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원래 죄인을 다스리는 형벌의 도구로 페르시아인, 카르타코인, 애굽인의 사형 도구로 사용되다가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그리스, 로마로 전하여 온 形具입니다.
십자가 형틀은 원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장 많이 보고 있는 열 十字 모양의 十字架가 있고 X字 모양으로 된 것도 있고 T字 모양으로 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먼저 못 박혀 진 다음에 세워지는 것과 십자가를 먼저 세운 다음 죄인을 못 박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명을 쓴 죄 패를 그 위에 붙여 달았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極惡한 罪를 지어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는 노예에 대한 刑으로 恥辱과 嫌惡를 나타내는 極刑입니다.
과거에는 십자가를 치욕의 상징으로 생각하였지만 오늘날은 십자가는 살리는, 생명을 주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병자를 살리는 病院은 빨간 십자가로 표시하여 환자의 생명을 살리어 구하는 곳을 표시하고 있고 赤十字는, 紅十字는 세계적으로 재난을 당한 사람을 구하는 곳, 전쟁 때에 부상자를 구원하고 표시하고 평시에는 재난 당한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고 綠十字는 안전을 강조하여, 생명을 잃지 말라는 주의를 강조하고 있고 교회의 십자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곳임을 상징하는 표식이 되고 이를 온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미련한 사람에게는 멸망하고 죽이는 것이지만 지혜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을 미련한 사람이라 하시고 자기가 미련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따르는 사람을 지혜롭다 하시며 구원을 주시고 계십니다.
예를 들면 Christmas가, 예수 성탄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의 날이 되지만 세상에서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을 미련하게 생각하고 있고 성탄절이 오히려 기쁨의 날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의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할 때에 공산당 간부들에게 전도를 하면 전도하는 우리를 심히 어리석게 생각하고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는데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이 어리석고 더 어리석은 것은 없는 하나님을 섬기느라 고생하는 것이 더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문화 혁명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을 붙들면 투쟁을 할 때에 迷信쟁이, 예수쟁이라고 푯말을 써서 목에다 걸고 길가에 서 있게 하고 꼿갈 모자에도 미신 쟁이, 예수쟁이란 글을 써서 쓰고 있게 하여 어리석은 자가 받는 벌을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가 어떻게 처녀에서 태여 날수 있는가? 바다가 어떻게 갈라지는가? 어떻게 사람이 물위로 걸어 갈 수 있는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는가? 등 성경의 기록된 믿지 못할 일인 기적들을 믿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지혜롭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리석은 미련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을 알지 못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음으로, 십자가를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더 어리석은 사람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는 지혜를 받은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노아 홍수를 하나의 전설적인 이야기로 생각하고 세상에 어디 비가 그렇게 많이 왔기에 온 세상이 물에 덮이고 태산까지 잠기는 일이 있었겠나 하는 상식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노아 방주가 아라랏산에 4,500미터 지점 눈 속에 덮여 있는 것이 발견되고 이것이 사진으로 찍혀서 방송이 되고 보여짐으로 지금은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창이 열리고 깊음의 샘이 터졌다는 이야기는 地下水가 지진에 의하고 땅의 압력에 의하여 얼마든지 땅을 덮을 수 있다는 과학자의 증거가 있었고 성경에 기록된 거룩한 산 이름 그대로 아라랏산(터키)에 높은 절벽 위에, 눈에 덮인 산꼭대기 부근에 지진으로 두 동강으로 나누어진 노아의 방주가 있음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 학자의 말로도 노아의 방주의 규격이 가장 안전하게 여기는 조선술과도 똑같이 만들어 져 있는 노아 방주를 보여 주고 있고 현재의 조선 기술로도 나무로는 그렇게 큰 배를 도무지 만들 수 없다고 말하는 현대 기술로도 불가능한 배를 노아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4,500년 전의 방주가 잘 보전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사람들이 자기의 지혜와 상식을 자랑하던 일이 부끄럽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 2시간 방영한 노아 방주의 이야기를 늦게 錄畵를 하여 뒷부분인 30분 가량 방주의 모습을 錄象하여 두었습니다.
바다가 어떻게 갈라지는가 하고 믿을 수가 없다고 말을 하지만 이스라엘 과학자가 홍해 바다의 해저 지형을 그대로 모형으로 만들고 푸른 잉크로 물들여 바다같이 만들고 선풍기로 바람을 일으키니 물이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벽과 같이 갈라지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실제로 실습하여 보여주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사실이라는 것이 이제 거의 밝혀지고 있고 고고학도 처음에는 성경이 거짓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성경을 토대로 발굴을 하기 시작한 것이 발굴을 할 때마다 성경에 기록된 사실대로 일치하고 있음으로 이제는 하나의 성경의 정확성을 뒷받침하는 학문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발굴한 결과 성경의 기록을 더 확실하게 말하고 있고 오늘날도 무수히 성경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고고학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도는 너무나도 명백하기에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로 미련한 자, 멍텅구리가 되는 것이요 저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못 믿는다고 핑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예수를 믿지 않는 솔직한 이유는 자기가 게을러서, 자기가 하기 싫어서 예수를 안 믿는 것입니다.
이 예수 십자가의 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가장 불쌍하고 저주받은 자가 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모셔들이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십자가는 죽이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5절 - 11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십자가의 도는 첫 번째로 죽는 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을 하여 부활의 생명을 얻었듯이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면서 남을, 나를 대신하여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 속죄 제물이 되어 대신 죽으셨습니다.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옛 사람이 죽지 않으면 죄의 구속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내 몸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은
1. 내가 죽을 죄인 이었음을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시고 자기가 죄인이 되어서 아무런 저항 없이 자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서도 억을 하다는 말을 한 마디도 안 하시고 오히려 기도하며 용서를 부탁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시었습니다.
자기가 죽을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은 억울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죽어 마땅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저항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내가 죄인 인 줄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내가 죄인이 아닌데 무슨 예수가 필요 하겠나요? 이미 자기가 죄인 인줄을 아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서울에 송추라는 곳에 정신 병원이 있습니다. 아는 의사가 원장으로 있어서 그곳에 한번 들려 보았습니다.
모두 멀쩡하고 잘 생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철창으로 가둔 방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정신병자인가 하고 원장에게 물었습니다.
원장의 말은 자기가 정신병자인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병이 다 나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자기가 정신병자인 줄 아는 사람은 여기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죽을 죄인인줄을 아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죽을 죄인임을 깨닫고 사는 것이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2. 자기의 행실을 실제로 죽이고 사는 사람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전에 방탕하였던 행실, 나쁜 습관, 하나님 말씀에 어긋났던 모든 잘못을 죽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믿고 자기를 죽이고 사는 사람, 자기를 다스리며 사는 사람, 좁은 길로 가고 있는 사람이 생명의 길로, 십자가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옛날 성질을 아직 죽이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찬송가 208장
1절 - 주예수 내맘에 들어와 계신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예수 내맘에오심 주예수 내맘에오심 주예수 내맘에오심 물밀 듯 내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예수 내맘에오심
2절 - 주예수 내맘에 들어와 계신후 망령된 행실을끊고 머리털보다도 더많던 내죄가 눈보다 더희어졌네 주예수 내맘에오심 주예수 내맘에오심 물밀 듯 내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예수 내맘에오심
3절 - 내맘에 소망을 든든히 가짐은 주예수 내맘에오심 의심의구름이 사라져 버림도 주예수 내맘에오심 주예수 내맘에오심 주예수 내맘에오심 물밀 듯 내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예수 내맘에오심
4절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다가 밝은빛 홀연히보고 저멀리하늘 문환하게 보임도 주예수 내맘에오심 주예수 내맘에오심 주예수 내맘에오심 물밀 듯 내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예수 내맘에오심
5절 - 나이제 천성에 올라가 살기는 주예수 내맘에오심 천성을향하여 내가 곧 가리니 그기쁨 비길데없네 주예수 내맘에오심 주예수 내맘에오심 물밀 듯 내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예수 내맘에오심
문둥이 거지가 전도사가 되었지만 과거 쓸어 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초대받은 후에 잠시 아무도 없을 때에 가방에다 음식을 쓸어 담았는데 주인이 애꿎게 아이를 때리며 좋은 음식을 다 먹어 치웠다고 야단 칠 때에 그 전도사가 자기의 잘못을 깊이 깨닫고 그 못된 버릇을 죽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손해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자기의 행실을 죽여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3. 십자가는 일생을 지고 죽을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마가 복음 8장 34절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태 복음 10장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십자가를 지는 기간은 죽어 천당에 가는 그 날까지 지고 있다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열심히 헌신하였다 하여도 지금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는다면 이는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3장이나 3장에는 의인이 돌이켜 죄를 범하면 이미 과거에 행한 모든 의는 기억한 바가 되지 않고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내가 무엇을 하였다고 자랑하지 말고 오늘 십자가를 지고 믿음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은 평생이 괴롭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때에 십자가가 벗어지고 영원한 기쁨의 생명이 누리어 지게 됨을 알고 내 십자가를 평생 지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2. 십자가의 도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犧牲을 말합니다. 희생은 자기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말하지 않고 자기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당하는 고통이나 죽음을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시고 원죄도 없으시고 본죄도 없으시고 자범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한 무죄한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희생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희생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희생함으로 많은 여러 사람이 좋음을 얻게 되는 것이 희생의 도리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같이 억울한 분은 없습니다. 죄도 없으시면서 매를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심지어 최고의 고통으로 죽음을 맞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며 희생의 죽음을 하는 것을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말하고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억울함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을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희생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당하고 사는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경우 바르게 살지 말고 조금 바보가 되고 손해를 당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며 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주위의 사람을 위하여 내가 십자가의 희생을 당하며 다른 사람을 그 만큼 잘되게 하는 것이 사랑이요 희생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이러한 희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道로만이 이르게 됩니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길이 많이 있습니다. 도덕의 길이 있고 윤리의 길이 있고 효도의 길도 있고 학문의 길, 예술의 길, 문학의 길 등 수없이 많은 길이 인생에 길을 선택하여 가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에 좋은 길이라는 것을 선택하여 가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은 선행을 많이 하여 좋은 극락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산 속에서 수양을 많이 하여 영생의 길을 가 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금욕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다른 잡신을 섬겨서 복을 받으려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이르는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 이외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나라 속담에 아는 길도 물어 가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길임을 알았으면 우물쭈물 하지 말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제는 이 길을 전력 질주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이 길을 달려가는 법은 예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가 지금 자랑하고 있는 것이 내가 달려가고 있는 길입니다.
내가 지금 돈 버는 일을 자랑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지금 돈을 버는 길을 달려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학문이나 명예를 자랑하고 있다면 이 또한 학문의 길, 명예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노래를 잘하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면 이는 가수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임을 알고 항상 예수 십자가를 자랑하며 복음 전도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자랑은 성경에 악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오직 예수를 자랑하라고 하였고 예수를 자랑하는 것은 바로 복음 전도를 하는 것이요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 확인하는 것입니다.
정리: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지키며 이를 위하여 살아 갈 때에 예수를 믿지 않아 멸망 받을 사람들이 볼 때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주일이면 세상 사람과 같이 즐기지도 못하고 교회에 나가서 헌금을 하고 시간을 빼앗기고 돈도 빼앗긴다고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은 결국은 나에게 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큰 배낭을 지고 힘들게 뛰어 다니며 전쟁을 하지만 그 배낭 속에서 양식이 나오고 담요가 나오고 실탄이 나오고 은폐물을 만들 수 있는 삽이 나오고 목마를 때에 목을 적셔 주는 생수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배낭, 십자가를 반드시 지고 사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 하여도 그 십자가가 내게 더 큰 유익이 됨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대구에 사는 어느 권사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너무 힘이 들고 무거워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님 주님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톱질을 잘하는 목수이었잖아요? 내 십자가 너무 크고 무거우니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하고 기도를 하였더니 주님이 톱을 들고 오셔서 십자가를 잘라 주었습니다. 한참 지고 가다가 보니 아직 전보다는 가볍지만 그래도 무거워서 또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 번을 자르고 나니 아주 작고 가벼운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요단강 가에 왔는데 갚은 강, 낭떨어지기 강, 그랜드 캐년 같은 강 언덕입니다.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는가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른 성도들이 큰 십자가를 힘들게 지고 와서는 강 절벽에서 저쪽 절벽으로 십자가를 턱 넘어뜨리면 그 십자가가 외나무다리가 되어 그 위를 걸어 건너갑니다.
자기도 십자가를 놓고 건너가려고 하니 자기의 십자가는 다 잘라 버려서 몽당 십자가가 되어 도무지 건널 수가 없어서 다시 크게 소리를 치며 주님을 부릅니다. 주님 주님 내 십자가를 크고 길고 무겁게 다시 만들어 주시요하고 소리를 지르니 옆에 있던 남편이 당신 꿈을 꾸었오 하며 흔들어 깨웁니다.
그 후부터 이 권사님은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나 큰 십자가만을 골라지는 권사님이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는 도무지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힘이 들고 어려워도 내 십자가를 끝까지 잘 지고 십자가의 고난, 십자가의 희생의 길을 걸으면서 주님 나라에 영광스럽게 이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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