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注: 이 글은
한겨레신문 1989년 9월 12일자에 실린 칼럼이다. 박종만씨 추천. 추석은
귀향이다. 그러나 그 귀향이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고기는 옛 못을 생각한다(覇鳥戀舊林 池魚思故淵).”는 陶潛(도잠)의
감상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또한 그것은 “흥청한 나룻배에 올라 고향으로 간다/갈 곳은 붉은 노을에 잠을 깨었고”라는 스테판 게오르게(Stefan
George) 류의 오만한 ‘귀향’으로 나타나서도 안 된다. 고향은 언제나 우리에게 영원한 ‘힘의 샘’이기 때문이다. 어디엔가 돌아갈 거처가
있다는 사실은 분주한 문명에 찌든 도회인들에게 분명히 넓고 깊은 위안이 된다. 고향은 언제나 그 넉넉한 가슴으로 우리를 맞으면서도 구태여 그
대가를 기다리지 않기에, 아파트의 면적이나 승용차의 배기량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도시의 각박한 인심으로 오염시키지 않도록 우리 모두 굳게 다짐해야
한다. 비록 화물 트럭의 뒤칸에서 밤새 시달리며 달려 왔어도, 비록 해진 양복 주머니 속에 빳빳한 지폐 다발이 들어 있지 않더라도 다만 그동안
정직한 삶과 건강한 모습을 가지고 고향의 부모와 형제와 친지와의 반가운 재회를 기대할 수만 있다면 굳이 우리의 ‘빈손’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흙에 지친 어머니의 투박한 손길처럼 우선 겸손해지는 일, 그것이야말로 귀향에 앞서 우리의 가슴에 준비해야 할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추석은 결실이다. 겨우내 터졌던 손등이 아물기도 전에 언 땅에 씨를 뿌렸고, 그리고 잔등에 모닥불을
피워대던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자식처럼 키워낸 그 수고와 권태의 결실들이 마침내 이 추석에 진열된다. 그러니 허리띠를 풀자. 추수감사절에
감사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節食(절식)하는 녀석뿐이란 서양의 익살이 있지 않던가? 혹시 과잉소비를 걱정하는 정부 관리나 생산의 차질을 불평하는
기업가들이 여기 끼어들어 시비하거든 그들의 궁둥이를 한번 힘껏 걷어차 주자. 이미 옛적에 기름진 땅을 찾아 흉노족은 대륙을 넘어 대이주를
감행했으며, 이웃 나라의 금붙이를 약탈하기 위해 무적함대는 바다를 누볐지만, 지금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민족 대이동에는 수확의 고마움을 조상에게
전하고 그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눈다는 숭고한 뜻이 담겨져 있다. 결국 모든 결실은 흙과 노동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하나를 주면
반드시 하나 이상을 돌려주는 그 흙과 노동의 정직한 계산으로부터 우리는 추석의 절기를 마련한 자연의 섭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추석은 화해이다. 모든 새로운 잉태는 투쟁으로 비롯되지만 마침내 화해로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추석
귀향단을 모집하는 안내문들이 어지러운 대학 게시판의 한 모퉁이에서 ‘수확의 계절 가을에 사소한 부주의로 포로가 되어 이렇게 무기력하게 그들의
관용이나 바라는 처지가 된 지금의 내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느 자리에 있건 민중의 대의에 어긋나지 않게 당당히 생활할
작정이다. 이곳 구치소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많은 인내와 방황과 고민을 요구하는 곳이기도 하다.’로
이어지는 어느 젊은이의 공개된 편지를 읽으면서, 정치적 신조와 판단이 다소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숱한 사람들을 철창 안에 가두어 둔 채, 햇곡식과
햇과일로 드리는 제사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잠시 생각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실로 제사의 참뜻이 사람과 사람의 화해에 있다면 추석은
마땅히 그 진정한 화해의 계기가 되어야 할 텐데…. 추석은 대비이다. 가을을 거두고 나면 다시 혹독한 겨울의
시련이 다가온다. 그러므로 가을의 추수는 그만큼 더 충실해야 한다. 이 가을 밤 그대를
생각하고 쓸쓸한 하늘을 쳐다보며 거니네. 적막한 산중에 솔방울이 떨어지는데 숨어사는 그대 나로
하여 잠 못 드는가. 懷君屬秋夜 散步昑凉天 山空松子落
幽人應未眼 나 또한 그대로 인해 잠 못 드는 이 밤, 머지 않아 찾아올 그 겨울에의 대비를 서둘러야겠다.
지금부터 먹을 갈고, 촛대를 닦고, 책장을 정돈한다면 이번 겨울은 아주 호사스럽게 지내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추석은 재회와 화해의 시기이고,
또한 결실과 대비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