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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동료들은 다들 우리나라가 16강
가는 거 아니냐고 해요. 그 친구들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비장한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나오는 각오 같았다. 박지성의 입에서 월드컵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은 지난 3월 앙골라 전 친선 경기로 한국에 다녀온 뒤부터였다.
칼링컵 우승 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왕복 20시간 넘게 비행하며 바로 경기에 나서느라 정말 말 그대로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평소 안 하던
“힘들다”를 인사로 내뱉은 터라, 경기 뒤 인터뷰에서도 말을 아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말 예상 밖이었다. 사실 박지성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다. 특히나 ‘인터뷰’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선 더 규격화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본을 거쳐 유럽에 온 후 수많은
인터뷰를 당하다 보니, ‘모범 답안’ 형식에 거의 부합하는 답변만 한다. “아, 좀 더 자세히요.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이런 요구가 쏟아져도
어느 한계선 이상을 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그가 스스로 입을 연 것은 의외였다.
국내 네티즌들에게 “박지성이 왕따당하는 것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나돈 적이 있다. 한국의 박지성 팬으로부터 걱정 어린 메일을 받고 해명하는 답 메일을 보낸 적도 있다. 팀 동료들
사이에서 결코 박지성은 외톨이가 아니다. 네덜란드 출신 루드 반 니스텔루이와 절친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프랑스 출신 루이 사아와 옆집에
살면서 친하게 지낸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래도 한국과 프랑스가 같은 조에 편성돼 있으니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월드컵에서 같은 조가 된 뒤 사아뿐 아니라 다른 프랑스 친구들과도 더 친해진 느낌이에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다른 맨유 동료들도 한국과
프랑스가 함께 16강에 오를 것이라고 응원한단다. 지나가는 말로 슬쩍 그 얘기를 해 주는데, 무표정한 박지성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도 적잖게
월드컵에 대해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2005년 9월 영국 런던으로 건너온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경기가 끝날 때마다
박지성과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맨유’라는 팀은 정말 간단치 않았다. 지금은 문턱이 많이 낮아졌지만 처음엔 선수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정말 기계적으로 선수들의 스케줄을 관리하는데, 스스로 “저 고지식해요”라고 말하는 박지성답게 모든 일을 구단에 철저히 맡긴다.
다소 톡 쏘는 말투 때문인지, 사람들은 간혹 박지성을 오해하기도 한다. 건방지다는 둥 변했다는 둥 불만을 쏟아 붓는다. 그런데
계속 지켜보면 원래 말을 아끼는 조용한 성격이라 그렇지 거만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터뷰 중 가끔 따분한 표정을 짓거나, 손바닥의 굳은살을
벗기는 등 산만한 태도를 보일 때도 있다.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때는 증상이 더 심해진다. 참을성 없어 보이는 이런 태도는 사실 기억력이 워낙
좋기 때문에 빚어진다. 한 기자는 얼마 전 박지성과 인터뷰를 하다가 얼굴이 새빨개졌다고 한다. 박지성이 “어, 그거 다섯 달 전에 하신
질문이잖아요”라고 되물었기 때문이다. 기자 본인조차 잊어버린 것을 수많은 기자들을 상대하는 그가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을까?
인터뷰를 하다 그의 ‘카운터펀치’를 맞은 적도 있다. 박지성의 영어실력에 대한 우려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올 때였다. “감독님과
평소 어떤 이야기를 하나요? 아까 라커룸에서 무슨 얘길 하셨죠? 작전 지시는요? 감독님 말 다 알아듣나요?”라는 질문을 쏜살같이 쏟아 냈다.
그때 박지성의 답은 “그럼 기자님은 감독님 말씀 다 알아들으세요?”였다. 하하. 정말 입에 자물쇠를 잠그게 하는 답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발음은 잉글랜드 사람들도 알아듣기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다.
처음 영국 땅을 밟았을 때만 해도 ‘박지성에
대해 영국인들이 보이는 관심은 일종의 ‘호기심’ 정도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박지성에 대해 물으면 “교체 선수 정도 하면 잘되는 거
아니에요?”라는 식의 다소 냉소적인 반응이 많았다. 기자석에서도 영국 기자들의 냉담한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12월 말 칼링컵에서 그의
잉글랜드 데뷔 후 첫 골이 터지고, 점차 주전 자리를 꿰차 가자 정말 대접이 달라졌다.
“지쑹 팍” 외치는 영국 팬들
특히 그 반응은 팬들로부터 느낄 수 있다. 경기 뒤 주차장엔 항상 팬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데 다들 사인 한 번 받으려고 목
빼고 기다리고 있는 무리들이다. 그 속에서 “지쑹~ 팍~! 지~지~팍~팍”을 외치는 꼬마들을 보면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박지성이 공을 세차게 몰고 가면 “와~~~” 하는 함성이 귀를 찌른다. 7만여 관중이 한꺼번에 쏟아 내는 목소리는 현장이 아니라면 정말 제대로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최고조는 최근의 아스날전 때였다. 전통의 라이벌로 꼽히는 아스날과의 홈경기서 팀의 두 번째 골을 뽑아내며 자신의 리그
1호 골을 선사한 뒤 얼마되지 않아 교체됐을 때, 관중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이런 기립박수가 나오는 것은 시즌을 통틀어
손꼽을 정도로 귀하다.
그는 어린 나이지만 객지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참 어른스럽다. ‘모범 답안’으로 이야기하긴 하는데, 곰곰
씹어 보면 절대 단순하지 않다. 요즘 들어 그가 가장 강조하는 단어는 ‘성장’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말로도 ‘성장’이 나왔다. 얼마 전 맨체스터
카링턴 트레이닝 구장에서도 그는 그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번 월드컵은 제가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평가받는 무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여러 팀을 거치고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겨루면서 스스로 많이 성장했다고 느낍니다. 지금은 이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줄 때라고 생각합니다.”
2002년 포르투갈전에서 환상적인 슛을 선보인 후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던 아이 같던 그는
그의 말마따나 ‘성장’해 한국을 짊어질 선수로 꼽히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축구연맹(FIFA) 매거진이 선정한 ‘2006 독일 월드컵을 빛낼 예비
스타 20인’에 뽑히기도 했다. 아직은 어린 그의 어깨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려 있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 굉장히 부담스럽지 않을까?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영광이죠. 월드컵에 나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좋은데, 중요 선수로 꼽힐 수 있다면요.”
‘스타’라고 부르면 그는 여전히 쑥스러워한다.
“에이. 전 11명 중 하나일 뿐이에요. 맨유엔 유명한 스타들이
많지만 그들도 그라운드에선 11명 중 하나잖아요. 저 역시도 그 일부고. 그라운드에선 누구나 평등해요. 그렇기 때문에 스타란 의식도 특별히
없고.”
워낙 조용하고 착한 이미지지만 은근히 악바리 기질도 강하다.
“경기에 지면요? 당연히 기분 나쁘죠. 마인드
콘트롤 해요. 그날 경기의 문제가 뭔지 90분을 되살려 가면서 반성합니다. 그래야 다음번에 실수 안 하죠. 다음 경기에 잘해야만 그전 경기
못했던 게 스스로 용서가 되니까요.”
경기 뒤 그가 “오늘 경기 내용에 만족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 별로 없다. 한 달여
벤치를 지키다 그라운드로 돌아온 반 니스텔루이에게 황금 같은 어시스트를 해 줬던 웨스트햄전과 리그 공식 1호골을 뽑아낸 아스날전 후에나 “후반
들어 괜찮았다”고 평하는 정도다. 보통은 “더 배워야 한다.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스스로를 가볍게 질책한다. 본인은 “완벽주의자는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가만히 보면 정말 완벽주의자 같다. 적어도 축구에서만큼은 ‘완벽’을 추구하는 것 같다.
“정말 축구
잘하고 싶어요. 세상엔 뛰어난 선수들이 너무 많아서요. 아이참. 그 선수들 이름을 어떻게 다 대요. 꼽으려면 수도 없는데요”
겉으로 볼 땐 유명 구단 축구선수에, 돈도 잘 벌고, 국민적인 인기도 얻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인다. 우선 돈만 따져 봐도
그렇다. 연봉 37억 원에 각종 수당까지 합하면 정말 “억” 소리가 난다. 게다가 점점 늘어가는 CF까지. 하이트맥주에 우리은행, LG
엑스캔버스, SK텔레콤 등. 광고 수입만 어림잡아 20억 원은 될 것으로 보인다. 나이키는 축구화, 의류, 각종 홍보 등 풀로 스폰서를 하고
있다. 나이키의 풀 스폰서를 받는 선수는 루드 반 니스텔루이(네덜란드),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포르투갈), 아드리아누(브라질) 등 전 세계에서
3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청년재벌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싱겁다. “재벌이오? 아직도 용돈 받는데요?”
대표팀 호출로 한국으로 들어가 친구들과 어울릴 때나 부모님으로부터 50만 원 정도를 비상금으로 두둑이 받는다고 한다. 유명 축구선수에, 주목받는
스타고, 말마따나 청년 ‘재벌’이니 여자들이 많이 구애할 것 같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 뭐, 그런 거 보고 오는 사람이
이상하죠. 그리고 절 쫓아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사람을 만날 기회도 많지 않고. 예전엔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었는데 요즘엔 별로 생각도
없어요. ‘친구’들이야 좀 있죠. 하지만 애인은 아직.”
주변 사람들 말에 따르면 워낙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스케줄도
은근히 바쁘다고 한다. 오전 훈련 끝나면 영어공부를 하거나 한국에서 공수해 온 책이나 영화를 보고 가끔 ‘위닝 11’이라는 비디오 게임을
한다고.
“10시면 잠자리에 들거든요. 축구를 잘하려면 일찍부터 푹 자야 한다는 소리에 어릴 때부터 습관을 그렇게 들였어요.”
자기 관리가 철저한 대신 누군가를 만나기에는 여유가 없는 듯했다. 그래도 외롭긴 할 것이다. 대표팀 단짝으로 출발해 평생 친구가
된 정경호와는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장시간 통화를 나눈다고 한다. 별로 말이 없는 박지성이지만 일단 마음을 열고 나면 누구보다 끈끈한 애정을
보인다. 박지성이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도전’이다.
“제가 지금껏 한 모든 게 정말 도전 또 도전이었어요. 어릴 적 다들 안
될 거라는 말에도 과감히 축구 하겠다고 도전했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잉글랜드행은 어쩌면 제 운명을 건 도전이었는지도 모르죠.
”
지금 그에게 닥친 도전 과제는 무엇일까? 그는 우선 소박한 얘기부터 했다.
“전 아직 맨유에서 주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완전히 주전이 되는 것, 그게 가장 가까운 도전입니다.” 그렇다면 장기적으로 도전하고 싶은 것은 무얼까? “몇 번
얘기한 적 있지만 유소년 축구를 육성하는 거예요. 특히 잉글랜드 와서 그 생각이 강해졌어요. 맨유의 유소년 트레이닝 시스템을 보면서 유소년이
결국 그 나라 축구 미래를 좌우한다는 걸 확연히 느꼈죠. 제가 그동안 배웠던 것, 좋은 환경에 와서 알게 된 것을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남겨 주고
싶어요. 아, 월드컵이오? 그건 우리 선수들, 아니 대한민국의 도전이 아닐까요? 잘해낼 수 있습니다.”
박지성의 팀 동료들은
2006 독일 월드컵에서 각기 고국 팀 선수로 뛰어 그라운드에서 적수로 만나게 된다. 박지성과 가장 친하게 지내는 루드 반 니스텔루이는
네덜란드팀의 대표 스트라이커. 반 데 사르는 네덜란드팀의 골키퍼로 출전한다.
맨유의 꽃미남 스타 계보를 잇고 있는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는 포르투갈팀을 이끌 신세대 선수다. 골키퍼 팀 하워드도 최근 미국팀의 브루스 어리나 감독이 발표한 23명 명단에 들었다. 루이 사아와
미카엘 실베스트르, 파트리스 에브라는 우리와 같은 조인 프랑스 출신이지만, 월드컵 출전 여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사아와 실베스트르의 경우,
최근 친선 경기에서 선수 명단에 올라 월드컵 출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잉글랜드 부동의 오른쪽 윙백 게리 네빌과 수비수 리오
퍼디낸드도 월드컵에서 활약할 것으로 기대된다. 안타까운 건 팀의 주축이자 잉글랜드 대표 골잡이인 웨인 루니의 갑작스런 부상. 일부에선 월드컵
출전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도 들려오는데, 회복 여부에 따라 그의 출전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글 최보윤 조선일보 영국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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