 최고 낙찰가 기록은 지난 3월 28일 역시 박수근의 유화 ‘초가집(30×15㎝)’이 세운 4억 7500만원이었다. 지난 98년 12월 ㈜서울옥션이 한국 현대미술품 경매를 시작한 이래 5억원 이상에 팔린 작품은 ‘아이 업은 소녀’가 처음이다.
모두 7점이 출품된 박수근의 작품은 그밖에도 유화 ‘민화―꽃’이 2억원, 유화 ‘농촌풍경’이 1억3000만원에 팔리는 등 판화·스케치까지 6점이 낙찰됐다.
( 金翰秀기자 hansu@chosun.com )

조선일보
(2002.05.02)
 
 
 
 
 
 
 
 
 
[문화관광부 선정] 이달의 文化人物 - 朴壽根  (2002.05.07)

한국의 「밀레」가 된 화가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 hwhan@chosun.com )

문화관광부는 서양화가 朴壽根(박수근ㆍ1914~1965년)을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농악놀이, 초가집, 빨래하는 아낙네 등 일상의 풍경을 정감 있게 그린 朴壽根은 가장 서민적인 한국인像을 화폭에 정립한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朴壽根은 1914년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井林里(정림리)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열두 살 때 밀레의 「晩鐘(만종)」을 보고 감명을 받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朴壽根은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학력도 양구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다.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한 朴壽根은 1932년 18세 때 수채화 「봄이 오다」를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봄이 오다」는 어느 기와집 앞 마당에서 여인이 빨래를 널고 있는 소박한 풍경을 그린 것이다. 이런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에 대한 풍경은 이후의 그의 그림에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26세 되던 해인 1940년 결혼을 한 朴壽根은 곧 평남도청 사회과 서기로 취직이 되어 부인과 함께 생활터전을 평양으로 옮겼다. 평양에 있을 때 朴壽根은 그곳의 화가들과 洋量同人(양화동인) 그룹을 만들어 동인전을 가졌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월남한 朴壽根은 미군부대 초상화부에 근무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전쟁 후 朴壽根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여 1953 년에는 제2회 國展(국전)에서 「집」이 특선되고 「노상에서」가 입선되었다. 그는 1959년에는 國展 추천작가로 피선되었고, 1962년에는 제11회 國展 서양화부 심사위원이 되었다.
朴壽根은 그림이 팔리면 우선 쌀부터 사 놓을 정도로 생활 형편이 좋지 않았다. 개인적 불행도 겹쳐 3남2녀 중 셋째 아들은 6·25 전쟁 중에 잃었고, 둘째 딸도 1967년 病死(병사)했다. 그 자신도 他界(타계)하기 1년 전에는 백내장으로 왼쪽 눈을 실명하였다.
물감을 덧칠하는 기법으로 그린 朴壽根의 그림은 마치 風化(풍화)된 화강암 표면에 이미지를 그려 놓은 듯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하고 묵직한 깊이를 느끼게 한다. 朴壽根은 『우리의 옛 石物(석물)이나 석탑에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했는데, 그는 石物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자신의 그림 속에서 표현하려고 했다. 이런 그의 그림은 그의 살아 생전에는 큰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인간의 善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말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정의한 朴壽根은 1965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산막골일기[32] 박수근미술관을 다녀와서  
초가을로 접어들며 여름과 가을을 이어주듯 비가 지루하게 계속
내리고 있다, 거의 한 달을 넘어서는 장마이니 이런 경우도 처음아닌가.
햇볕을 본다는 것이 금쪽처럼 귀한 일이 되어서 고추를 따는 철에
말리기 위한 애먹음이 옆에서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이다.

지난 8울 18일에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서 '강원의 자연, 그리고
삶'이란 주제로 미술관이 봄에 개관한 이래 첫 기획전을 개막했다,
전시는 9월 17일까지 이어진다. 강원도 도내에서 활동하는 10명의
작가가 선정되었고 거기에 나도 끼어있어 40호 크기의 작품 2점을
출품했다. [산막골의 봄]과 [청평송]이다, 한 점은 산막골 배터쪽의
벼랑길을 소재로 한 산수화이고 또 한 점은 산막골에 있는 소나무를
소재로 한 것이다.

개막된지 열흘이 넘어서야 제자와 같이 가기로 약속을 했고 5킬로가
되는 임도를 걸어나가 부귀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차가 부실해 비포장
산길을 들어오기가 어려워서다.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나서려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고 가기엔 빗발이
거쎄서 어떻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이장님 댁으로 가서 태워다 달라고
부탁을 드리니 쾌히 응락을 하셨다.
제자는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어 바로 옮겨타고 양구로 출발했다.
비 내리는 길, 소양호를 끼고 달리는데 호수는 그동안 내린 비로 풍만한
몸집이 되어었고 운무가 피어오르는 산들은 한 폭의 산수화로 살아
움직였다. 온통 굽이굽이 감돌아 가는 길은 직선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구절양장의 연속이다. 몇군데 터널을 뚫고 있으니
그것이 개통되면 드라이브 코스로나 이용될 길일거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이야기 나누며, 수려한 풍관을 감상하면서 가다보니 어느새 양구였고 박수근미술관에 닿았다.

군립미술관으론 국내에 유일하다는 박수근미술관은 화강석으로 외부를
마감한 특이한 건축물이다. 무슨 성[城]같기도 하고 요새같기도 하며
개성이 강하게 지어졌다. 군세는 약하고 최전방이 인접한 곳에 미술관이
세워졌다는건 이례적인 것이다. 읍내 비봉공원에 박수근동상이 제믹된
것은 십여년이 되어간다, 화가의 동상이 세워진 것도 국내를 통틀어
희소한 예에 속하는 일이다,

박화백의 생가터에 세워진 미술관, 이 생가터를 최초로 공식 확인한
사람이기도 해서 감회가 남다름을 누가 알것이냐. 87년 월간 태백이란
잡지가 기획기사를 준비하며 필자를 잘아는 시인에게 의뢰했고 평소에
박수근화백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시인이 도움을
요청해 취재원을 알선하고 안내를 맡아서 동행하였기에 생가터와
박수근나무를 확인하고 나무는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게 만들었으니
그 연유가 박화백의 은사님인 오득영선생과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무렵 양구문화원에서 발간한 [양구문화] 창간호에 <박수근의 생애와
예술>이란 글을 원고청탁을 받아 기고하기도 했었다. 내용 중에 생가를
복원하고 나무를 잘 보호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박수근미술관의 첫 기획전에 작품을 걸었으니 그 기쁨을 뭐라고
표현할 것인가. 비 내리는 정서를 미술관 안에서도 느낄 수 있어 감상
하는 분위기는 그윽하고 오붓했다.
박화백의 창신동시절의 사진들을 보느라면 작은 마루에 작품들이 쌓여
있음을 본다, 한 평이나 될까 그 마루가 곧 화실이기도 했었다. 지금은
호당 억대를 호가하는 작품들이 천연스럽게 쌓여있는 모습이 감동을
준다. 얼마나 가난한 화가였던가 스케치 북이며 노트들을 보면 빈곤이
묻어나온다.
유품들을 보며 내 나태해져 가는 마음을 다 잡게 되는 채찍질을 하게
만든다. 박화백은 삶에 성실했고 자신의 예술에 성실했던 사람이다
정직과 성실로 만든 그림이 감동을 주는 예를 박화백에게서 보게된다.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거기엔 수많은 손길이 가야하는 인고가 담겨
있기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서양화가이면서 가장 한국
적인 미의 세계를 구현한 바탕을 알 수 있음이다.

돌아나오며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
인근에서 두부전골로 점심을 먹고 다시 빗길을 달려왔다.
부귀리에서 헤어져 산길을 걷는 마음은 호젓함과 계곡의 물소리에
젓어들 수 있었다. 비구름이 승호대 일대를 장관으로 만들어 한동안
망연히 바라봐야 했다. 저 구름 속에 박수근화백의 소박한 미소가
떠올랐던건 긴 여운이 깊이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 박수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